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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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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경덕왕(景德王, 742∼765년) 재위 기간이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시대(佛國時代)의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해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찌 불국사와 석굴암뿐이겠는가. 수많은 문화유산이 장구한 세월 속에 모두 인멸되어 그 자취를 남기지 않을 뿐이다.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수많은 문화사업이 이루어졌던 사실은 ‘삼국유사’를 통해 그 일부나마 기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 첫째가 황룡사(皇龍寺) 동종과 분황사(芬皇寺) 동조 약사여래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종·분황사 약사·봉덕사종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35대 경덕대왕은 천보(天寶) 13재(載; 당 현종은 천보 3년 1월1일부터 年을 載로 고쳐서 14재까지 재위하고 안록산 난으로 숙종에게 전위한다. 숙종이 至德 3載에 이르러 建元 元年으로 환원하니 연을 재로 쓰는 것은 천보 3재에서 지덕 3재에 이르는 14년뿐이다. 경덕왕 13년, 서기 754년임) 갑오에 황룡사종을 만들었다. 길이는 한 길 세 치(一丈三寸)고 두께는 9치이며 무게는 49만7581근이다. 시주는 효정(孝貞) 이찬과 삼모(三毛)부인이고 장인(匠人)은 이상댁(里上宅) 하전(下典)이다. 숙종(肅宗, 1096∼1105년)조에 새 종을 거듭 만드니 길이가 6자8치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에 분황사 약사동상을 만들었다. 무게가 36만6700근이고 장인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다. 또 황동(黃銅) 12만근을 희사하여 선고(先考; 돌아간 아버지)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했으나 이루어내지 못하고 돌아가자 그 아들 혜공대왕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 맡은 관청)에 명하여 장인들을 모아서 이를 이루어내고 봉덕사(奉德寺)에 봉안하였다.

봉덕사는 곧 효성왕(737∼741년)이 개원 26년(738) 무인에 선고 성덕대왕의 추복(追福)을 받들기 위해 창건한 곳이다. 그래서 종명(鐘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 하였다. 조산대부전태자사의랑한림랑(朝散大夫前太子司議郞翰林郞) 김필월이 왕명을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많아서 싣지 않는다.”

황룡사 동종과 분황사 약사여래 동상은 현존하지 않으나 (도판 1)은 현재까지 전해져서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17회에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그 결과 이 ‘삼국유사’ 기록 내용이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만 마무리지은 해를 대력 경술(770) 12월이라 하여 현존한 성덕대왕신종명에서 밝힌 대력 6년(771) 신해 12월14일과는 1년의 오차를 보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분명히 일연(一然)대사가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당시에도 이 이 남아 있어 종명을 읽었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실수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옮겨 적는 과정에 그와 같은 착오가 발생했으리라 생각된다. 혹시 종명을 직접 검색하지 않고 당시까지 남아 있던 봉덕사 사지(寺誌)를 옮겨 적던 중 다른 기록과 혼동하여 이런 잘못을 저질렀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립하던 시기에 이미 황룡사 동종과 분황사 약사여래동상을 먼저 이루어내었던 사실을 이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황룡사 동종이 49만7581근으로 의 12만근에 비해 구리 투입량이 4배가 넘는데도 높이가 겨우 한 길 3치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두께는 9치라 했다. 한 길 높이로 만들었다는 현존 봉덕사종의 실측치가 높이 303cm 두께 20.3cm여서 한 자 길이가 30cm 정도였다는 계산이 나오니 9치는 27cm에 해당한다. 따라서 구리 투입량과 크기의 비례가 서로 맞지 않는다. 혹시 한 길 석 자(一丈三尺)를 한 길 세 치로 잘못 적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거대한 황룡사 동종은 봉덕사종에서 보여주는 신라 범종의 완성미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미숙성이 있었던 듯, 만든 지 300여 년이 지난 고려 숙종(1096∼1105년) 연간에는 벌써 못 쓰게 돼 새 종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과중한 무게와 크기 및 두께가 종의 기능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황룡사 동종을 만드는 비용을 댄 시주가, 경덕왕의 첫 왕비로 경덕왕이 21세쯤 되었을 때인 경덕왕 2년(743) 봄에 아들을 못 낳는다 하여 출궁시킨 삼모부인으로 되어 있다. 즉 경덕왕이 출궁시킨 전 왕비인 것이다. 그리고 함께 시주한 이는 이찬 김효정이라 하였다. 이 김효정은 삼모부인의 숙부뻘되는 인물일 듯하다. 삼모부인은 경덕왕의 외조부 김순원의 아우인 이찬 김순정(金順貞)과 당대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수로부인(水路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여인이라고 생각된다. 경덕왕에게는 5촌 이모뻘이었다.

그런데 이들 외척가문이 신문왕 이래 계속 군림하며 왕권을 좌우하게 되니 경덕왕은 등극하자마자 무자(無子)를 핑계삼아 과감하게 왕비를 출궁시키고 그 조카딸인,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滿月)부인을 맞아들여 새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이로써 외척의 발호를 억제하고 그들의 반발도 무마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출궁당한 지 10년도 넘은 전 왕비 삼모부인의 대시주를 받아들여 황룡사 동종을 만들게 했으니 그 통치능력은 불국시대의 절정기를 주도해 내고도 남을 만하다 하겠다.

더구나 김효정은 일찍이 성덕왕 13년(714) 1월에 행정수반인 중시(中侍)가 되어 김유신계라고 생각되는 성덕왕의 첫 왕비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외척가문의 중심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흥왕이 세운 진골 왕통의 원찰이며 선덕여왕이 세운 구층탑이 있어 삼국통일의 위업(偉業)을 과시하는 통일신라 왕국의 상징적 중심 사찰인 황룡사에 50만근에 가까운 동을 시주하여 동종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면 경덕왕의 절대왕권에 절대복종을 맹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황사 약사동상 조성이나 불국사와 석굴암 건설 등이 이처럼 비대해진 집권가문들의 재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김문량(金文亮) 김대성(金大城)으로 이어지는 집권가문이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영에 앞장서 깊이 관여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문량을 성덕왕 5년(706) 8월에 중시가 되었다가 성덕왕 10년(711) 10월에 순직한 김문량(金文良, ?∼711년)과 동일인으로 인정하고, 김대성을 경덕왕 4년(745) 5월에 중시가 되었다가 경덕왕 9년(750) 1월에 면직된 김대정(金大正)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덕왕은 성덕왕이 다져놓은 굳건한 국력을 바탕으로 집권가문들의 축적된 힘을 문화사업에 기울이게 함으로써 불국시대의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23년(754)에는 선덕여왕 때 조성한 영묘사(靈妙寺) 장륙상(丈六像)을 개금(改金; 불상에 금박을 다시 입히는 일)하기 위해 벼 2만3700석을 시주하기도 한다.

만불산(萬佛山)의 기교

그러나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형 예술품의 대표작은 만불산(萬佛山)이라 불리던 소형 불국세계의 모형 조각인 것 같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삼국유사’ 권3 만불산 항목을 옮겨 보겠다.

“경덕왕(742∼764년)은 또 당나라 대종(代宗, 763∼779년)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인에게 명하여 5색(色) 담요를 만들게 하고 또 침단목(沈檀木; 오랜 세월 물 속에 담가 두어 목질이 치밀해지고 향기가 나는 나무)을 조각하여 명주(明珠; 밝게 빛나는 구슬)와 미옥(美玉; 아름다운 옥)과 함께 가산(假山; 꾸며 만든 산)을 만들게 하니 높이가 한 길 남짓하였다.

이것을 담요 위에 놓으니 산에는 깎아지른 바위와 괴석 및 간혈(澗穴; 물이 흘러나오는 동굴)이 구간마다 나뉘어 있는데 매양 한 구역 안마다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는 광경이나 여러 나라 산천의 정경이 있었다. 산들바람이 문으로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날고 제비와 참새가 날아올라 춤추며 들락거리니 자세히 살펴보아도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없었다.

그 안에 만불(萬佛; 만 구의 불상)을 봉안했는데 큰 것은 한 치(3cm 정도)가 좀 넘고 작은 것은 8∼9푼이라서 그 머리는 혹 큰 기장알만하고 혹 녹두 반쪽만한데 나발(螺髮; 소라 껍데기 모양의 머리칼)과 육계(肉; 살이 솟아서 이루어진 상투), 백호(白毫;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 둥글게 말려 있음)와 미목(眉目; 눈썹과 눈)이 뚜렷하여 상호(相好; 잘생긴 모습)를 다 갖추었으나 다만 방불할 뿐 상세할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서 만불산이라 일컬었다.

다시 금과 옥을 새겨서 유소(流蘇; 기나 가마 등에 장식하는 술)와 번개(幡蓋; 장대에 걸어 늘어뜨린 천이나 덮개 모양) 및 암라(菴羅; 망고나무), 담복(; 치자)의 화과장엄(花果莊嚴; 꽃과 과일로 장엄함)과 백보누각(百步樓閣; 백 계단이나 되는 높은 누각)과 누대(樓臺), 전각(殿閣), 당우(堂宇), 정사(亭)를 지었는데 모두 크기는 비록 작으나 형세는 살아 움직였다.

앞에는 빙 둘러 서 있는 비구의 형상이 1000여 구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색(紫金色; 자줏빛 도는 금색) 종(鍾) 3틀이 늘어서 있는데 모두 종각과 포뢰(蒲牢; 용의 일종 곧 龍)가 있고 고래로 당목(撞木; 치는 나무)을 삼았다. 바람이 있어서 종이 울면 빙 둘러 선 승려들은 모두 엎드려 땅에 닿게 절하고 범음(梵音; 경 읽는 소리, 범패 소리)이 은은하게 들리니 대개 종에서 끌려 나는 소리다.

비록 만불이라고 하나 그 실제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미 이루어져서 사신 편에 당 대종에게 보내니 대종이 보고 탄복하기를 이렇게 하였다. ‘신라의 재주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 이에 구광선(九光扇; 9가지 빛을 내는 부채)을 바위 사이에 두어 불광(佛光)이라 부르고 4월8일에 양가승도(兩街僧徒; 장안의 큰길 좌우에 사는 승려, 행정 편의상 좌우가로 나누어 통괄하였음, 즉 장안의 모든 승려)에게 조서를 내려 내도량(內道場; 궁중 안에 두었던 사찰)에서 만불상에 예불하게 하고 삼장법사인 불공(不空)에게 명하여 밀교(密敎) 경전을 1000번 염송하게 하여 이를 찬탄 경축하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 교묘한 재주에 탄복하였다.”

위에 번역한 내용대로라면 지금 세상에 기계와 기기를 응용하여 만든다 해도 이보다 잘 만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녹음장치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범패 소리까지 은은히 울려 퍼지게 장치를 했단 말인가. 1200여 년 전에 이미 최첨단 설치미술의 선구를 보여줬던 것이다. 그래서 설치미술의 도사라 할 수 있는 밀교승의 대표 불공 삼장법사에게 다라니를 1000번씩이나 염송하게 하여 그 설치미술에 생동감을 불어넣게 하였던 모양이다.

불공(不空, 705∼774년)은 불공금강(不空金剛, amogh-a-vajr-a)의 약칭으로 인도 사자국(지금의 스리랑카) 출신이다. 진언종(眞言宗) 제6대 조사(祖師)가 되는 인물인데 16세인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삼장을 따라 중국에 와서 70세까지 살며 밀교를 널리 전파한 대선지식이다.

일찍이 천보 5년(746)에 밀교 경전을 더 구하기 위해 사자국에 갔다 오자 당 현종도 그에게 깊이 귀의하였다 하니 현종의 손자인 대종이 그에게 만불산을 경축하는 다라니를 염송하게 했을 때(764년경), 이미 환갑 나이로 광지(廣智)삼장의 존호를 받았을 것이다. 당나라 밀교를 총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에게 직접 나서서 만불산을 대상으로 성대한 밀교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하니 만불산의 조형적 가치가 얼마나 뛰어났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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