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아파트 파는 다빈치 에어컨 파는 피카소

광고 속의 미술 이야기

  • 정장진 < 문학평론가 >

    입력2005-04-08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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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는 상품이 있고 소비자가 있는 시장에서만 자랄 수 있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옛 동구권이나 북한의 빛 바랜 사진 같은 살풍경 속에서는 어디에서도 광고를 찾아볼 수 없다. 광고라는 꽃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또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자유일 것이다. 만들고 팔고 살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이 자유가 얼마나 모순에 찬 허울 좋은 것인지를 지적하는 일은 이제는 철 지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할 때 이 꽃이 요사스러운 꽃인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지우기 힘들다. 이렇게 광고는 보기와는 달리 결코 단순하지 않다.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마치 공기처럼 매일 호흡하고 살아가지만 실제 광고는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을 지닌 시스템이며,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아무도 자유스러울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이기도 하다.

    인간이 오늘날처럼 이미지가 집중된 시대에 살았던 때는 일찍이 없었고, 홍수를 이루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광고와 관련을 맺고 있다. 소형 인쇄물은 물론이고 벽 전체를 도배하다시피 한 대형 간판에서부터 고화질의 멀티비전을 이용한 동화상 이미지까지 우리는 이제 이미지에 포위되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빈한한 사람들이 광고 이미지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하지만 광고는 노동자든 지식인이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인간을 단순 소비자로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보면 광고는 상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그리고 구매력으로 재편된 새로운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지적이 정확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이 새로운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는 사물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을 바꾸어놓았고 감성과 감각까지 바꾸어 놓는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광고를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정당하게 취급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나아가서는 본다는 행위의 위력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만 광고의 위력과 해악을 올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가장 성공한 광고 카피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이런 문구들을 쉽게 기억해낼 것이다. 이 카피들은 추측하건대 매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성공한 광고 카피를 하나 더 든다면 모 침대 회사의 모순 어법을 이용한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를 들 수 있다. 분명히 가구이지만 가구가 아니라고 하는 이 역설적 카피는 침대가 건강과 관계된 가구라는 뜻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고, 나아가 지나치게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난 후 허리를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을 심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었다.

    광고 문구는 위의 예에서 보듯이 매출과 직결될 정도로 상당히 중요하다. 간단한 한두 마디 속에 제품의 이미지와 소비자의 뇌리에 각인되기 쉬운 간결성은 물론이고 시적 여운까지 남겨야 하니 광고 카피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져질 듯 생생한 시각효과

    하지만 이제 광고에서 문구는 갈수록 그 중요성과 호소력을 잃어가는 추세다. 이런 변화의 배후에는 무엇보다 제품의 소비 사이클이 급속히 짧아진 후기 산업사회의 소비 패턴이 자리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영상시대이기도 한 오늘, 문장보다는 이미지가 중요해져 가는 전반적인 문화 흐름이 근원적인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논리적인 기억이 감각적인 기억에 자리를 양보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색과 형태는 감각적인 것들로, 무의식적으로 기억되고 저절로 떠오르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텔레비전과 만화를 보며 자란 요즈음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도 이미지 홍수 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본 사람들은 비행 순찰차가 고층 빌딩 사이를 날아가는 장면 한켠에 코가콜라와 팬암 항공사의 네온사인 광고가 번쩍이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부터 20년 후인 미래에도 코카콜라와 팬암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음료회사이며 항공사로 살아남는다는 이 메시지는 이른바 PPL(Product Plac ement) 마케팅의 전형으로 꼽을 만하다. 영화를 꼼꼼히 보는 사람들은 요즈음 들어 이 PPL 광고가 한국 영화에도 부쩍 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꽤 잘 만든 한국 영화 중 하나인 ‘주유소 습격 사건’에서 주유소 기둥에 붙어 있는 모 카드 회사의 광고판을 떠올려보자. 이미지는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은밀하게 숨어 있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한다.

    영화의 소품이나 배경에 잠깐 등장하는 이런 유형의 광고는 책 마케팅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주인공이 들고 다니는 시집이나 소설책이 있다고 하자. 내용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부실하지만 않다면 아마도 쉽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광고의 대세는 문장에서 이미지로 옮겨가고 있으며, 이런 추세는 고화질 TV 같은 첨단 디스플레이 기기의 발달과 점점 소형화하는 단말기 등 정보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갈수록 심화할 것이다. 얼굴의 솜털까지 느껴질 정도의 선명도라면 이미지는 눈으로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기 위한 것으로 변할 것이다. 시각예술이면서 촉각에 호소하는 이런 유의 시도는 불과 몇 년 안에 안방을 휩쓸 것이고, 이미 이러한 하이퍼 리얼리즘적 광고시대를 대비하는 광고회사도 적지 않다.

    따라서 광고계에서도 기술이나 반짝이는 재치만으로는 살아 남기 힘든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술은 아주 빠르게 발전할 것이고, 재치나 아이디어만으로는 갈수록 강해지고 고도로 세련될 일반 대중의 이미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선명한 색이나 또렷한 이미지 자체가 관건이 아니며 이러한 고화질을 통해 무엇을 조합해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느냐에 광고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래의 광고에서도 역시 생명은 콘텐츠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4~5년 동안 한국 광고에 나타난 순수미술(Fine Art)을 응용한 광고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광고 콘텐츠의 현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상품 빛내는 ‘액자의 마술’

    같은 시각예술에 속하는 미술과 광고는 어쩌면 태생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광고가 미술을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팝아트 이후의 실험적 미술에서 보듯이 미술이 광고를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미술이 광고를 응용하는 예는 다양하다. 그중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액자를 활용하는 경우다. 액자에 들어가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자. 그림의 가치가 상당히 달라져 보이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액자에 넣는 행위는 한 대상의 가치를 인정하고 동시에 각별한 위치를 지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브르 박물관장의 유머러스한 제스처는 액자의 논리를 잘 읽어낸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포즈다. 제품을 마치 액자 속의 그림처럼 이젤 위에 올려놓은 한 전자업체의 PDP TV 광고 역시 얇아진 두께를 강조하는 기능적 효과 이외에 화질이 유화 수준이라는 함의와 물건 가격이 비싸다는 암묵적 표현을 담고 있다. 아울러 아직은 아무나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이중, 삼중의 메시지를 깔고 있다. 디지털 기기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마치 그림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들어 있을 것이다.

    “명작의 미학”이라는 진부한 말보다 액자 속의 그림처럼 이젤에 놓여 있는 PDP TV의 이미지는 훨씬 더 웅변적이다. 한 인쇄업체의 광고나 안경테 제작업체의 광고 역시 가치와 품격을 더하는 액자의 가치를 잘 활용한 광고에 속한다.

    광고의 일차적인 생명은 소비자의 눈을 끄는 데 있다. 무엇보다 먼저 소비자들이 광고를 보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중저가 의류회사가 갓난아이의 탯줄까지 광고에 등장시키며 죽기살기로 광고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비자의 눈을 끌기 위해서라면 법적 소송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배짱 뒤에는 소비자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어야 한다는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이 숨어 있다. 평범한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코믹하든 그로테스크하든 시선을 잡아야 한다.

    명작 패러디로 인지도 선점

    적지 않은 광고회사들이 널리 알려진 유명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을 광고에 응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은 식상할 정도로 진부한 것이 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밀레의 ‘만종’ 혹은 ‘밀로의 비너스’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은 가장 많이 광고에 등장한 작품들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 작품들이 호소력을 잃지 않고 있다. 농협은 여전히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활용하고 있으며, 비너스는 여전히 팬티와 브래지어를 팔고 있으며, 모나리자는 화장지에 그 미소를 드리우고 있다.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인 ‘까마귀 나는 밀밭’도 등장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밀레의 ‘만종’을 이용한 토지공사의 광고는 가장 아이디어가 결여된 광고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림을 가장 잘 선택한 경우일지도 모른다. 땅 투기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도 이발소 그림으로 전락한 모나리자와 만종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전 중의 고전도 사용하기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볼 수 있다. 가령 1863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이용한 한 여행사의 광고는 코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여자와 남자의 위치를 바꾸면서 누드의 주인공도 바꾸어 놓은 이 광고는 원화 속 인물과 가위바위보를 하는 스토리를 중심 축으로 삼고 있는데 어쩐지 착상이 어색해 보인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는 스토리가 원화의 무게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운데 여성 의 인위적이고 어색한 표정은 눈에 거슬린다. 게다가 가을여행 상품을 광고하며 옷 벗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이미지 논리를 거스른 것이기도 하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3m가 넘는 거대한 조각 작품인 ‘다비드상’을 이용한 한 생명 보험회사의 광고는 비슷한 무게의 고전 작품을 이용하면서도 한발 앞선 감각을 보여주는 광고로 볼 수 있다.

    올림픽 시상대가 연상되는 광고 밑부분은 잘 다듬어진 조각의 몸매와 어울려 육상 선수의 건강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누드 하면 즉각적으로 여자 누드를 떠올리는 상식을 뒤집어 남자의 전신 누드를 활용한 것도 돋보인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특히 중년의 가정 주부들이 피곤에 지친 남편을 생각하며 광고를 보는 상황을 예상한 것이리라. 많은 경우 남성 보험은 ‘아줌마들’이 들게 마련이다. 신체 부위별로 마치 해부학 도면을 보여주듯 보험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남근 노출의 거부감을 상쇄한 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광고를 만든 사람의 뇌리 어딘가에 이 조각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잔영의 형태로 남아있는 이미지가 광고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광고를 하는 이들에게 전람회나 작품 도록을 많이 보도록 권하고 싶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미지들을 뇌라는 창고에 쌓아두면 언젠가 꼭 필요할 때 그 힘을 빌릴 수 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외국계 은행의 카드 광고도 비슷한 유형이다. 1830년 7월, 왕정복고를 뒤집은 ‘영광의 3일’을 묘사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분명 ‘시대를 여는 새로운 힘’을 상징한다. 프랑스 삼색 깃발 대신 카드를 펄럭이게 한 아이디어는 별로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눈에 익은 그림을 이용했다는 측면에서 일단 성공한 광고로 볼 수 있다.

    위의 몇 가지 사례는 명작을 약간 패러디해 거의 직접적으로 광고에 원용한 예에 속한다. 마네의 작품 ‘풀밭 위의 식사’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모르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광고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광고에 활용된 두 고전 작품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따라서 이 두 광고는 어느 정도의 교양을 지닌 계층을 겨냥한 광고이고 상품 역시 고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손쉬운 패러디에 그쳐 착상이 뛰어날 뿐 상상력에는 별로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

    원반을 든 여인상

    반면 한 건설업체의 아파트 광고와 통신 회사의 광고는 직접적으로 연상되거나 널리 알려져 있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이미지들을 이용하는 대신 어디선가 한번은 본 듯한 이미지를 광고에 이용한 경우에 속한다.

    밝은 빛을 발산하는 원반은 서양의 18세기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엠블렘이다. 프랑스 혁명이나 그 후에도 진리나 이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양과 빛을 의미하는 원반은 널리 사용되었다.

    어느 경우든 원반은 누드 여인이 받치고 있는 형태를 취한다. 여인의 누드는 이상화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클림트의 그림이 일러주듯,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여인은 한층 사실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르페브르와 클림트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아파트 건설업체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벨기에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 ‘피레네 산맥의 성’을 활용한 곳도 있다.

    한 통신업체가 갑옷 입은 처녀를 활용한 광고 역시 ‘진리의 빛’을 이용한 건설업체 광고와 마찬가지로 전략적으로 회화의 이미지를 패러디한 경우에 속한다.

    위의 두 광고는 ‘모나리자’나 ‘만종’을 이용한 나이브한 광고와는 달리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미지를 활용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실제로 ‘진리의 빛’이라는 이미지가 지닌 도상학적 의미나 계몽주의와의 관계 등은 일반인들로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이다. 반면 한 통신업체의 광고에 등장하는 갑옷 입은 처녀의 이미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중세 프랑스사의 백미를 장식한 전설적인 인물 잔 다르크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나리자나 만종의 경우와는 달리 원그림이나 그 그림의 대상이 된 역사적 사건 등이 어렴풋하게 암시될 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두 이미지, 즉 ‘진리의 빛’과 ‘잔 다르크’는 서양의 역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나 상당히 깊은 지식을 요구하는 이미지들이 아니라 역사 수업 등을 통해 언젠가 들었음직한 막연한 연상만 요구하는 것이다.

    광고를 논할 때, 특히 이미지가 등장하는 광고에서 때 중요한 것은 위의 두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광고가 상품을 알리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막연한 대로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만이 맥락을 알 수 있는 광고는 결코 음료수나 라면 같은 제품을 파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동시에 광고는 예술사 강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조잡하지 않아야 하지만 심오해서도 안 되는 것이 광고인 것이다.

    ‘진리의 빛’을 활용한 한 건설업체의 아파트는 추측하건대 소형 평수의 아파트가 아니라 적어도 50평 이상의 대형이거나 아니면 서구식 고층 빌라일 가능성이 크다. 통신업체의 광고 역시 판타지 소설이나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젊은 층을 겨냥한 광고로 특정층을 대상으로 한다.

    특정 계층을 겨냥하는 광고일수록 미술작품을 교묘하게 활용한다. 한 신문사가 이용한 앙리 루소의 작품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나이브 아트의 대가인 앙리 루소의 작품 ‘꿈’은 정보기술로 무장한 개인주의자들인 신귀족의 삶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이미지다. 소비와 여행은 신귀족의 꿈이자 생활 패턴이 된 지 오래다. 이른바 자유직업을 가진 이들은 왕성한 소비력을 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문화적 교양 역시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모나리자’나 밀레의 ‘만종’ 같은 ‘낡은’ 그림들이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게는 어쭙잖은 패러디도 큰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이들은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미술의 추상화 물결이 태동하던 당시의 아방가르드한 분위기에 찬동하는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다.

    한 가전업체의 에어컨 광고가 이러한 예에 속한다. 하지만 이 광고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광고치고는 너무 난해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아비뇽이 프랑스 도시인 줄 아는 많은 지식인이 있듯이, 피카소의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는 혁명적인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림의 내용이나 해석 역시 쉽지 않다.

    입체 냉각 방식과 입체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고가의 전자 제품인 벽걸이형 에어컨과 비싼 전기료를 부담할 수 있는 특정 계층을 겨냥한 이 광고는 부와 교양이 일치한다는 등식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그림이라고 생각했는지 업체는 ‘그림 같은 에어컨’이라고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이 또 ‘입체 바람이 벽에 걸린다’는 설명까지 달았다.

    한 호텔의 광고는 특정 계층을 겨냥한 광고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이 광고에 나오는 이미지는 1804년 12월2일 어느 추운 겨울날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장면이다. 이 그림은 네오클래시시즘, 즉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프랑스의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대형 역사화로 세계 미술사에서 역사화의 가장 탁월한 모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한 호텔이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을 기록한 그림을 광고에 활용했다. 대관식이 실제로 거행된 장소가 호텔이 아니라 성당이었다는 사실은 광고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네오클래시시즘, 자크 루이 다비드, 사진을 대신한 사료로서의 그림의 의미 등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것이다. 호텔 광고는 오직 웅장함과 품격을 강조하기 위해 이 그림을 미학과 역사의 문맥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잘라내 썼다.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로 그림을 자주 못 본 이들은 호텔 내부를 원화에 붙여 합성한 광고를 원그림에 묘사된 성당 내부로 착각할 정도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관식 장면을 이용한 호텔 광고는 자본주의 사회의 왕족인 부자들을 겨냥한 광고가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명작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 변형한 정도의 광고들이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미술과 광고를 한결 유연하게 접목한 광고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 벤처 기업의 이미지 광고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른바 멀티비전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미 일상 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지만 과연 그것이 백남준이라는 거인의 기이한 퍼포먼스가 없었다면, 그리고 외국에서 먼저 그를 대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도 먹혔을까. 텔레비전을 마치 궤짝처럼 쌓아올린 이 광고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연상하지 않으면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한 프랑스 주간지에 등장한 두 광고는 사진 작가이기도 한 만 레이의 그림과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을 활용하고 있다. 루즈를 지우는 세정액을 광고하는 첫 번째 광고는 누가 봐도 만 레이의 그림을 이용했다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두 번째 광고는 발 냄새를 없애는 약품 광고다.

    광고의 숨은 논리를 찾아서

    이 두 광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파편화된 인간의 욕망을 신체의 부분 이미지를 통해 묘사한 두 원작을 이용했다. 하지만 원작의 의미와 광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광고는 단지 상품의 용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만 차용했을 뿐이다. 미술 작품을 이용한 프랑스 광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 광고는 대부분 비너스, 만종, 모나리자 같은 ‘낡은’ 그림들을 이용하는 한국의 광고와는 달리, 많은 경우 초현실주의 이후의 컨템퍼러리 작품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는 현대 서구사회의 미의식과 감각이 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현대 예술에 의해 격심한 변혁을 겪었음을 일러준다.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인 광고는 이러한 변화를 반증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광고는 마음놓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이미지들이다. 단순 소비자로 전락한 현대인의 불안은 양가성(兩價性)을 띤 광고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 갈등이나 불안을 우리는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광고 이미지들은 혼란이나 불안의 얼굴이 아니라 언제나 아름답고 다정한 모습을 한 채 소리 없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광고 이미지들은 특정 계층을 겨냥하거나 혹은 구매력과 인간을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논리를 가장 공개적으로 찬양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부의 논리를 마음놓고 비판할 수 없는 것은 광고 이미지들이 자유주의라는 미덕을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기회 균등과 경쟁의 원리를 근간으로 한다. 이는 개인주의의 미덕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광고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 그리고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미래와 존재는 소유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소유는 타인의 부러움을 촉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래서 광고는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현대인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를 위해 광고는 유명한 회화와 조각 등에서 이미지들을 차용해 온다. 약간의 변형을 거친 것이든 아니면 완전한 패러디이든, 고전 명작을 이용하는 광고의 목적은 단순히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의미 있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숨은 논리들이다.

    우선 예술 작품을 이용했을 경우 이런 광고는 이용된 작품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예술에 문외한인 많은 이들을 광고 타깃에서 제외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계층을 나눈다. 하지만 요구되는 지식이란 심오한 것이 아니라 극히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서구의 계몽주의도, 나폴레옹도 알 필요가 없다. 어디서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면 충분한 것이다. 이는 문화와 구매력을 동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될 수 있는 현상인데 그 밑에는 예술에 대한 피상적인 관념, 즉 가장 지독한 형태의 모욕이 깔려 있다.

    최근 4~5년 한국 인쇄 매체에 등장한 광고들을 순수예술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동일한 시각예술에 속하면서도 광고는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간주된 적이 거의 없다. 이는 이미지의 위력을 과소 평가한 까닭이며 읽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접어든 새로운 문화 양식을 폄하한 결과일 것이다. 본격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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