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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 정영기

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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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서히 몸이 마비돼가는 이름도 모르는 이상한 병환으로 몸져누웠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데리고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고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지켜야만 했다. 부모가 없는 우리 가정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우리의 생활도 점차 엉망이 돼갔다. 나는 학교에 가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어머니 병환으로 우리 가정은 이미 거덜난 상태였고, 학교에 내는 납부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 됐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도 육성회비라는 것이 있어서 분기마다 납부금을 내야 했다. 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5학년 때부터 납부금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1970년대 초, 그때는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살기가 훨씬 어려운 시절이어서 납부금을 제때 못내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어느 땐가 나는 우리 반에서 납부금을 내지 못한 마지막 학생이 됐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에게 여러 차례 불려갔다. 선생님은 납부금 독촉에 열심이었다. 아마도 학생들의 납부금 납부실적이 선생님들의 근무성적에 포함됐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교무실로 불러 혼을 내기도 했다. 언제까지 납부금을 낼 수 있는지 독촉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으로는 납부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저 묵묵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서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후 고기잡이배에 오르다

나는 그때까지 학교생활도 잘하고 성적도 괜찮은 모범생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집이 가난해서 납부금을 못 냈을 뿐, 다른 면에서는 나쁜 학생이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마치 나를 문제아처럼 취급했다. 게다가 조회시간에 아이들 앞에서 이름을 부르고 혼을 내고 망신을 줄 때마다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또래 아이들 앞에서 이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납부금 문제로 선생님께 혼나는 것이 두려워 학교 가기가 싫었고 친구들이 놀리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자주 결석을 했다.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석을 밥먹듯이 해서 결국 6학년 때는 학교에 나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나는 졸업장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인지 아니면 납부금에 관계없이 졸업장을 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쳤다.

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날아갈 것 같았다. 가기 싫은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납부금 문제로 선생님께 불려갈 일이 없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크나큰 안도가 됐다.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우리집 형편으로는 중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의 눈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집안사정이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생활전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처럼 배를 탔다. 동생이 넷이나 있는 장남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를 도와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됐다.

친구들은 대부분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도회지 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들이 부모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며 자신의 꿈을 키우고 있을 때, 나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가족의 생계비를 벌어야 했다.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학교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도 했지만 지긋지긋한 납부금 때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가끔 초등학교 동창들을 동네에서 마주칠 때가 있었다.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황급히 몸을 피하곤 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나와는 달랐다. 그들은 도시에 나가 학교를 다니고 나는 고기 잡는 어부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특히 같이 학교를 다녔던 여학생들과 마주칠 때면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중학교 여학생들은 까만 바탕에 목에 하얀색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고 다녔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나에게 그 하얀색 칼라는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보였다.

그렇게 지겨워했던 학교는 어느새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납부금을 제때 못내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 있더라도 학교에 다닐 수만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었다.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는데 나만 혼자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늘 외톨이가 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 나는 이렇게 마음속에 열등의식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선원생활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고기잡는 일을 한다. 낮에는 고기들이 그물을 보고 피해다니기 때문에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 어두운 밤에 주로 그물질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낮에 잠을 충분히 자두고 어두워지면 그물을 치고 고기잡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처럼 선원들은 밤낮의 생활 주기가 바뀌어 보통사람들과는 반대로 생활한다.

뱃일은 일의 성격상 아이들이 하기에는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작업을 하다가 바다에 빠질 위험도 있고 노동의 강도가 여느 일과는 달랐다. 그물을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작업은 마치 줄다리기 시합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일로 작업을 시작하면 보통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그물을 바다에서 끌어올린다. 한번 그물질을 하고 나면 속옷은 땀으로, 겉옷은 바닷물로 다 젖어버린다. 이런 작업을 할 때면 나는 힘이 부족해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릴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밤이슬을 맞으며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고 새벽이 되면 하루일과가 끝난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 아침햇살에 반사돼 빛나는 고기비늘은 눈부시지만 그 속에는 밤새도록 흘린 땀과 고통이 숨어 있었다. 나에게 아침은 하루가 끝났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런 기대도 설렘도 없었다. 삶이란 그저 고통일 뿐 아무런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밤샘작업을 하고 아침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먹을 때면 긴장이 풀려 한꺼번에 졸음이 쏟아진다. 아침을 먹고나면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져든다. 밤과 낮이 거꾸로 된 이러한 생활은 열세 살짜리 아이가 견디어내기에는 너무 과중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빚더미

계절에 따라 여러가지 고기를 잡았다. 봄에는 숭어와 낙지, 여름에는 새우나 꽃게, 가을에는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잡았다. 추운 겨울이 오면 뱃일도 쉬게 된다. 배를 타면 계절에 따라서는 며칠씩, 길게는 몇 주씩 바다 위에서만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에는 먹고 자는 모든 생활이 배 위에서 이루어진다.

고된 그물작업으로 몸은 힘들지만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생선이 들어간 고깃국도 먹을 수 있었다.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하는 우리집 형편에서 남의 배에 선원으로 따라가 하루 세 끼 먹는 것을 해결하고 얼마간의 돈도 벌어올 수 있었다. 이렇듯 나의 노동은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힘겨운 뱃일은 허약한 내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밤샘작업을 하는 그물질이 지겹도록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가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엄마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5남매 중 장남인 나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았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남동생과 2학년인 여동생,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도 학교에 가지 못한 일곱 살과 다섯 살배기 여동생이 있었다.

뱃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면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다. 엄마가 병으로 자리에 누운 이후부터 집안의 모든 일은 나의 몫이 돼버렸다. 밥하는 것에서부터 동생들 돌보는 것까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가장 힘든 건 겨울에 찬물로 빨래하는 일이었다. 동생들의 옷가지를 거의 매일같이 빨아야 하는 것은 어린 내겐 너무 벅찬 일이었다. 차가운 물로 빨래를 하면 비누가 물에 녹지 않아 때가 잘 빠지지도 않았다. 한겨울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한참 빨래를 하다보면 손가락이 깨지는 듯 시려오면서 감각이 없어진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으면 금방 피부가 벌개지고 마치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둔해진다. 돈이 없어 고무장갑을 살 수 도 없었고 온수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전혀 거동을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는 말도 하지 못하는 이상한 병이었다. 서서히 몸이 마비돼 얼마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었다. 식사에서부터 잠자는 것까지 모두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엄마가 몸져눕기 전까지는 우리 일곱식구가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조그만 어촌에서는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어선도 한 척 있었고, 시골에서 그렇게 가난한 살림은 아니었다. 엄마가 장에 갔다 오실 때면 알사탕이나 엿가락을 먹기 위해 우리들은 머나먼 동구 밖까지 나가서 엄마를 기다리던 그런 행복도 있었다. 그러나 행복의 여신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환은 우리에게서 이런 행복을 앗아갔고 얼마 되지 않은 재산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를 데리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이런 노고도 중병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엄마는 3년 동안 그렇게 자리에 누워만 있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병명도 밝혀지지 않은 채, 빚더미와 고사리 같은 우리 5남매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우리 가정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여름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나는 그때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가 있어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돌아간 지 하루가 지난 후에야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숨을 거둔 엄마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코흘리개 자식들을 험한 세상에 버려두고 가는 엄마의 심정을 보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나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서 처음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내 앞에 닥친 현실은 한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항상 자리에 누워만 있던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던 날 비로소 엄마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울긋불긋한 상여가 나가던 날, 어린 동생들과 나는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울먹이며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직 철부지였던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누워 있던 빈자리가 허전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중병에는 효자가 없다던가. 엄마가 몸져눕기 시작한 이후 3년이란 시간은 철부지 우리에게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우리들에게 많은 짐을 주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는 엄마였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버리자 엄마의 빈자리는 유난히도 커보였다.

엄마가 죽고나자 우리 가족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하루하루 동생들의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건 나의 몫이 돼버렸다. 엄마가 없는 우리 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어느날 맨 아래 동생 둘을 보육원에 맡졌다. 막내 영숙이는 다섯 살, 그 위 명숙이는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씀도 안하고 동생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알려줬다. 어린 동생들은 마치 이웃집에 놀러가듯이 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나는 동생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작별 인사 한마디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보육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동생들이 고아원으로 들어가고 나자 여섯이던 식구가 네 명으로 줄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온 뒤부터 많이 괴로워했다. 여리고 여린 동생들이 낯선 곳에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을 상상하니 어린 내 마음도 아팠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 지어진 각자의 길을 아무런 불평도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몇 달이 지난 후, 고아원으로 떠났던 동생들이 입양돼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소문을 통해 들었다. 입양이 뭔지 또 어느 나라로 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동생들이 이 땅을 떠나 어디론가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과 헤어진 후에도 우리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주 폭음을 했고 나는 남의 배에 선원으로 따라가서 얼마간의 돈을 벌어오는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봄날 고기 잡으러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배 위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바다 위에서 응급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육지로 돌아와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죽은 지 불과 2년도 안돼 아버지마저 우리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죽음을 예견하고 동생들을 고아원에 맡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이 고아원으로 들어간 지 4개월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절망의 세계로 떨어져버린 느낌이었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되던 해 3월이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럽고 큰 불행이었다.

나는 졸지에 우리 집 가장이 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도 알지 못했고 내 힘으로는 할 수도 없었다. 가까운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장례식을 치렀다. 아버지의 상여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나가는 동안 동네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같이 슬퍼해 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도보다는 남겨진 자식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 속으로 던져지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됐는지, 왜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만 닥쳐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남겨진 재산도 없었고 그렇다고 우리를 돌봐줄 만큼 여유 있는 친척도 없었다.

사카린 탄 물에 국수를 말아먹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동안 친척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 가족의 어려운 사정이 지방신문에도 실렸다. 시골 군수도 친히 지프를 타고 우리 집까지 와서 라면 두 상자를 건네주고 사진을 찍고 갔다. 그리고 몇 군데서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됐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이 잊혀지듯이, 이웃이나 친척들의 관심이 점차 줄어들었다. 불과 두세 달이 지나자 아무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상은 차갑고 냉혹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조차도 나중에는 우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우리는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내 나이 열다섯, 가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라고는 빚더미와 이름 석자뿐,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요즈음에야 소년가장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고 국가나 사회에서도 여러 측면에서 관심과 도움을 주고 있지만, 1970년대 중반인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변의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먹을거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끼니를 마련하는 게 내가 할 첫째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들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가를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만 했다. 아침식사로는 밀가루로 만든 죽을 먹고 점심은 그냥 지나치고 저녁은 고구마를 삶아서 먹으면 하루가 지나갔다.

어린 가장 혼자 힘으로 하루 세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동생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날마다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익숙해지자 하루 한 끼 정도 굶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입에 풀칠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입에 풀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모가 없는 우리는 생활보호대상자(생보자)가 됐다. 우리 동네에서는 우리 집과 혼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해당자였다. 생보자에게는 면사무소에서 가족 수에 따라 얼마간의 밀가루를 배급해 주었다. 나는 매월 밀가루를 받으러 면사무소에 갔다. 도장을 가지고 면사무소에 가면 담당직원은 도장을 찍고 나서 저울로 밀가루 무게를 달아서 반 포대 정도를 지급해 주었다.

나는 그 밀가루를 등에 지고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집에 가져와야 했다. 그것이 우리 식구가 한 달 동안 먹어야 하는 식량이었다. 하지만 밀가루 반 포대는 우리 세 식구가 죽을 끓여 먹어도 일주일 정도밖에 먹을 수 없는 적은 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밀가루를 아껴 먹어야 했다. 밀가루를 조금 넣고 물을 많이 부어 죽을 만들었다.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밀가루 수제비도 해먹었다.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국수를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장 먹을 끼니도 없는 우리 집에 국수를 말아먹을 국물이나 반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설탕처럼 단맛을 내는 사카린이라는 물질이 있었다. 지금은 발암물질이 들어있다고 해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만, 당시에는 값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단맛을 내는 데는 이 사카린을 주로 사용했다. 우리는 반찬 대신 사카린을 탄 물에 국수를 말아먹었다. 그래도 이런 특별한 음식을 먹는 날은 행복했다.

가끔 남의 집 부엌에서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우리 옆집은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곤 했다. 나는 그 가족이 모두 교회에 나가는 시간을 틈타 그 집 부엌에 들어가 밥이나 반찬을 훔쳐먹기도 했다. 매일 죽을 먹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있었다. 배고픔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 도덕적인 판단능력까지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욕구였다. 나는 그저 배가 고팠고 뭐라도 먹고 싶었다. 먹을 것이 풍족한 그 집이 부러웠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그 가족이 교회에 가는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나의 고향은 전라남도 무안, 뱃길로 목포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어촌이다. 집 앞에 바다가 있어 방문을 열면 바로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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