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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적지 순례기

국가 大事때 땀 흘리는 表忠碑의 비밀

  • 유종현 <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

국가 大事때 땀 흘리는 表忠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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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속에서 수도하던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의병(僧義兵)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 수락산 대첩 승리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아울러 전후 강화교섭에서는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 포로 3000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공을 세웠다. 400년 전 사명대사의 발자취를 좇아간 유적지 순례단의 보고를 통해 참된 호국정신을 되새겨 본다.
사단법인 사명당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사명대사 유적지 순례단이 2001년 8월11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경남 밀양의 생가지와 영남일대 관련 사찰을 둘러보았다. 순례단 일행은 22명으로 구성됐다. 사명당 기념사업회의 박권희(朴權熙) 회장과 여러 임원들, 그리고 전 외무부장관과 문화공보부장관을 역임한 이원경(李源京) 고문, 전 서울대학교 총장 고병익(高柄翊) 고문, 외무부차관과 주영·주일 대사를 역임한 오재희(吳在熙) 대사 등 저명한 인사들과 관련학자, 연구위원들이 함께 순례길에 올랐다.

사명대사의 혁혁한 전과

1592년(조선 선조 25년) 왜적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앞세워 16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왜군은 현해탄을 건너 남해안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북진했다. 불과 20여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쉬지 않고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격했고 선조는 서울을 떠나 의주로 몽진(蒙塵)했으며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장 가토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이와 같은 국란 속에서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육상에서는 권율 장군 등이 이끈 관군과 명나라 원군, 그리고 승의병(僧義兵)의 선봉대장인 사명대사가 결사항쟁해 끝내는 왜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승의병을 주도한 사명대사(이름 惟政, 자 離幻, 호 松雲 또는 四溟)는 임진왜란 당시 산속에서 수도하는 승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부의 강인한 체격과 뛰어난 용모, 그리고 학문과 지식에 바탕을 둔 탁월한 변론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왜적의 침략으로 국난을 당하자 사명대사는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중이라는 미천한 신분 탓에 사회적 대우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많은 제자와 동료 승려들을 규합,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승의병을 모집해 침략군과 대결했다. 사명대사가 지휘한 승의군의 첫째 개가는 평양성 탈환이다. 왜군에게 점령당한 평양성 외곽에서 명나라 지원군과 조선 관군, 그리고 승의군이 연합해 격전 끝에 빼앗긴 성을 다시 찾는 데 성공했다. 둘째는 수락산 대첩에서의 승리다. 이어 도주하는 왜군을 뒤쫓아 호남과 영남 일대에서도 권율 장군의 관군과 합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런 와중에서도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수차례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왜장 가토와 직접 담판으로 강화교섭에 임했다. 그는 원군을 보낸 명나라와 왜적이 조선영토를 완전 분할 점거하려는 책략을 미리 알고 능숙한 기지를 발휘해 이를 저지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인질로 잡혀간 두 왕자의 신병 반환에도 성공했다. 적진 깊숙이에서 벌어진 협상 기간에는 적의 형세를 잘 관찰해 탐정하는 역할도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조선왕조는 두번 다시 왜적이 침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본과 화평을 강구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1604년 사명대사는 어명을 받고 문하의 몇몇 승려와 당시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과 교토(京都)에 강화사절로 파견됐다.

그의 임무는 첫째, 일본 내부의 정세를 탐정하는 한편, 둘째, 대등한 관계의 화평교섭, 셋째, “선사(先師)의 뜻을 받들어 생령(生靈)을 구제한다”는 조정의 명분대로 왜적에게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백성의 송환을 교섭하는 일이었다.

그때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지배하고 있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명분없는 조선침략과 달리 선린우호를 추구하려 했다. 때문에 도쿠가와는 쓰시마섬에 체류중인 사명대사를 그의 본거지인 교토로 초청했다. 도쿠가와는 네 차례에 걸쳐 사명대사와 회견한 후 양국간의 화평을 제의했다. 이 제의에 따라 사명대사는, 일본이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도쿠가와의 서약을 받아내고, 임란시 중종의 묘 정릉과 성종비의 묘 선릉에서 도굴한 범릉지적(犯陵之賊)의 반환,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의 송환교섭(제1차 송환은 1391명)에 성공했다.

사명대사가 이룩한 이같은 대일 강화 외교는 이후 1607년 여우길(呂佑吉)을 정사로 하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 兼 刷還使, 朝鮮通信使)를 시작으로 1811년까지 약 200년간 무려 12차례 선린우호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땀 흘리는’ 비석

순례단을 실은 전세버스는 아침 7시 서울을 떠났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추풍령을 넘어 남으로 내려가다가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따라 달렸다. 일행은 다시 온천으로 유명한 부곡을 지나 사명대사의 생가지인 밀양시 무안면(武安面)으로 접어들었다.

찌푸린 하늘은 가끔씩 빗방울을 뿌렸지만 오후 2시경 ‘땀나는 비석’으로 알려진 표충비각에 도착했다. 이 비각을 관장하는 홍제사(弘濟寺) 주지 법마(法摩) 스님은 일행을 맞아 비석의 유래를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이 비석은 1742년(영조 18년) 송운대사의 5세 법손 남붕(南鵬) 스님이 경북 경산에서 캐낸 돌로 세운 것으로 높이 2.76m, 폭 97㎝, 두께 70㎝의 흑랍석(黑臘石)으로 돼 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용머리와 받침대는 화강암인데 이를 감안하면 전체 높이는 3.9m가 되는 셈이다.

이 비(碑)에는 사명대사의 영당비문과 표충사(表忠寺) 사적비문이 새겨져 있다. 특이한 것은 큰 경사나 난리가 있을 때마다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석에서 땀이 흐른 기록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894년 갑오군란, 1910년 경술합방, 1919년 기미 3·1운동,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1945년 광복,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식, 1949년 여순반란사건,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 학생의거, 1961년 5·16쿠데타, 1979년 10·26 박대통령 사망, 1983년 8·25 KAL기 추락, 1983년 11·15 미얀마 랑군테러사건, 1996년 1·14 일본과 독도 영유권 대립, 1996년 6·28 북한 수해로 아사 탈출자 급증, 1996년 11·5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침입 등. 법마 스님은 앞으로도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땀이 흐를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또 하나 진기한 것은 비석의 땀이 사람 몸에서 나는 땀과 같이 짠맛이라는 점이다. 관련 과학자들이 모여 이 비석의 땀을 분석한 결과 특정한 계절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 현상이라고 한다.

이 비석은 경상남도가 지정한 유형문화재 제15호다. 표충비각 주변은 현재 밀양시가 주관해 정부 보조금과 지자체 예산을 들여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방문객 주차장을 비롯해 주변 일반주택의 이전 등 정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약 4000평 규모의 부지에 향토 문화체험장, 전통놀이마당 등이 들어서게 되며 총공사비는 약 13억원, 완공예정일은 2002년 7월이라고 한다.

순례단은 표충비각을 떠나 무안면 중산리(中山里)쪽으로 약 4∼5㎞ 지점에 있는 사명대사의 생가지 고나리(古羅里)에 이르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약 50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부선의 밀양역에서 16㎞쯤 떨어진 산간벽지며 옛 이름은 괴나루(槐津)라고 한다.

고나리 마을은 일명 삼강동(三綱洞)이라고도 한다. 이 이유는 충·효·열(忠孝烈)사가 한 시기에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사명대사를 비롯해 병조판서를 지낸 손인갑(孫仁甲)과 충효사(忠孝士)로 꼽힌 아들 손약해(孫若海), 그리고 동승지를 지낸 노개방(盧蓋邦)과 열녀인 부인 이씨(李氏)가 이 마을에서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삼강동은 중산리의 양쪽 산 안을 가리키며 사명대사가 때로 고향에 돌아올 때 고나리를 바라보며 앉아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바위 옆 절벽에는 ‘삼강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부터 50∼60년 전인 일제 말기에 누군가가 지웠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마을 뒷산은 삼국명장(三國名將)이 태어난 명산이라고 했다.

사명대사는 이곳 고나리 399번지에서 1544년(중종 39년) 10월17일에 아버지 임수성(任守成)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윗대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집안으로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해 장악원정(掌樂院正), 할아버지 종원(宗元)은 괴과(魁科)에 급제해 강계부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수성(守成)은 교생(敎生)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서씨(徐氏)가 어느날 저녁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누런 수건을 쓴 황금빛 사람이 흰구름을 타고 높은 누(樓)에 올라 늙은 신선에게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그 신선은 빙그레 웃으며 “나는 고해(苦海)의 위에 있는 백세 노인이다. 어찌해 네가 와서 절을 하는가”고 말했다. 이 말이 서씨의 귀에 들리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이때부터 서씨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것 같았으며 놀라서 무서운 것 같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후 서씨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고 감히 재채기나 트림, 하품도 삼가며 기지개조차 켜지 않았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사명대사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석장비문(石藏碑文)에도 기록돼 있다.

일행은 우선 밀양시 문화관광 담당관의 공사 계획 브리핑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사명대사의 생가지 주변 일대는 약 1만3000평이 개발돼 기념관, 임진왜란 체험공간, 중앙광장, 부도탑(浮屠塔) 등을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이 공사에는 방문객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지방도로로부터 약 500m의 2차선 포장도로를 연결하는 공사도 포함돼 있다. 2002년말 완공 예정인 이곳 관광벨트 조성공사는 정부 보조비를 포함해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등 총 40억원 가량이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생가지 주변과 표충비각을 연결하는 관광벨트가 완성되면 국내외 관광객을 효율적으로 유치해 현지 주민들의 생활과 복지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하진현 무안면장은 기염을 토했다.

현장을 돌아보니 중앙광장에는 이미 기념비석과 부도탑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언덕받이에는 사명대사가 출생한 집터가 있었다. 접근해 보니 그 집터가 바로 밀양시 무안면 고나리 399번지다.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속설에 따르면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세우려고 했으나 모두 넘어져서 새로 지은 집은 없으며 다만 그곳에는 원장(元帳)의 자취와 주춧돌이 남아 있고 묵은 기와조각이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에서 뒹굴고 있었다. 이 집터의 한가운데는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에 한자로 ‘사명대사 생가유허비(生家遺墟碑)’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붉은 글씨로 불(佛)자를 크게 써붙여 놓았다. 이곳 사명대사 생가지는 경상남도가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했다.

생가지를 벗어나 일행을 태운 버스는 무안면 중산리에 있는 꽤 높은 영취산(靈鷲山) 기슭을 감돌아 숨가쁘게 잉잉거리며 올라갔다.

임진왜란의 괴수인 도요토미가 사망(1598년)하고 2∼3년 후 사명대사가 57세 때 고향에 내려와 마을 뒷산의 암자에 머물렀는데 그곳이 곧 백하난야다. 이 암자는 당초 신라의 고승 도선이 터를 잡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사명대사가 그런 한가한 곳에 오래 머물게 두지 않았다. 1604년 61세 때는 묘향산에서 서산대사가 열반했고 그해 이어 조정의 영을 받아 일본에 강화정사로 파견됐기 때문에 백하난야에는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 사명대사가 백하난야를 떠날 때 앞마당에 은행나무와 모과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는데 은행나무는 자취를 감추었고, 모과나무는 아직도 고목처럼 굵어져서 열매를 맺고 있다. 사명대사가 1610년 입적하자 다음해인 1611년(광해 3년)에 유생들과 제자 승려들이 그의 충성과 불법으로 남긴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절이 아닌, 사명대사를 신주(神主)로 모시는 사당을 창건해 표충사(表忠祠)라고 이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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