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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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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1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2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년)(도판 1)의 선대(先代)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고려사(高麗史)’ 고려 세계(世系)에도 그 첫머리에 “고려의 선대는 역사를 빠뜨려 잘 알 수 없다”고 밝히고 태조실록을 이끌어 즉위 2년(919)에 3대 조고(祖考; 돌아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추존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의종(毅宗, 1146∼1170 재위) 때 김관의(金寬毅)가 저술한 ‘편년통록(編年通錄)’의 내용을 옮겨서 그 대강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성골(聖骨)장군이라 불리는 호경(虎景)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두산에서 내려와 개성 부소산(扶蘇山)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들어 살았다.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활을 잘 쏘아 사냥으로 일을 삼았다. 하루는 동네사람 9명과 더불어 평나산(平那山; 지금의 聖居山)으로 매를 잡으러 나갔다가 해가 저물어 바위굴 속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굴 앞에 와서 크게 소리치는지라 10명이 서로 의논하기를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하는 모양이니 각자 갓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져보아 움켜잡으면 그 임자가 나가 먹히기로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모두 갓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더니 호랑이가 호경의 갓을 움켜잡는다. 이에 호경이 호랑이와 싸우려고 굴 밖으로 나오자 호랑이는 간 곳 없고 바위굴이 무너져 내려 안에 있던 9명은 모두 깔려 죽었다.

호경은 동네로 내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9명을 장사지내는데 먼저 산신(山神)에게 제사지냈더니 과부인 산신이 호경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함께 이 산을 다스리자면서 채가지고 숨어버린다. 그래도 호경은 옛 아내를 잊지 못하여 밤이면 항상 꿈결같이 나타나 자고 가니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탄생하였다.

그 아들이 강충(康忠)이다. 강충은 잘 생기고 재주가 많아 서강(西江; 예성강)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에게 장가들어 오관산(五冠山) 마하갑(摩訶岬)에서 살게 된다. 그때 풍수(風水)를 잘 보던 신라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부소군(扶蘇郡)에 와서 부소산 북쪽에 있는 터를 보고 “만약 군(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한다면 삼한(三韓)을 통합할 사람이 나오겠다”고 했다.

이에 강충은 군 사람들과 함께 그 말대로 하고 군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쳐 군의 상초찬(上抄粲)이 되었다. 그는 이곳 송악군과 마하갑에 집을 가지고 천금(千金)의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이제건(伊帝建)과 보육(寶育)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그중 막내인 보육이 성품이 인자했으므로 출가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수도하다가 마하갑의 집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송악산 상봉인 곡령(鵠嶺; 따오기재)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자 삼한(三韓) 산천이 모두 잠기면서 은색 바다로 변해간다. 다음날 그의 형인 이제건에게 꿈 얘기를 하니 이제건은 “네가 반드시 하늘을 떠받칠 만한 기둥감을 낳을 듯하다”고 하며 그의 딸인 덕주(德周)를 아내로 맞게 한다.

그들은 마하갑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신라 술사(術士)가 지나다 보고 여기서 살면 반드시 대당(大唐)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되리라 하고 간다. 그 뒤에 과연 딸 둘을 낳았는데 막내인 진의(辰義)가 더욱 아름답고 총명하였다.

그들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 어느날 언니가 꿈을 꾸는데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자 천하가 모두 잠긴다. 깨고 나서 이를 진의에게 말하니 진의가 비단치마 한 벌로 그 꿈을 사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비단치마 한 벌을 주면서 그 꿈 얘기를 세 번이나 하게 하여 가슴에 새기고 대당 천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때 마침 당 숙종 황제가 왕자의 몸으로 천하를 돌아다니던 중 바다를 건너 예성강 입구에 배를 대었다가 물이 빠지는 바람에 되돌아 나가지 못하고 뻘흙 위에 돈을 깔면서 상륙한다. 그래서 상륙지점을 돈을 깔고 내린 곳이라 하여 전포(錢浦)라 불렀다 한다. 그때가 천보(天寶) 12재(載, 753년) 계사년 봄이다.

숙종은 송악군에 이르러 곡령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다보고는 이곳이 반드시 장차 도읍이 되리라고 예언한 다음 마하갑 양자동(養子洞)으로 내려와 보육의 집에 들어가 자게 되었다. 여기서 그의 두 딸을 보고 마음에 들어 터진 옷을 꿰매어달라 하니 보육은 이 사람이 중국의 귀인인 것을 알아보고 속으로 신라 술사의 말이 맞으려나보다 생각하며 큰딸에게 가서 그 터진 옷을 꿰매어주라고 한다.

그런데 큰딸이 문지방을 넘다가 넘어져 코피가 터지므로 막내딸 진의가 이를 대신하게 되고, 드디어 숙종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숙종은 한 달 남짓 이곳에 머물다 떠나면서 태기가 있는 진의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짓고 이 신물(信物; 믿을 수 있는 증거물)을 가지고 당나라로 찾아오게 하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과연 아들을 낳아서 작제건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자라면서 용모가 빼어나고 총기와 용맹을 두루 갖추어나간다. 벌써 5,6세 때에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 어머니는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대답하였다. 이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커가면서 육예(六藝)를 두루 갖추는데 특히 글씨와 활솜씨가 뛰어나자 진의는 작제건이 16세 되던 해에 그 부친이 주고 간 활과 화살을 내준다. 작제건은 이 활과 화살로 백발백중의 솜씨를 보여 신궁(神弓)으로 일컬어지고 곧바로 부친을 찾기 위해 상선을 얻어 타고 당나라로 떠난다.

그런데 작제건이 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일어나 3일 동안이나 앞을 가로막는다. 이에 뱃사람들이 점을 쳐보니 점괘에 ‘마땅히 고려인을 버리라’고 나온다. 할 수 없이 작제건이 활과 화살을 가지고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내려섰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바람이 일어나 배가 날아가듯이 떠나간다. 조금 있다가 한 노인이 와서 절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서해 용왕인데 매일 새참 때가 되면 늙은 여우가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으로 둔갑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와 해와 달과 별들을 구름과 안개 속에 벌여놓고 소라를 불며 북을 치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이 바위에 앉아서 ‘옹종경(腫經)’을 읽는다. 그러면 나는 두통이 몹시 심하다. 듣자니 낭군(郞君)이 활을 잘 쏜다 하니 원컨대 내 고통을 제거해 주기 바란다.”

작제건은 허락하고 이를 쏘아 떨어뜨리니 과연 늙은 여우였다.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용궁으로 맞아들여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래서 서쪽 당나라로 들어가서 천자인 아버지를 만나뵐 것인가, 아니면 칠보(七寶)의 부(富)를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실 것인가를 묻는다. 작제건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동쪽 땅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이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동쪽 땅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은 낭군의 자손으로 세번째 건(建)에 이르러서야 반드시 될 것이다. 그밖의 것은 오직 명하는 대로 하겠다” 한다.

작제건은 아직 시운(時運)이 이르지 않은 것을 알고 무엇이라 대답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뒤에 앉았던 노파 하나가 희롱해 말하기를 “어찌 그 딸에게 장가들려 하지 않는가” 한다. 작제건이 이 말을 듣고 깨달아 용왕의 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니 노인이 장녀인 저민의(渚旻義)를 처로 맞게 한다.

작제건이 7보를 가지고 돌아오려 하는데 용녀는 부왕이 가진 보배 중에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7보보다 더 낳은 것이라며 이것을 달라고 해서 갖고 가자고 한다. 작제건은 이것도 장인인 용왕에게서 얻어 가지고 칠선(漆船; 옻칠한 배)을 타고 예성강 입구인 창릉굴(昌陵窟) 앞 강가에 당도한다.

백주(白州) 정조(正朝; 태봉의 벼슬 이름)인 유상희(劉相晞) 등이 이 소식을 듣고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왔다 하니 큰 경사라 하며 개주(開州; 개성), 정주(貞州; 豊德), 염주(鹽州; 延安), 백주(白州; 白川)의 4주와 강화, 교동(喬桐), 하음(河陰) 3현의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지어 이들을 살게 하였다. 이들은 이후 용궁에서 데려온 돼지를 풀어놓아 그가 드러누운 곳에 새 집터를 잡았는데 그곳은 작제건의 외증조부인 강충이 살던 송악산 남쪽 기슭의 옛 집터였다.

그래서 작제건 부부는 영안성과 송악산 남쪽 집을 왕래하며 30여 년을 함께 사는 동안 아들 넷을 둔다. 그 사이 서해 용녀인 작제건의 부인은 송악산 새집 침실 창밖에 파놓은 우물을 통해 서해 용궁과 내왕하고 있었는데, 작제건이 황룡으로 변하여 용궁으로 돌아가는 부인의 모습을 보지 않기로 한 약속을 깨뜨리고 이를 엿본 탓에 용녀는 그 막내딸과 더불어 다시 용으로 변하여 용궁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오지 않았다.

작제건과 용녀 사이에 태어난 네 아들 중 장남이 용건(龍建)이다. 용건은 뒷날 왕륭(王隆, 847년 경∼897년)으로 이름을 고치니 바로 왕건의 부친이다. 용건은 몸집이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기국(器局)과 도량이 넓고 커서 3한(韓)을 아우를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한 미인을 보고 부인을 삼기로 약속했는데 뒤에 송악에서 영안성으로 가는 도중에 한 여자를 만나니 꿈속에서 본 여인과 꼭 빼닮았다. 드디어 혼인하게 되었으나 온 곳을 알 수 없는 까닭에 세상에서는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고 또 삼한(三韓)의 어머니라 하여 한(韓)씨로 성을 삼았다.

용건, 즉 왕륭과 몽부인 한씨가 결혼하여 송악 옛집에 살다가 다시 그 남쪽에 새 집을 지으려 하니 뒷날 연경궁(延慶宮) 봉원전(奉元殿) 터다.

그때 동리산(桐裏山) 조사 도선(道詵, 827∼898년)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일행(一行, 683∼727년)의 지리법(地理法)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에 이르러 왕륭이 새로 집짓는 것을 보고 “검은 기장 심을 땅에 어째서 삼을 심는가” 하고 말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감에 부인이 듣고 왕륭에게 고하자 왕륭이 신발을 거꾸로 신고 좇아가서 보니 예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함께 곡령에 올라가서 산수의 혈맥을 궁구하고 천문과 시수(時數; 시절 운수)를 관찰하여 집터와 규모를 정하였다.

도선은 “가르쳐준 대로만 집을 지으면 명년(877)에 반드시 성자(聖子; 성인이 될 아들, 임금이 될 아들)를 얻을 터이니 이름을 꼭 왕건(王建)이라 지으라”고 알려주고 그 내용을 담은 글의 겉봉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인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에게 삼가 받들어서 백 번 절하며 글을 드리나이다.”

이때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다. 왕륭이 그 말대로 집을 짓고 살았더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왕건 태조를 낳았다.

서해 용왕은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3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4

왕건의 출생 배경은 대강 위와 같다. 그런데 조선왕조 세종때 ‘고려사’ 편찬을 담당한 사람들은 집현전에서 길러진 골수 주자성리학자들이다. 따라서 주자성리학적 사관(史觀)으로는 이런 신비한 설화적 내용을 역사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고려 의종때 편찬된 김관의의 ‘편년통록’ 기사 내용을 부기(附記; 곁에 붙여 기록함)하는 형식으로 이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고려 태조실록에도 이런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었던 듯하다. 민지(閔漬, 1248∼1326년)와 권부(權溥, 1262∼1346년)가 충숙왕 원년(1314) 1월20일에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실록 약찬인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에 “호경(虎景)대왕부터 원종(元宗)에 이르는 실록 기사를 7권으로 압축해 놓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들은 ‘고려사’의 세가(世家)와 해당 인물인 민지와 권부열전에 실려있다.

성리학적 사관으로도 그 합리성을 용인할 수 없었던 설화적이고 신비한 역사 사실은 물론 현대적 합리성으로도 수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사실들을 현대적 합리성으로 재해석하여 당시 상황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도리밖에 없다.

왕건 집안이 개성 부근에 터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 왕건의 6대조에 해당하는 성골(聖骨)장군 호경(虎景)이라 하는데, 그가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고 활을 잘 쏘았다 하니 고구려 유민으로 무사 신분이었을 듯하다. 송악산에 내려와 장가들어 부자로 살았다는 것은 이 일대의 상업세력과 결탁한 사실을 나타내주는 내용이다. 다시 과부 산신의 마음에 들어 그의 부군(夫君)으로 송악산 일대의 왕 노릇을 함께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곳 정치세력과 재결합하여 호족세력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강충이란 아들을 두어 가업을 계승하였다 하는 것은 개성 일대가 상업세력의 기반이 튼튼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사실 개성 일대는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이 물머리를 맞대는 조강구(祖江口; 조강의 입구)를 끼고 있어 한반도 안에서 상업활동을 하는데 중심이 되는 곳이다.

세 강이 실어나르는 물화(物貨)가 집산(集散; 모이고 흩어짐)하고 서해를 통해 유통되는 세계 각처의 물화 역시 이곳에서 집산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일대에서 해상세력과 연결된 상업세력이 성장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강충의 아들대에 가서는 3대째 축적해 놓은 재력으로 중국 거상과 직접 교역하는, 이 지역 최고 상업세력이 되었고 그 결과 중국 거상과 그 딸 사이에서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작제건의 아버지인 중국 거상을 고려세계에서는 당나라 숙종 황제라 높여놓고 있다. 뒷날 고려실록을 본 원나라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당 숙종의 동유(東遊) 사실이 기록에 없고, 시대도 100여 년 차이가 나서 서로 맞지 않으며 정황으로도 이를 인정할 수 없으니 이는 고려측의 억측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떻든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이 배에 많은 금은보화를 싣고 와서 보육(寶育)의 집에 한달 남짓 머물다가 떠난 중국인 청년 의 아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작제건은 16세 되던 해에 그 부친이 신표(信標)로 주고 갔다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상선을 얻어 타고 당나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합리성에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서해를 항해하던 중 서해 용왕의 청으로 용왕을 괴롭히는 여우를 쏘아 죽이고 용왕의 장녀에게 장가들어 많은 보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황당한 내용도 서해 용왕을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의 우두머리로 보면 그 합리성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바다를 주름잡고 있던 해상세력의 우두머리가 과연 누구였을까. 장보고(張保皐, ?∼846)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장보고는 828년부터 846년까지 청해진 대사 자리에 있으면서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으니 왕건(877∼943년)의 조부가 이때 16세 소년이므로 이 사이에 장보고와 만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작제건이 장보고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조강구의 강화만으로 금의환향하였으므로 이 일대 사람들이 그 세력에 굴복하여 영안성을 쌓고 그를 이 지방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그 용왕의 외손자 중 장자가 바로 왕건의 부친인 용건, 즉 왕륭(847년경∼897년)이다.

당연히 왕륭은 장보고 세력의 일익을 담당하는 제해권자 중의 한 명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청해진 세력은 장보고가 문성왕 8년(846) 봄에 반란을 일으키다 피살된 뒤부터는 그 세력기반이 흔들렸고 신라왕실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경문왕(861∼874년)대에 들어서서도 철저하게 청해진 중심이었던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다.

이에 왕륭은 한반도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조강구를 차지하고 점차 청해진 세력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해가는 듯하다. 서해용왕, 즉 장보고 세력의 외손이라는 신분이 그 중심이 되는데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해상세력은 이 가문에서 장차 새 사회를 열어갈 새 인물이 출현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해진 부근 영암 출신의 동리산 조사 도선대사가 송악까지 찾아와서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잡아주고 그의 출생과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룰 것을 예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정황을 대변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왕건은 태어나면서부터 용손(龍孫; 용왕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역대 왕들도 자신들이 용손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우왕(禑王, 1375∼1388년 재위)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될 때도 자신은 용손이라서 겨드랑이에 용린(龍鱗; 용의 비늘)이 있다며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다.

아무튼 왕건은 10여세 소년시절부터 이미 배에 올라 선단을 지휘하는 일을 익히는 듯하다. 그가 19세때인 진성여왕 9년(895)에 부친을 따라 궁예(弓裔, ?∼918년)의 휘하에 들어가자 궁예가 당장 철원태수를 시키고 다음해에는 발어참성(勃御塹城)을 쌓게 하여 그 성주로 삼는 것으로 보아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10대 후반에 한 고을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숙성하였다면 10대 초반부터 그런 일에 익숙하도록 훈련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왕건은 22세 되던 해인 효공왕 2년(898)에는 정기대감(精騎大監)이라는 기병 총수가 되어 양주(楊州; 지금의 서울)와 견주(見州; 지금의 양주)를 정벌하고 계속해서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빼앗는다. 한강과 임진강 및 예성강의 물머리가 합쳐지는 조강구를 차지하여 제해권과 상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왕건 집안의 후광이 이들을 손쉽게 굴복하도록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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