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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포커스|나비

가상의 공간에 담은 세기말적 공포

  • 권은선·영화평론가

가상의 공간에 담은 세기말적 공포

‘와라나고를 부탁해’. 센트럴6극장 6관에서 상영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이다. 와라나고는 도대체 뭬지? ‘고양이를 부탁해’를 패러디한 영화인가. 그렇다면 와라나고라는 동물이라도 있는 것일까.

사실은 이렇다. ‘와라나고를 부탁해’는 최근 생산된 한국영화 몇 편의 앞 글자를 떼어다 붙인 조합어다. 퍼즐을 풀듯 하나하나 대입해보면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제목들이 꿰맞추어진다. 즉 이 극장에서는 6일간 특별 상영기간을 만들어 네 편의 영화를 교대로 상영하고 있다.

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 쇼케이스도 아니다. 그렇다면 매우 상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그것에 접근하는 시각이나 형상화하는 방법론 또한 매우 상이한, 달리 말하면 텍스트 내부에서는 딱히 하나의 특정한 경향으로 범주화할 만한 근거를 찾기 힘든 이 영화들이 ‘와라나고를 부탁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함께 묶여서 재개봉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부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분명 텍스트 외부에 있을 터. 몇몇 기사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밝히자면 이 영화들이 ‘합동 재개봉’이라는 공동의 운명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현재 ‘한국영화 르네상스’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명명을 가능케 하는 특정한 산업적·문화적 구조 속에서 르네상스라는 기표와는 참으로 대조적으로 개봉 당시 ‘흥행참패’와 조기종영이라는 동일한 경로를 밟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영화 극장점유율 40∼50% 시대에 ‘와·라·나·고’는 관객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유사하고 제한적인 영화적 쾌락을 반복 재생산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조폭’ 장르 영화가 견인한 ‘대박’ 신화의 반대편에서 혹은 그 그늘에서 한국영화의 다양한 충동을 형상화하면서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확장한 영화들이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도 확보하지 못한 채 사장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 중에 한국영화의 ‘위기’를 논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담론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이러한 정황이 문제라고 인식할 때 문제의 화살을 전적으로 일부 ‘대박’ 영화나 그 영화들을 선택한 관객의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한 비평 태도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많은 이들이 근심하고 있는 현재 한국영화를 둘러싼 ‘수상한 기류’는 분명 한국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산업적, 문화적, 무의식적인 구조의 문제며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지속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이 구조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매우 제한된 시간과 공간이기는 하지만 ‘와·라·나·고를 부탁해’의 확대 개봉이 일정 정도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의 ‘한국영화’를 순환하면서 팽창하고 있는 ‘대박’의 상상과는 단호하게 결연하면서 한국사회의 모순과 그 억압적 측면에 대한 성찰을 탄탄한 미학적 완성도로 포획해내고 있는 저예산 영화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이 억압적인 산업구조의 틈새에서 관객들과 좀더 창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영화의 미래와 관객들에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롭고도 낯선 실험

‘와·라·나·고를 부탁해’의 ‘나’인 ‘나비’는 ‘이방인’에 이은 문승욱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과 마찬가지로 문승욱은 대학의 영화과에서 연출수업을 받았으며 1990년대 이후 활성화되기 시작한 독립·단편영화제를 통해 주목을 받았던 감독이다.

시간적인 낙차 때문에 ‘와·라·나·고’와 함께 묶이지는 않았지만 2001년에 생산되어 이 영화들과 동일한 운명을 겪은 ‘소름’의 윤종찬 감독과 ‘꽃섬’의 송일곤 감독 역시 이들과 동시대에 유사한 궤적을 밟아온 신인 감독들이다.

요컨대 1990년대 중반 이후 기존의 충무로 도제시스템 바깥에서 체계적으로 연출 훈련을 받고 단편·독립 영화제 등을 통해서 시선을 받았던 감독들이 1990년대 말 이후 하나의 새로운 집단적 흐름을 이루면서 한국영화를 새롭게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한국영화의 장 속에, 그리고 한국영화사 속에 그 자리를 매길 때 ‘나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새롭고도 또한 아주 낯선 영화다. 우선은 몇몇의 선행작업이 있기는 했지만 디지털 카메라로 만든 장편영화라는 점에서 ‘나비’는 새롭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단순히 디지털로 찍었다는 물질적 측면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이나 남기웅 감독의 ‘동숭동에서 매춘하다 토막 살해당한 소녀 아직 동숭동에 있다’ 등 오프라인에서 상영된 디지털 영화들과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와 김지운 감독의 ‘커밍 아웃’같이 온라인에서 상영된 디지털 영화들은 저예산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소재의 확장과 자유분방함이라는 가능성을 주로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의 문법체계 내에서 실험하고 있다. 그런 반면 ‘나비’는 디지털카메라가 이미지 차원에서 지니고 있는 본원적인 매체적 속성을 탐구하고 그에 걸맞은 영화적 문법 자체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비’는 디지털카메라의 현장성과 역동성을 최대한도로 살려내면서도 문맥상 요청되는 의미에 따라서 선명한 입자의 화면과 거친 입자의 화면을 대비시키면서 실은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촬영하고 배열하고 있다.

특히 건물이나 거리에서 로케이션 촬영된 일련의 장면은 인물과 배경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현장이 주는 사실감과 입체감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지만, 동시에 인물들을 배경으로부터 매우 부자연스럽게 분리시키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조차도 매우 낯설게 보이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망각의 바이러스와 한국사회

이러한 효과는 전체적으로 허구적이면서도 또한 다큐멘터리적인 특성을 동시에 발휘한다. 따라서 가상의 시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마치 현재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기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즉 ‘나비’는 디지털카메라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잠재적인 미학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발현하면서 매우 독특하게 사실적인 허구의 세계를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나비’를 한국영화 공간에서 아주 새롭고도 독자적인 자리에 서있게 하는 지점이기도 한데,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 이 영화의 가상적 상황과 이야기는 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가 된다.

사람들이 잊고자 하는 기억을 말소시켜주는 ‘망각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가까운 미래의 한 도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관광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이곳 저곳에서 나타났다가는 이내 사라지는 바이러스의 이동이 예측불허인 것처럼, 미래 한국의 이 도시는 모든 것이 돌발적 상황과 예측불가능성의 위험에 처해 있다. 바이러스는 음습한 건물 주위에서 출몰하지만 갑작스럽게 내리는 산성비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정부가 계획한 신도시의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는 과거에 사라졌던 사람들의 집단시체가 발견된다.

관광사업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는 국가권력은 국가적 이미지를 위해 납중독 환자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보호소에 수감하고, 바로 이 국가권력과 긴밀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관광사들은 자본축적을 위해서 비밀리에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행한다.

사회적 리얼리즘과 장르 체계 내에서 리얼리즘 노선을 추구하는 접근방식이 유행하는 한국영화사에서 미래에 대한 세기말적 인식을 녹여낸 ‘나비’와 같은 서사는 사실 매우 예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망각의 바이러스를 찾아 고국을 방문한 안나와 그녀의 관광가이드인 10대 납중독 임산부 유키, 그리고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는 택시기사 K, 이 3명의 주인공이 동행하는 중심 줄거리에 변주되는 도시의 환경과 사건들은, 즉각적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추진된 급작스런 근대화와 자본주의화가 착종시킨 정경유착과 인권억압, 그리고 도덕적 가치의 붕괴 등 가까운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사실을 가리킴으로써 한국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를 직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안나가 외화획득을 위해서 1970년대 한국사회가 독일에 ‘수출’한 간호사의 딸이라는 것, 그리고 이 땅의 자식인 유키와 K가 부모가 없다는 설정 역시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을 디지털 매체에 대한 성찰로 포획해낸 ‘나비’는 올해 한국영화가 거둬들인 큰 수확임에 틀림없다.

신동아 2002년 1월 호

권은선·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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