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남루한 현실을 끌어안는 휴머니스트의 꿈

  • 전찬일·영화평론가

    입력2004-11-09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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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하건 않건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감독)는 ‘꽃섬’(송일곤 감독)과 더불어, 비좁은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한층 확장시킨 2001년의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작이다. 산업적 팽창 속에서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신조어로 대표되는 물량공세, ‘조폭 영화’란 기이한 하위 장르로 대변되는 저급한 대중추수주의, 전통적으로 고질적 문제점인 다양성 결여 따위와 연관되어 크고 작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우리 영화의 또다른 면모, 즉 그 문제의 다양성과 건강성을 보여준 수작이다.

    그 점에서 고사 위기에 놓여 있던 이 영화가 제작사 및 가수 조영남씨를 비롯한 열혈 관객이 앞장선 ‘고양이 살리기 운동’에 힘입어 부활, 더욱 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개인적 반가움을 넘어서는, 영화사적으로 퍽 의미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일찍이 우리 영화판에서 목격할 수 없었던 소중한 ‘관객운동’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죽은 고양이’를 살리자는 운동”이라고 폄하하면서 “관객의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고 강변했다. 비록 소수이지만 그 영화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이 그 운동의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현실과 대중적 색채가 다분했음에도 ‘저주’ 받은 영화가 소수 팬으로부터 열광적으로 ‘숭배’되는 ‘컬트영화’가 되었다는 엄연한 현실을 무시 혹은 간과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렇다면 필자는 어떤 근거로 ‘고양이를 부탁해’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단언한 걸까. ‘고양이를 부탁해’에는 절대적, 좀더 정확히는 비상대적 기준에서 판단해도 칭찬 받을 만한 미덕이 즐비하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비판받아 마땅한 흠도 없진 않지만.

    영화는 인천의 한 여상을 졸업하고 갓 사회인이 된, 스무살 다섯 동창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휴먼 드라마다. 그림에 재능을 타고나 유학을 꿈꾸지만 너무나도 궁핍한 환경 탓에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전형적 아웃사이더요 감독의 분신, 즉 ‘진짜 주인공’인 지영(옥지영), 미모는 아니지만 귀엽고 착하고 무척 엉뚱한 몽상가 태희(배두나), 깍쟁이건만 결코 밉지 않으며 오히려 예쁜, 멋진 커리어우먼을 꿈꾸는 통통 튀는 야심가 혜주(이요원), 말 못할 출생의 비밀을 비롯해 고단하기 짝이 없는 삶에도 아랑곳없이 명랑함을 잃는 법이 없는 쌍둥이 자매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 이 ‘다섯 여자’에 관한 감동적이고 흥미만점인 이야기.



    지금도 여전히 내 심상에 머물러 있는 그 은은한 감동과 재미를 떠올리면, 솔직히 영화의 흥행참패가 적잖이 당황스럽다. 대중적 관점에서 보아도 그들 사이에서, 그들 개개인에게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는 제법 재미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성(性) 여부를 떠나 그들 삶의 면면은 다름아닌 우리네 삶의 단면 아니던가. 게다가 배두나나 이요원 등은 바야흐로 한창 인기를 누리는 스타급 배우들이고.

    ‘꽃섬’, ‘나비’(문승욱) ‘와이키키 브라더스’(임순례) 등 여타의 외면당한 문제작과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부탁해’에는 물론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데 필수적인 자극적 요인들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결정적 흥행요소인 화려한 액션과 개그식 요절복통 웃음이 없다. ‘친구’(곽경택) ‘신라의 달밤’(김상진) 류의 조직폭력도. ‘화산고’(김태균) 류의 휘황찬란한 SF(특수효과)도, ‘선물’(오기환) 류의 최루성 눈물도,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류의 엽기 및 통속적 멜로도, ‘조폭 마누라’(조진규) 류의 과하진 않지만 다분히 선정적인 섹스도 없다. ‘친구’의 노스탤지어와 과장(over)마저도 없다. 온통 ‘없는 것’ 투성이다.

    ‘부족함’의 미덕 살려

    필자는 줄곧 ‘고양이를 부탁해’를 비롯한 위에서 말한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한 으뜸 원인을 그 부재들로 돌린다. 엇비슷한 부재에도 ‘봄날은 간다’(허진호)가 소박하나마 나름대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감독의 명성과 이영애, 유지태 ‘투 톱’의 스타성 덕분이라고 보고 있다. 배두나와 이요원을 그저 스타라고 칭하지 않고 ‘급’이라는 단서를 단 까닭은 그래서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흥행성적이 ‘꽃섬’이나 ‘나비’보다 상대적으로 다소 양호한 것도, 전자는 바로 그 스타급 출연진 덕분이고 후자는 감독의 지명도와 제작사(명필름)의 막강한 파워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고….

    그러나 숱한 ‘없는 것’들을 오히려 장점으로 변화시킨 눈부신 미덕들. 특히 도저히 신인의 그것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성숙한 연출력과 궁핍하고 남루한 현실이 못내 싫지만 절망도 원망도 선동도 하지 않으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가슴으로 그 현실을 끌어안고 결코 꿈도 포기하지 않는 이상주의적 휴머니스트의 시선.

    감독은 영화를 더욱 자극적으로 말해 대중적 코드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 또래 여자애들을 다루는 여느 영화처럼 유독 섹스를 부각시키며 대중적 성공을 끌어낼 수도 있었다. 그런 선택이 설사 타협이라 할지라도, 고백하건대 어느 정도는 그러길 바랐다. 세상에는 섹스 말고도 고민거리가 아무리 많다한들, 스무살 아가씨들이 성적 고민과 방황, 일탈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건 왠지 부자연스럽고 현실적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여서다.

    튀는 성격답게 뇌성마비장애인의 시를 타이프 쳐주는 봉사활동을 하는 태희가 그 ‘시인’과 성적 갈등을 겪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더 나아가 일말의 사랑까지도 느끼며, 비록 순간적이긴 하지만 시인 캐릭터는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내러티브적으로 선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두 사람의 느닷없는 이별도 그 때문이고. 필자는 그런 설정이나 장면이 삽입되었더라면 영화가 한층 더 드라마틱해지고, 구성상의 완성도도 더욱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혜주도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남자친구와 실수로라도 캐주얼 섹스를 나누었더라면, 언제 붕괴될지 모르나 결국은 붕괴되고마는 초라한 단칸셋방에서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급급해 애인 타령이 사치스러웠을 지영 역시 한번쯤은 절망의 돌파구로서 섹스에 의존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도 든다. 감독은 섹스를 완전 배제할 것이 아니라 섹스마저 포함시키고 섹스를 넘어서는 또다른 그 무엇을 함께 제시하는 길을 걸었어야 했다고 할까. 필자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지지하면서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꽃섬’, 올해의 내 ‘개인 베스트 작’인 ‘파이란’(송해성)보다 다소 덜 지지하는 건 그 때문이다.

    냉철한 휴머니스트의 시선

    그럼에도 필자는 감독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이 그만큼 고달파서이리라. 감독이 강변한 바대로 섹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워낙 많아서이리라. 그렇기에 그들로 하여금 여느 스무살 여성들처럼 연애나 성문제로 고민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섹스를 부각시킨다면 틀림없이 의도하지 않은 선정성 내지 말초성으로 작품이 흐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끝내 접지 못했으리라.

    감독은 대신 남다른 노선을 걷는다. 그 흔한 대학에 단 한 명도 진학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변변한 직업조차 없는 주변인들인 다섯 인물을 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그들이 비단 성격적 요인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환경적 여건으로 인해 극복하기 힘든 차이와 차별, 소외로 치닫게 하는 것. 그 탓에 그들의 번민과 방황이 더욱 고통스럽고 극적으로 다가선다. 한때는 가장 친했던 지영과 혜주가 사사건건 충돌하고, 둘을 화해시키려는 태희나 비류와 온조의 노력이 끝내 허사가 되는 결말도 그렇고.

    영화의 성격화(characterization) 내지 인물해석은 단연 수준급이다. 다섯 여성은 어느 날 지영 앞에 나타난 길 잃은 고양이 티티들이다. ‘집이 요구하는 길들여진 삶과, 거리와 사회가 요구하는 야생생존의 법칙’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의 존재들. 영화는 그들의 내외적 처지를 공들여 찾아내 섬세한 공간연출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서울과 인천을 포함, 70여 곳에 달하는 로케이션 촬영으로 창조해낸 미장센을 통해. 지극히 대조적으로 비치는 휘황찬란한 서울의 공간들과 남루하기 짝이 없는 인천의 공간들은 그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다. 그것들 자체가 캐릭터다. 인간캐릭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기호이며 스스로 진술하는 발화체인 것이다.

    공간연출의 그 놀라운 현실적 설득력 덕에 스무살 아가씨들에 관한 평범한 이야기가 흔치 않은 감흥을 안겨준다. 일체의 과장이나 인위적 꾸밈을 탈피한 출연진의 연기도 그렇거니와 부자연스러운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출스타일도 그 감흥에 한몫 한다. 전체적 분위기가 다소 무거운 게 사실이지만 영화는 간간이 신세대적 유머로 그 부담을 덜 줄도 안다. 휴대폰 문자 메시지에 의한 자유분방한 자막 처리를 통해, 때론 화면 분할 등의 기교를 통해 인물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적 유희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가 가볍지 않으면서도 활력 넘치고 유쾌하게 다가서는 건 그래서다.

    감독은 대체적으로 인물들에 호의를 갖고 있지만, 지영이 태희에게 빌린 돈으로 새 휴대폰을 사는 에피소드에서 보듯 절대적 공감을 보내지는 않는다. 값싼 동정을 보이지도 않으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줄도 안다. 그럴 법한데도 감상적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각박하기 짝이 없는 사회를 향해 저주나 비난을 퍼붓지도 않는다. 다분히 사회비판적·계몽적이건만 결코 과하지 않으며, 단 한순간도 선동적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지영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듯 오히려 침묵으로 조용히 항변할 따름이다.

    필자는 신인의 작품 치고 이처럼 성숙하고 여유로운 연출력과 시선을 겸비한 예를 쉽게 기억하질 못한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필자가 더 좋아한다고 밝힌 ‘꽃섬’에서도 그런 성숙함과 여유를 발견하진 못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정도가 그에 견줄 만하지만, 감독의 첫 작품이 아니다. 여러 모로 임순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세 친구’의 여성버전이라 할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런데도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단정한다면 난 할 말이 없다. 그 판단은 두말할 나위 없이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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