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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11

서울 도심의 숨은 명당 ‘안국동 8번지’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고택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서울 도심의 숨은 명당 ‘안국동 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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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수적 기운이 짱짱한 화강암 지반의 종로구 일대, 특히 안국동 지역은 서울의 대표적 명당터. 그중 ‘안국동 8번지’ 윤보선 고택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명택이다. 한국 정치의 산실이라고도 불리는 이 고택을 처음으로 낱낱이 밝힌다.
서울 도심의 숨은 명당 ‘안국동 8번지’
서울은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중심으로 우뚝 선 도시다. 현재 한국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00만 가량의 인구가 살고 있는 메트로폴리탄이기도 하다. 시간적으로는 600년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고, 공간적으로는 1200만이라는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적인 도시 서울.

그 서울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과연 어떤 집을 꼽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분야의 원로들에게 자문한 결과, 정치인 이종찬씨 집안과 윤보선 전대통령 집안을 꼽았다(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음).

이종찬씨 집안은 선조 때 인물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직계 후손으로서 8대에 걸쳐 내리 판서를 배출하였고, 대대로 서울에서 거주하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소리를 들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 최근 조명받고 있는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모두 이 집안 사람들이다.

또 윤보선 전대통령 집안은 단지 대통령을 배출했기 때문에 명문가로 지목되는 것이 아니다. 근·현대사에서 활약한 이 집안 윤씨들이 한국인명사전에 무려 50여 명이나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한 집안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씨 집안은 아쉽게도 고택이 남아 있지 않고, 윤씨 집안은 다행히 고택이 남아 있다. 그 집이 바로 종로구 안국동 8번지에 위치한 해위 윤보선(1897∼1990) 고택이다. 그러니까 윤보선 고택은 1200만 인구가 살고 있는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명택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고택

고택 풍수에 관심 있는 필자로서는 진작부터 한 번 구경해보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그러나 윤보선 고택은 연고가 없는 외부인이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한국의 이름난 고택들은 대체로 외부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 집만큼은 예외였던 것이다. 그동안 TV 방송국을 비롯한 언론 매체들도 수차례 취재 또는 촬영을 시도했지만 집 주인의 허락이 나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 이 고택 안채에서 장손 가족이 살림을 하고 있으므로 찾아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살고 있는 안방 모습을 공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집 주인은 윤보선 전대통령의 장남인 윤상구(尹商求·53)씨.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 장로를 맡고 있다는 간단한 신상만 밝힌다. 조용한 성품이어서 남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할 뿐만 아니라, 언론에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은 더더구나 기피한다. 사실 명문가 후손은 언론에 노출될수록 돌아오는 것은 사생활의 제약이다.

다행히 필자는 윤상구씨로부터 취재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하지 않고 고택에 대한 사진 촬영만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고택 내력에 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은 컴퓨터 통신인 이메일로 주고 받았다. 필자가 이 집에 대한 참고자료로 이용한 것은 한옥 전문가인 신영훈씨가 1991년에 취재한 ‘한국의 종가집’이란 잡지 연재물 뿐이다.

원래 이 집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쯤인 구한말에 민씨 성을 가진 대감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인품이 훌륭해서 ‘민부처’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었다.

그가 장안의 유명한 도편수를 동원해서 99칸이 넘는 거대한 규모의 저택을 짓는다는 소문이 임금인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종이 민부처를 소환하여 “네가 대궐만큼이나 큰 집을 짓는다고 하는데 반역할 의사가 있느냐”하고 추궁하였다고 한다. 이때 민부처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이 집은 부처가 살 집입니다”라고 하였다나. 부처가 살 집이라는 것은 불교 사찰을 의미하고, 사찰이라면 당연히 크게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동시에 자신의 별명이 부처이니 자기가 살 집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의 재치있는 답변에 고종도 파안대소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 박영효 대감이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적당한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는데, 고종이 민부처를 불러 박영효 대감에게 집을 넘겨주라고 명령을 내려 박영효(1861∼1939)가 얼마간 살았다고 한다.

담장 하나 사이로 붙어 있는 옆집은 ‘열하일기(熱河日記)’와 ‘허생전(‘許生傳)’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그의 손자로서 개화파의 수장격이었던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살던 집이다.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백송(白松)이 아직 그 터를 지키고 있다. 현재는 헌법재판소로 바뀌었다.

개화기 역사를 보면 박영효는 갑신정변(1884)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일차 일본에 망명한 적이 있고, 그 후 김홍집 내각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한 일로 인해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1907년에 귀국하여 용서를 받았다. 두 번의 일본 망명과 귀국 등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박영효가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시기는 아마도 일차 망명에서 돌아온 1880년대 후반쯤이 아닐까 싶다. 김옥균(1851∼1893)이 박영효에게 써준 편액이 이 집에 남아 있으니 두 번째 망명 이후는 아닐 것 같다.

이후로 잠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1910년대에 윤씨 집에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 그 이후로 윤씨 집안이 계속 살아 왔으며 종가로 유지되고 있다.

100칸이 넘는 저택이라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 때는 일가 친척 70여 명에다가 하인들까지 합쳐 모두 100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바깥 행랑채, 큰 사랑채, 뜰 아래채, 곳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고 문간채, 산정채, 안채, 작은 사랑채만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대지 1400평에 건평 250평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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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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