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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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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법주사 사천왕 석등

그런데 비석이 이곳 석남사에 세워지지 않은 이유는 의 뒷면에 새겨진 에 분명히 밝혀놓았다. 낭공대사의 법손(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지은 글인데 관련 부분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직 대사는 당나라 시대 신라국 경명왕 천우(天祐) 연중(904∼922년)에 법연(法緣)이 끝나서 경명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이어서 최인연 시랑(侍郞)에게 칙명으로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혼잡하고 사람들이 교활하여 성대한 일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로써 해는 새로워지고 달은 묵어가나 비문을 세우지 못하였다.

뒤에 고려국이 이미 4군(四郡)을 평정하여 3한(三韓)을 솥발처럼 바로 세우자 현덕(顯德) 원년(954) 7월15일에 이 큰 비석을 태자산(太子山)에 세운 것은 좋고도 좋은 인연이 있어서였다.

이에 국사의 문하에 신족(神足) 제자로 국주사(國主寺) 승두(僧頭)인 건성원(乾聖院) 화상(和尙)이 있었는데 법휘는 양경(讓景)이고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거국(擧國)이었다. 대사를 위해서는 몸도 되고 마음도 되며 왕을 위해서는 귀도 되고 눈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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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쌍사자 석등

장차 꽃다운 먼지를 바람이 쓸어가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구름이 녹이며 (행장을 기록한) 노란 비단이 해지려 하는데 푸른 비석을 세우지 않을까 두려워 스승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스스로 귀부(龜趺) 딸린 비석을 세웠다. 화상의 조부 애()는 원성왕의 내손(來孫, 5대손)이고 헌강왕의 서장인으로 (중략) 안으로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맡았고 밖으로는 패강도호(浿江都護)를 맡겼었다. 부친인 순례(詢禮)는 (중략) 안으로 집사함향(執事含香)에 이르렀고 밖으로 삭주장사(朔州長史)에 다다랐다.”



경명왕(917∼923년) 초기인 918년경에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세상이 안정되자 광종 5년(954), 즉 현덕 원년 7월15일에 가서야 봉화 태자사에 비로소 낭공대사의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비석 세우는 일을 자담하여 주관한 이는 국주사의 승두이자 건성원 주지인 양경화상이었는데, 그는 낭공화상의 고족제자이고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 이때 이 일에 동참했던 9명의 낭공화상 제자들이 낭공 문중의 중심인물들이었던 듯한데 낭공 재세시에는 어려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뒷날 문중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고 적고 있다. 용담 식조(龍潭 式照)·건성 양경(乾聖 讓景)·연곡 혜희(谷 惠希)·유금 윤정(宥金 允正)·청룡 선관(靑龍 善觀)·영장 현보(靈長 玄甫)·석남 형한(石南 逈閑)·숭산 가언(崇山 可言)·태자 본정(太子 本定) 등 9인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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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사지 석등

여기서 보듯이 석남사 주지 형한과 태자사 주지 본정이 이들 9인의 중심 인물에 들어 있다. 이로써 석남사와 태자사가 모두 낭공문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절인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두 절에 낭공대사의 부도탑과 부도탑비가 따로 세워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 즉 낭공대사 부도가 하필 장흥 의 양식을 계승하게 되었을까.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년)은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수제자로 가지산문 제3대 조사인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현재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도 그 부도 양식이 상호 계승관계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문제는 이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의 주인공인 봉림사 진경(眞鏡)대사 심희(審希, 855∼923년)를 통해서야 해결될 수 있다.

봉림산문의 초조(初祖)이자 혜목산문(慧目山門)의 제2대 조사인 심희는 문덕(文德) 초년(888)부터 건녕(乾寧) 말년(898)까지 만 10년 동안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에 주석하면서 참선과 교화를 행하고 있었다 한다. 최인연이 용덕(龍德) 4년(924)에 지은 에 기록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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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용왕리 석등

송계가 강진 월출산 밑에 있는 지명이니 이곳에서 장흥 보림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그가 송계선원을 찾아가기 4년 전에 보조선사의 사리탑과 탑비가 세워진다. 그러니 새로 세워진 보조선사의 부도와 탑비는 그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진경대사의 뇌리에 새겨진 양식이 장차 낭공대사 사리탑인 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진경대사의 보월능공탑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이 연결고리를 추적하려면 두 비문에 나타난 낭공대사와 진경대사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진경대사는 888년부터 강진 송계선원에 머물렀다 하는데 바로 그 어름인 892년에 견훤이 완산주(完山州), 즉 전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武珍州), 즉 광주를 손안에 넣고 자립한다. 그러니 송계선원 일대가 차츰 전란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진경대사는 898년 송계선원을 떠나 설악산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이곳도 이미 궁예가 차지하여 전란의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어져 있었다.

그래서 명주(溟洲; 강릉)로 일시 피란해 머문다. 그것이 대체로 900년 전후한 시기였던 듯하니 진경대사 나이 46세 전후한 때이다. 이때 69세의 노경에 접어들었던 낭공대사 행적도 사굴산문의 근거지인 이곳 명주에 머물고 있었다. 아마 진경대사는 이때 낭공대사를 찾아뵙고 그와 인연을 맺었을 듯하다.

그러나 궁예가 901년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를 자처하다가 뒤이어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철원(鐵圓)으로 도읍을 옮기기 시작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이들은 함께 강릉을 벗어나 신라 왕도인 서라벌로 자리를 옮긴 듯하다. 이해 7월 효공왕이 73세의 낭공대사를 왕사로 초빙한 것을 계기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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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석등

함께 떠나왔던 진경대사는 경주를 거쳐 곧바로 김해로 찾아갔던 듯하다.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그곳의 실력자인 김율희(金律熙, 蘇律熙와 동일인, 쇠유리의 한자표기에서 뜻을 취하면 김율희가 되고 음을 취하면 소율희가 된다)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그의 보호를 받으며 선지(禪旨)를 전파할 목적으로 찾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진경대사 자신이 김유신의 후손으로 임나 왕족의 후예였으니 이곳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김율희도 그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 김해는 진경대사에게 있어서 전란을 피해 있으면서 선지를 펼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막 50대로 접어든 진경대사는 이곳에서 김율희의 도움으로 창원 봉림산에 봉림산문을 개설하여 혜목산문(慧目山門)의 기치를 일신한다. 이렇게 김해에 와서 터를 잡아 안도하고 나자 진경대사는 강릉에서 인연을 맺어 신세진 낭공대사를 김해로 초빙한 듯하니 낭공대사가 경주를 떠나 김해로 가는 것이 907년 늦여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공대사는 이곳에서 진경대사와 김율희 부자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915년까지 머물다 다시 신덕왕의 초청을 받고 이해 7월16일 경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바로 명요부인의 청으로 석남사로 내려가서 다음해인 916년 2월12일 이곳에서 돌아간다. 85세의 고령이었다.

이때 진경대사는 62세의 노인으로 봉림산문의 주인이 되어 이곳으로 피란해 오는 구산선문의 선사들을 보살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선종계에서 그의 위상은 막강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낭공대사의 사리탑과 탑비 건립에 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었을 듯하다. 사리탑 건립에 진경대사가 직접 관여하게 된 데는 낭공대사와의 친분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경대사가 낭공대사 사리탑이 건립되는 917년 11월보다 1년 뒤인 918년 12월 4일에 신라왕도 경주로 올라가서 국사가 되는 것으로 보아도 이런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낭공대사의 부도인 가 진경대사의 의도에 따라 양식을 계승하면서 단순해지고 다시 진경대사 자신의 부도인 은 양식을 계승하면서 더 단순해지는 과정을 거치는 듯하다. 그 결과 호남의 부도양식이 영남으로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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