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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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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이 아무리 따사롭다 해도 겨울로 가는 길목을 막을 수는 없다. 신라의 국운도 이런 자연의 섭리를 어길 수 없었다. 경문왕(재위 861∼874년)과 헌강왕(재위 875∼886년) 부자와 같은 현군(賢君)을 만나 잠시 찬란한 단풍빛을 자랑하였지만 모두 단명하여 도합 25년의 재위 기간을 채우고 후사(後嗣) 없이 돌아가자 신라 왕국은 갑자기 기울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진성여왕(재위 887∼896년)의 무능과 난정(亂政; 어지러운 정치)은 이를 가속화하였으니 즉위 3년 만에 벌써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한다. 철없는 미소년들에게 국정을 내맡겨서 기강이 무너진 탓이었다.

이에 진성여왕 3년(889)에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신호로 하여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세력은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과 완산주(完山州, 전주)에서 일어난 견훤(甄萱, 867∼936년)이었다.

특히 견훤은 서남해안 방위를 맡은 신라군의 비장(裨將) 신분으로 진성여왕 6년(892)에 완산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주변 군현을 모두 차지하고 5000군사로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빼앗은 다음 자립(自立)하여 스스로 ‘신라남 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 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南 都統指揮兵馬制置 持節 都督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御史中丞 上柱國 漢南開國公 食邑二千戶)’라는 긴 이름의 관직을 표방한다. 갑자기 왕을 일컫기가 거북하여 구차스럽게 내건 직함이었다.

그러자 양길의 휘하에 있던 궁예(弓裔)도 진성여왕 8년(894) 10월에 아슬라(阿瑟羅, 강릉)를 점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라 북부의 북한강 수계와 임진강·예성강 일대의 한산주(漢山州) 관내를 장악하고 나서 진성여왕 9년(895) 8월에는 관부(官府)를 베풀어 나라의 체제를 갖춘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년)이 19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궁예에게 몸을 맡기는데, 궁예는 19세 소년인 왕건에게 철원(鐵圓)의 태수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세상이 이렇게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할 즈음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10년경)(도판 1)이 당나라에서 돌아온다. 그는 12세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18세에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당당히 급제하여 당나라 천지에 문명(文名)을 드날리고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도통순관 사자금어대(承務郞 侍御史 內供奉 都統巡官 賜紫金魚袋)의 벼슬을 받은 다음 회남에서 신라에 보내는 공문을 받들고 오는 국신사(國信使) 자격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에서 연마한 그의 능력을 고국에서 마음껏 펼쳐 보이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때마침 헌강왕은 성품이 총명 민첩하고 책 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모두 입으로 외울 정도였다 한다. 당연히 그 자신이 문필에 능하였고 문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래서 최치원이 귀국하자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즉각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원감(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院監)의 벼슬을 준다. 왕의 좌우에서 시종하며 문한(文翰)을 전담하고 문무(文武)의 권한을 총괄하도록 위임한 것이다.

이에 최치원은 의 찬술을 명령받고 이를 짓는 데 골몰한다.

그러나 헌강왕이 최치원을 만난 지 1년 만인 재위 12년(886) 7월5일에 갑자기 돌아가니 그 사이에 어느 비문 하나 완성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최후의 유명(遺命)이 된 을 우선 지어내서 정강왕 2년(887) 7월에 비석을 세우게 한다. 이것이 현재 쌍계사 안마당에 서 있는 국보 제47호 (제27회 도판 10)라는 것은 지난 호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남은 비문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開山祖; 산문을 처음 연 조사)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이 진성여왕 2년(888) 11월22일에 89세로 돌아간다. 경문왕과 헌강왕의 왕사(王師)였으므로 당연히 국가로부터 시호 추증과 탑비 건립의 예우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진성여왕은 낭혜화상이 돌아간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낭혜화상 제자들의 청에 따라 낭혜화상이라는 시호와 백월보광지탑이라는 탑호를 내리고 최치원에게 낭혜화상의 탑비문 찬술을 명령한다. 이에 최치원은 이 비문도 지어내게 되니 (도판 2)가 그것이다.

이 비문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비문 내용에 이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제 이 비문을 비석에 새겨 세웠는지조차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비문 짓는 일을 명령받은 해에 최치원은 태산군(太山郡, 전북 태인) 태수로 나간다. 진성여왕의 난정을 견디다 못해 외직을 자원해 나간 듯한데, 이때 그의 사촌아우인 최승우(崔承祐)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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