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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100년 비화 · 2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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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단성사 건물과 함께 한평생 잡아온 붓을 놓겠다는 이 시대 마지막 ‘간판쟁이(극장간판미술가)’ 백춘태씨(60).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퇴계원 작업장으로 찾아가던 날은 해사한 봄 햇살이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지바른 산 아래 비닐하우스 가건물로 들어서자 수십 개의 빈 페인트통과 영화포스터, 스틸사진이 바닥에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양쪽 벽면으로 어른 키 두세 배가 넘는, 수명을 다한 극장간판들이 하얀 덧칠과 함께 새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미처 구석까지 찾아들지 못한 채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거대한 비행기 격납고를 연상시키는 휑뎅그레한 작업장에서 막 붓질을 끝낸 백씨가 앞마당으로 의자 두 개를 내왔다. 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헝클며 지나가는 꽃샘바람에 아랑곳없이 습관처럼 먼 산을 휘둘러보던 그가 40여 년간 ‘간판쟁이’로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

산 가운데 들어앉은 옹색한 마을 소로를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나타나는 금주지(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저수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낚싯줄이 수면에 닿아 파문을 일으키면 답답한 작업공간과 도심의 번잡함에 찌든 피로도 저만치 달아난다. 지난 겨울 송어를 낚아 올린 뒤로 좀처럼 짬을 낼 틈이 없었지만 휴식 삼아 즐기는 던질낚시는 고즈넉한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오랫동안 정을 붙인 낚시는 한꺼번에 두 마리 고기를 낚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걸 모르던 사춘기 시절, 반쯤 미쳐 있던 ‘그림’과 ‘영화’ 둘 다 잡기 위해 극장간판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미대를 졸업하고 화가가 되려던 희망이 가난한 목수 아들에겐 ‘언감생심’의 꿈임을 깨달은 직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대를 가겠다고 말했다. “밥벌이도 못 하는 환쟁이가 되겠다고?” 펄쩍 뛰던 아버지는 기실 ‘환쟁이’나 ‘대학’에 대해 무지했다. 평생 대팻밥을 먹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월남 피란민 아버지에게 대학이나 미대는 의식 밖의 일이었다. 소학교 때 기억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반응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무작정 그림이 좋아 공책이며 책이며 빈 종이만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려대던 소학교 2학년 때던가. 무심히 공책을 뒤적이던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 “동생이 넷씩이나 딸린 집안의 장남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벼락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책가방과 공책이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몽둥이 찜질을 피해 아버지 손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

해질 무렵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돼 찾아 나선 어머니는 추위를 피해 이웃집 굴뚝 옆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나는 어머니가 곁에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때 시름 깊던 어머니의 한숨소리는 ‘간판쟁이’가 된 후에도 오래도록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림에 이어 영화에 빠져든 건 인천 송도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극장은 엄격한 ‘학생 출입금지구역’이어서 수업을 ‘땡땡이’치고 몰래 드나들다 훈육주임이나 여순경한테 발각되면 정학이나 퇴학을 감수해야 했다. 살벌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밥먹듯 드나드는 ‘불량학생’에게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극장 근처에 단골 빵집을 정해두면 영화를 보는 동안 책가방과 모자를 맡길 수 있었고, 까까머리 학생 티를 내지 않게 털모자까지 빌려 쓸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훈육주임을 발견했지만 모자 덕분에 걸리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훈육주임의 눈길을 피해 출구를 나서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여순경에게 발각됐다. ‘설마 남자화장실까지 쫓아오랴…’싶어 줄행랑쳤다. 곧이어 “학생, 거기 둘째 칸에 있는 것 알아, 냉큼 나와”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쯤 지난 뒤 화장실을 나서는데 그때까지 꼼짝 않고 문 앞을 지키던 여순경에게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다음날로 일주일간 아침마다 빈 가방을 들고 인천자유공원으로 등교(?)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정학당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공원에서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다 학교가 파할 무렵에야 집에 들어갔다.

그 즈음 수업시간에도 머리 속에서 영화가 떠나지 않았다. 칠판이 스크린처럼 물결치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게리 쿠퍼가 등장했다. 홀로 여러 명의 악당과 대치한 채 최후의 결투를 눈앞에 둔 ‘하이눈’의 마지막 장면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백춘태, 다음 읽어봐.” 국어선생의 목소리는 게리 쿠퍼가 쏜 총성과 뒤섞여 아득한 환청처럼 들려왔다. 번번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수업시간마다 벌을 받기 수차례. 그래도 극장 출입을 포기할 수 없었고 두 번씩이나 정학 받은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쯤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실컷 볼 수 있는 ‘간판쟁이’는 미대를 포기한 대신 기댈 수 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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