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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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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석남사 부도

경명왕 8년(924) 4월1일에 건립된 것이 확실한 (제28회 도판 6)가 후삼국기에 있어서 건립연대가 가장 확실한 탑비의 기준작이라면, 이와 함께 건립된 (도판 1) 역시 건립연대가 가장 확실한 부도의 기준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은 1919년 3월 일제에 의해 경복궁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안되어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경복궁 뜰 안에 세워져 있다. 경복궁에 현존한 이 사리탑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8각당(八角堂) 집을 형용하고 있는 것은 초기 부도양식과 동일하다. 844년에 건립되는 원주 (제25회 도판 5)에서 비롯되어 868년에 건립되는 곡성 (제25회 도판 7)과 872년경에 건립되는 화순 (제25회 도판 9)을 거쳐 884년에 건립되는 장흥 (제26회 도판 8)과 890년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울주 (제26회 도판 10)로 이어지는 8각당형 부도인 것이다.

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석남사 부도

그런데 은 양식적으로 (도판 2)를 바로 뒤잇는 것이어서 이 둘을 비교해보기 위해 다시 한번 그 사진을 게재한다.

우선 기단부부터 비교해보면 는 8각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사자좌와 수미좌를 상징하였다. 아랫단은 사자상을 8면 중 4면에 격간격으로 돋을새김하였고, 윗단은 다른 돌로 똬리처럼 둥글게 만들어 받쳤는데 표면을 국화잎새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놓은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2단 별개석으로 이루어진 이 하대를 한 돌로 합쳐서 1단으로 간소화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사자상과 공면(空面, 빈칸)이 교차되던 아랫단 8면에 모두 안상(眼象)을 새겨넣었다. 안상의 형태는 머리 부분에서 7번의 꺾임이 있고, 밑부분에서 3번의 꺾임이 있는 모란꽃잎 모양이다. 그 8면 위로 수미좌를 상징하는 구름무늬 물매가 이어지는데, 8모의 모서리에만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한 가닥씩 솟구쳐내어 이를 상징하고 남은 부분은 밋밋한 면으로 단순화시키는 고도의 생략기법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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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하대석(부분)

이것만으로도 파격적인 의장(意匠)이라 할 터인데, 그 위로 낮은 받침단 한 층을 올려 세워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가득 장식해 놓았다. 북통 모양의 중대석을 받치기에 꼭 알맞은 크기다. 따라서 8모의 모서리에 솟아난 국화잎새 구름무늬는 이 국화잎새 구름무늬띠로부터 솟구쳐나온 것이 분명해진다. 극단의 생략기법으로 복잡한 내용의 수미좌 형식을 단순화시킨 세련된 의장이라 하겠다(도판 3).

북통 모양의 중대석은 거의 비슷한 양식을 보이지만 의 중대석이 더 배흘림이 강하여 긴장된 느낌을 준다. 따라서 8면을 나누는 실패 모양의 안상기둥도 팽팽하게 힘을 받아 터질 듯 불거져 나와 있다.

이에 비해 의 중대석은 둥근 기둥에 가까울 만큼 배흘림이 사라지고 또 짧아져서 압축된 긴장감을 거의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8모의 안상기둥도 밋밋한 실패 모양이 되어 맥빠진 느낌이다. 두 가닥 선으로 연결된 안상 중앙의 꽃무늬는 마름모꼴의 십(十)자화 꽃판까지 서로 같지만 중대석의 긴장과 이완의 차이에서 오는 기백은 사뭇 다르다(도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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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중대석(부분)

상대석이 위로 피어난 연꽃 모양의 연화대좌인 것도 서로 같다. 그러나 에서는 상대석 자체가 넓어서 힘차게 펼쳐진 꽃잎에 기운이 넘치는데 에서는 상대석이 좁고 두터워 꽃잎이 좁게 오므라들 수밖에 없으니 위축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기에다 꽃잎 끝을 밖에서 깊이 파 뒤집어놓고 그 표면에 복잡한 보상화(寶相華) 장식을 더하니 꽃잎은 늙어 시들어가는 모습이다. 무의미한 장식성이 노쇠화로 치닫는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놓았다.

8모 탑신석은 가늘고 길어져서 8각당집이라는 의미를 망각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앞뒤로 나 있는 앞문과 뒷문의 문짝 표현도 생략되고 그 좌우로 돋을새김했던 사천왕(四天王)의 표현도 사라졌다. 부도 건축이 가지는 상징 표현조차 외면하려는 말기적 무관심이 빚어놓은 무차별적 생략일 터인데 결과적으로는 상징 표현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 석조예술로 지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옥개석은 기와골과 연목 표현을 안팎에서 모두 생략하였다. 그리고 8모 지붕의 8개 지붕마루만 높게 표현하고 그 끝 망와(望瓦; 지붕마루 끝에 세우는 암키와)가 있어야 할 곳에는 두 개의 고사리 머리 위에 보상화를 얹어놓은 듯한 귀꽃을 장식하여 끝막음해 놓았다(도판 5). 이런 귀꽃 장식은 후백제 지역의 석등(石燈)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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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옥개석(부분)

상륜부(上輪部)의 앙화(仰花)와 복발(覆鉢), 찰주(刹柱), 보개(寶蓋), 수연(水烟) 등은 서로 비슷했던 모양이나 에서는 찰주와 보개가 망실된 듯 앙화 위에 수연이 바로 올라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울주 와 창원 은 계승관계를 한눈에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서로 양식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석남사 부도는 낭공대사 부도인가

그런데 필자는 제26회에서 를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3대 조사로 사실상 가지산문을 처음 일으켜 세운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의 부도인 장흥 양식과 비교하면서 이 세워진 뒤에 이를 본딴 가지산문 계열의 부도일 듯하다고 보았고, 가지산문의 초조인 도의(道義)선사 부도로 세워진 것일 수 있다고 추론했었다. 이는 석남사에 전승돼 오는 도의선사 부도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합리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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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출토 석등 옥개석

그러면서도 봉화 내용에서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년)이 경주 부근 석남사에서 돌아가고 그곳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를 재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다가 미술부 소재구(蘇在龜) 학예관이 이 문제를 이미 울산에서 출간할 향토지에 거론했다는 말을 듣고 가 일 것이라는 그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였다.

비석과 함께 있지 못하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지산이란 산 이름과 연관지어 가지산문 초조인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를 낭공대사 행적의 부도로 추정하는지를 밝히기 위해 경북 봉화군 명호면(明湖面) 태자리(太子里) 태자사터에 남아 있다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온 의 내용 중 그 해당 부분을 옮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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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출토 석등 연화하대석

“신덕(神德)대왕(912∼916년)이 큰 뜻으로 빛나게 다스리고자 은총을 내려 대궐로 부르자 정명(貞明) 원년(915) 봄에 이르러 대사는 갑자기 선승들을 이끌고 제향(帝鄕; 왕도, 서울)으로 올라왔다. 전례에 의해서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안주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절은 곧 이에 앞서 성상(聖上)이 재상으로 있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임금(효공왕)께 드렸다가 이어서 대사(낭공대사)에게 부탁하여 영원히 선종사찰로 삼은 곳이다.

이때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 밖에 나와 머무는 곳)로 맞아들여 거듭 자비로운 얼굴을 뵙고 이에 기다리던 마음을 열어 다시 무위(無爲;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스러짐)의 설법을 들었다. 사양하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특별히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에 여자 제자가 있었으니 명요(明瑤)부인이다. 신라 종실이고 나라의 으뜸 귀족이었는데 대사를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불교를 존숭하여 석남산사(石南山寺)를 받아서 영원히 머물러 지켜주기를 청하였다.

가을 7월에 대사는 심히 마음에 흡족하여 비로소 이 절에 머물러 살기로 하였다. 멀리 4악(四岳, 동악·서악·남악·북악)에 이어져 있고 높게 남쪽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이 다투어 흐르니 마치 금여곡(金輿谷; 쇠수레가 구르듯이 물소리가 요란한 골짜기)과 같았고 바위와 산봉우리가 높음을 다투니 자개봉(紫蓋峯; 붉은 구름이 뒤덮고 있는 봉우리, 衡山 第一峯의 이름이기도 함)인가 의심스러웠다. 참으로 은일(隱逸)이 사는 그윽한 곳이고 또한 승려가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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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출토 석등 8각간주석

대사가 두루 영산을 찾아다녔으나 거처를 정하지 못하더니 비로소 이 산에 이르러서야 임종할 곳으로 생각하였다. 명년(916) 2월초에 이르러 조금 편치 않더니 12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인생이 유한하니 나는 갈란다. 지켜서 잃지 말도록 너희들은 힘써라’ 하고 승상(繩床; 줄을 엮어 만든 침상이나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근엄하게 돌아갔다. 나이 85세, 승납 61세였다. (중략)

17일에 이르러 삼가 색신(色身)을 받들어 서쪽 봉우리 기슭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성고대왕(聖考大王; 돌아가신 아버지 대왕, 신덕왕)이 홀연히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참으로 가슴 아파하며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의식을 감호(監護; 감독하고 보호함)하게 하고 이어서 조문하고 제사드리게 하였다.

정명 3년(911) 11월중에 이르러 동쪽 언덕 위로 개장(改葬)하니 절에서부터 300보쯤 떨어졌다. 전신이 흩어지지 않고 신색(神色)도 평상시와 같았다. 문하인들이 거듭 자애로운 얼굴을 뵙고 감격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석호(石戶; 돌문, 석실의 뜻)를 베풀고 막아버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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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제자 신종(信宗)선사, 주해(周解)선사, 임엄(林儼)선사 등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한마음으로 지키니 모두 상족(上足; 제자를 스승의 발에 비유하여 제자 중 뛰어난 이를 일컫는 말)에 해당하였다.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며 오래도록 간절하게 추모하였으나 늘 큰 바다로 먼지가 날아가거나 높은 바람에 번개가 끊어지듯 할 것을 생각하고 여러 번 대궐에 나아가 큰 비석을 세워주도록 청하였다.

금상(今上; 지금 임금, 경명왕)이 왕위를 이어 교종을 존숭하고 선종을 떠받듦이 전왕조와 다름이 없어 시호 드리기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하였다. 이에 하찮은 신(臣)에게 명하여 마땅히 붓방아질을 닦으라(비문을 지으라) 하니 인연(仁, 최인연)이 굳게 사양하였으나 면치 못하고 명령에 대답하여 이를 좇는다.

변변치 못한 말을 늘어놓아 남긴 공적을 법대로 찬양하였으나 비유하건대 표주박을 이끌어 바다를 되질한다 해도 큰 바다의 깊이를 알 수 없고 대통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아도 푸른 하늘의 광활함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일찍이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고 친척으로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억지로 꾸몄다는 일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로써 법은(法恩)에 보답하노라.”

석남산사, 즉 석남사에 낭공대사 행적의 부도가 세워지고 그 비문을 최인연(崔仁, 878∼944년)이 짓게 되는 내력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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