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영화마저 석권한 판타지 소설의 제왕

반지의 제왕

  • 김성곤 < 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

    입력2004-11-17 1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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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지의 제왕’이 2002년 벽두 극장가와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을 모르고는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다. 소설에 등장하는 ‘절대반지’를 본뜬 반지가 젊은이들의 액세서리로 각광받고 있다. 50년 전 영국 옥스퍼드대학 한 교수의 펜 끝에서 시작한 반지 신드롬, 그 환상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판타지소설, 또는 환상소설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18세기 말 개화했던 고딕소설(Gothic Novel)과 만나게 된다. 고딕소설의 원조는 호러스 월폴의 ‘오트란토 성’이고, ‘고딕’이라는 말은 원래 ‘중세’를 의미했으나, 후에 ‘무시무시하고 환상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초기의 고딕소설은 유령이 출몰하는 고성이나 묘지, 폐허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현상들을 다루었으며, 주제는 주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다.

    19세기에 들어 고딕소설은 단순한 선악 대결이나 권선징악 구도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악한 요소, 강박관념, 광기, 이중성 등 심리적 고찰과 인류문명에 대한 비판까지 시도함으로써 더욱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고딕소설 또는 환상소설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예컨대 자신의 분신인 괴물을 창조하는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는 포의 ‘윌리엄 윌슨’, 낮과 밤에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웰즈의 ‘투명인간’, 그리고 거울에 모습이 비치지 않는 ‘드라큘라’ 등은 모두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좋은 경우다.

    19세기 중엽에는 또 환상소설의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가 출간되어 세계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옥스퍼드대 수학교수였던 루이스 캐럴은 이 환상소설에서 하얀 토끼를 뒤쫓아 지하세계(이 또한 지상세계의 거울 역할을 한다)로 들어가 여러가지 환상적 모험을 겪는 주인공 소녀 앨리스의 이야기를 통해 예리한 현실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또 속편인 ‘거울 속으로’라는 환상소설에서는 앨리스가 꿈속에서 거울 속으로 들어가 그곳 세상에서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환상소설의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러한 고딕·환상소설 전통은 영국작가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브람 스토커(‘드라큘라’)나 미국작가 찰스 브록든 브라운(‘빌란트’), 에드거 앨런 포(‘어셔가의 몰락’), 윌리엄 포크너(‘성단’) 같은 뛰어난 문인들에 의해 계승돼왔다.

    20세기에 들어서 판타지소설은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학의 중세문학 교수들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C. S. 루이스는 ‘장롱 속의 사자와 마녀(1950)’라는 7권짜리 판타지소설로 유명한데, 이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나르니아’라고 부르는 장롱 속의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그런 유사성에서 이 판타지 소설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연결돼 있다.

    그러나 현대 판타지소설의 아버지는 단연, 루이스의 친구이자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이라는 대작을 써낸 영국작가 J.R.R.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이다. 옥스퍼드대 중세문학 교수이자 문헌학자인 톨킨은 40년에 걸쳐 가상의 세계인 ‘중간계(Middle Earth)’를 창조한 다음, 거기에 사는 각종 종족들과 그들만의 달력과 지도와 역사를 완벽하게 만들어냄으로써, 현대 판타지소설의 원조가 되었다.

    즉 현대 판타지소설의 특징은, 현실과는 다른 완벽한 환상세계 속에서 시공을 초월해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각광받고 있는 판타지소설들 역시 대부분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세계나 환상세계에서 일어나는 모험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현실세계를 다루고 있는 일반문학과 구별된다.

    현대 판타지문학의 효시가 되는 ‘반지의 제왕’은 제1부 ‘반지 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 제2부 ‘두개의 탑(The Two Towers)’, 그리고 제3부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으로 이루어진 대작 환상소설이며, 모든 판타지소설의 전범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국내에서는 1990년에 ‘반지전쟁’(전5권, 예문)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2001년에는 ‘반지의 제왕’(전6권, 황금가지)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판권을 얻어 정식 출간한 완역본인 황금가지의 ‘반지의 제왕’은 능숙한 우리말 솜씨를 구사한 매끄러운 번역으로 이 방대한 소설을 재미있게 읽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이름 표기 중 일부가 발음상 정확하지 않은데, 예컨대 아라소른은 아라손으로, 아라고른은 아라곤으로, 또 보로미르는 보로미어로, 모르도르는 모르도어로, 그리고 팔란티르는 팔란티어로 표기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톨킨이 창조한 환상의 세계인 ‘Middle Earth’도 중국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중원’보다는 ‘중간계’나 ‘중간세계’로 옮겼어야 했다. 또 ‘요정’으로 번역한 ‘elf’나 ‘난쟁이’로 번역한 ‘dwarf’의 경우도 적절치 못했는데, ‘요정’은 독자들이 ‘fairy’를 연상하기 쉽고, ‘난쟁이’ 또한 우리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굳이 마땅한 우리말이 없다면, 호빗처럼 그냥 엘프나 드워프로 옮기는 것이 의미전달에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단점을 제외하면 ‘반지의 제왕’은 잘 읽히는 만족할 만한 역서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피트 4인치(71㎝)의 키로 크기가 인간의 반쯤 되는 호빗족들이 모여 사는 샤이어 지방의 호비턴이라는 곳에 빌로 베긴스라는 노인이 자신의 111회 생일잔치 때 홀연 사라진다. 그는 아무도 몰래 멀리 떠나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괴물 골룸으로부터 획득한 마법의 반지를 조카 프로도에게 물려준다. 사라진 숙부 빌로로부터, 그것을 끼는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마법의 반지를 물려받은 청년 프로도에게 마법사 간달프는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그 반지가 악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종족들이 악의 조종을 받게돼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반지를 파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머나먼 곳 모르도어에 있는 ‘운명의 산’에 가서 그곳 분화구의 끓는 용암에 반지를 던져 넣는 것이다.

    프로도는 악의 힘으로부터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뜻을 같이하는 호빗족과 엘프족, 드워프족, 그리고 인간족 등과 더불어 9인의 다종족 원정대를 조직해 그곳을 향해 떠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험과 모험을 겪는다. 절대악의 화신인 사우론이 그 반지를 빼앗기 위해 마법의 흑기사들과 괴물인 오크족들과 사루만 같은 추종자들을 보내 프로도 일행이 가는 길목을 노리기 때문이다.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덤벼드는 악의 힘들과 싸우는 프로도 일행은 때로 엔트들이나 로한의 기마병들 같은 선한 힘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운명의 산’에 도착해 반지를 용암에 던지는데 성공한다. 프로도와 동료들의 용기 덕택에, 재기와 부활을 꿈꾸며 다시 한번 세상을 지배해보려던 악의 화신 사우론은 거세되고 세상은 임박했던 파멸로부터 구원받는다.

    ‘반지의 제왕’은 북구신화와 켈트설화, 그리고 선악의 대결이라는 기독교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또한 그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모험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만인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독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톨킨의 환상세계에서는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고, 괴물들이 말을 하며, 인간보다 작은 종족들이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선과 악의 대결을 목도하고, 선의 승리를 경험하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는 정의로운 종족들이 펼치는 삶의 여정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여행과 모험을 통해, 독자들은 궁극적으로 현실세계의 여러 문제점들을 성찰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톨킨의 중간계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어권 사회는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들과, 이제부터 읽게될 사람들로 나누어진다”(‘선데이 타임스’)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지 않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판타지 독자가 ‘반지의 제왕’을 읽지 않은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폴 휴즈)는 얘기가 나올 만큼, ‘반지의 제왕’은 중요한 소설이다. 또 현재 페이퍼 백으로 나와 있는 모든 소설들의 10분의 1이 ‘반지의 제왕’에 빚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올 만큼, 그리고 현재까지 나온 모든 판타지소설의 10분의 9가 ‘반지의 제왕’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세계문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도 13세 때 이 소설을 읽었다고 밝혔는데 그녀의 ‘해리포터’ 시리즈에도 ‘반지의 제왕’의 흔적이 도처에 엿보인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악의 상징인 사우론과 주인공을 도와주는 선한 마법사 간달프, 그리고 마법의 종족들이 살고 있는 중간계는 각각 ‘해리포터’에 나오는 볼트모트와 덤블도어, 그리고 마법의 세계와 서로 긴밀히 병치되고 있다. 다만 포스트모던 시대와 인식의 산물인 ‘해리 포터’에서는―특히 제3권 ‘아즈카반의 죄수’가 그렇지만―절대악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선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포용력과 이중의 시각을 더욱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반지의 제왕’에서도 톨킨은 마법사 간달프의 입을 빌려, 절대악의 상징인 사우론도 사실은 더 큰 악의 추종자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절대성’의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

    ‘해리포터’는 결코 푸른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톨킨과 ‘반지의 제왕’의 탄탄한 전통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즉 ‘해리포터’는 쟁쟁한 영국 판타지문학이 산출한 값진 문학적 성과라는 것이다. 영국은 이미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데임 작위를 수여했고, 007 영화를 통해 영국을 알리는 데 공헌한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영국의 문화적 위상을 전세계에 떨치는 데 공헌한 J.K. 롤링에게도 영국황실은 언젠가 데임 작위를 수여할 것으로 보인다.

    ‘반지의 제왕’은 국내 주요 판타지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통 판타지 작가인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도, 그리고 김민영의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에서도 톨킨의 자취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 작가들은 톨킨에게서 소재는 빌어오되, 자신만의 독창적 상상력으로 좋은 작품들을 써내고 있다.

    특히 단순한 판타지소설이라기보다는, 추리소설과 SF와 판타지, 그리고 미래소설과 본격문학적 요소가 혼합된 특이한 작품인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에는, 저자 김민영도 인정하고 있듯이, 톨킨에게서 빌어온 이름과 개념들이 여기저기 발견된다. 우선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의 주인공 보로미어는 ‘반지의 제왕’에서 좌충우돌하다가 죽는 인간족 전사 보로미어에서 그 이름과 성격을 빌려왔고,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에 등장하는 팔란티어 게임 역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팔란티어의 돌’에서 빌려왔다.

    김민영은 ‘멀리 본다’는 뜻의 ‘팔란티어’와 톨킨이 창조한 마법의 세계인 ‘중간계’를 가상현실 속의 컴퓨터 게임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현대판 반지의 제왕으로 변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톨킨의 중간계에서 목숨을 건 모험과 원정에 나서는 각 종족의 전사들과 괴물들, 예컨대 마법사, 인간족, 드워프족 전사, 그리고 오크 등은 김민영의 가상세계인 컴퓨터 스크린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양은 많으나 질적으로 수준미달인 국내 판타지 문학계에 김민영의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같은 수준 높은 작품이 산출되었다는 것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루이스 캐럴이나 톨킨이나 C.S. 루이스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서구의 판타지문학은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교수들이 주도해왔고, 따라서 결코 수준 낮은 문학장르가 아니다. 그것을 수준 낮은 장르로 만드는 것은 자격 없는 작가들일 것이다. 판타지문학은 아무나 달려들어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고대 신화나 설화에 정통하고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는 재능 있는 작가들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해리포터’ 같은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판타지문학 전통의 부재, 상상력의 빈곤, 좋은 작가들의 부족, 그리고 본격문학 작가들의 편견과 폄하 때문일 것이다. 즉 좋은 판타지문학이 산출되려면 톨킨이나 루이스 같은 수준 높은 작가들이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민영은 대단한 가능성을 지닌,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은 그 방대함으로 인해 적어도 두 번 읽어야 하며(처음 읽을 때 많은 것을 놓치기 때문에),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반지의 제왕’은 북구신화와 켈트설화, 그리고 기독교적 전통에 근거해 쓰여졌다. 그리고 그 결과, 동양과는 다른 서양의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은 선악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기독교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립은 중세 기독교가 만들어낸 개념이며, 선을 수호하기 위한 기사들과 순례 여행, 그리고 불에 의한 정화 또한 기독교적인 것이다.

    반면, 마법의 반지나 모험이나 탐색, 또는 선한 마법, 그리고 엘프나 드워프, 또는 엔트나 오크 같은 것들은 켈트설화나 북구신화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이러한 패턴과 전통이 스필버그의 ‘스타워즈’에서는 흥미롭게도 우주전쟁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황제와 다트 베이더로 상징되는 절대악과 오비완 케노비와 룩 스카이워커로 표상되는 절대선의 대립, 또 츄바카, R2-D2, C-3PO, 한 솔로의 다종족 원정대, 그리고 우주도시에서 살고 있는 각기 다른 수많은 종족들―그들은 엘프, 드워프, 엔트, 오크 등을 연상시킨다―은 ‘반지의 제왕’과 놀랄 만큼 흡사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종족간 연대 또는 다국적 연합 또한 서구적 특징이다. 중세의 유럽은 커다란 다종족 연합체와도 같았고, 그래서 국가간의 국경이 별 의미가 없었다. 당시 유럽에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은 아직 방언에 불과했고, 전 유럽의 식자들과 성직자들은 라틴어라는 공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는 교황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국가간의 갈등과 충돌은 부단히 있었으며, 그런 때에는 다른 국가들이 연합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한 전통은 면면이 이어져, 이슬람에 대항하던 십자군전쟁 때나, 나치 독일에 대항하던 2차 대전 당시에도 다국적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톨킨이 형성한 다종족 원정대는 또 오늘날 다문화주의, 다인종사회의 바람직한 근본이 되기도 한다. 반지를 조종해 세상을 단일체제로 지배하려는 절대악에 대항해 힘을 모아 원정대를 조직한 각기 다른 종족들은 단일한 지배문화·중심문화에 대항하는 ‘주변부’와 ‘다양성’의 힘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포로도 원정대의 구성원들은 모두 피지배문화에 속하는, 크기가 작고 약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지의 제왕’은 다분히 포스트모던적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점에서 톨킨의 뛰어난 예시력과 통찰력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갔는가를 알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 탁월한 문명비판이자 시대비판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다. ‘장롱 속의 사자와 마녀’를 통해 2차대전을 비판했던 C.S. 루이스처럼, 톨킨 역시 ‘반지의 제왕’에서 선악의 대립과 전쟁을 통해 2차대전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나치독일로 표상되는 절대악의 지배욕과 전체주의 체제를 우화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즉 손가락에 끼면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반지의 힘은 대단히 유혹적이고, 반지의 소유주는 곧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결국은 반지가 주인을 통제하게 되고 반지의 주인은 악의 조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지는 세상을 파멸시킬 인간의 권력욕과 지배욕의 상징이 되고, 그것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악의 힘과 싸워 이겨야 하며 그 반지를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 세속적 욕심을 정화시켜야만 한다. 판타지소설은 환상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어야만 한다. 현실과 환상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며,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톨킨이 12년에 걸쳐 집필한 ‘반지의 제왕’은 스탠퍼드대학 선정 ‘20세기 영미문학 걸작 25선’, 랜덤하우스 출판사 선정 ‘20세기 최고소설’ 4위, 그리고 ‘더 타임스’지 선정 ‘20세기 100권의 책’ 4위에 랭크되는 등 이미 세계적인 인정을 받아 고전문학의 반열에 오른 세계명작이다.

    2002년 벽두에 개봉된 영화 ‘반지의 제왕’ 역시 2억7000만달러(35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답게 ‘영화사를 바꾼 10대 걸작’(‘더 선’지), ‘올해 최고의 영화’(‘엔터테인먼트 위클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벌써 여러 부문에서 ‘골든 글로브’를 포함한 주요 영화상 후보로 올라있다.

    이는 원작의 명성, 판타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뛰어난 작품성, 뉴질랜드에서 촬영한 수려한 대자연의 풍광, 정교한 컴퓨터 합성장면, 그리고 시원한 액션 어드벤처 등이 잘 혼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원작을 읽지 않고 보면 다소 재미가 덜하고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는 ‘해리포터’와는 달리, ‘반지의 제왕’은 굳이 원작을 읽지 않고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또 호빗이나 엘프나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 원정대가 대부분 인간보다 작은 종족들이기 때문에, 블루 스크린과 미니어처 기법 및 원근 촬영법 등을 이용해 등장인물들을 실제보다 작게 보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며, 전사들의 전투장면 역시 아날로그 세대나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 모두 만족할 만한 리얼리티를 성취하고 있다.

    뉴질랜드 출신의 피터 잭슨 감독은 단순한 선악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벗어나 웅대한 스케일의 서사시적 모험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간달프와 악마 발록의 전투 장면은 압권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원래 ‘반지의 제왕’은 그 환상적 요소로 인해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고, 그래서 아직까지 영화로 만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기술의 발달은 드디어 ‘반지의 제왕’을 한 편의 훌륭한 영화로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주인공 프로도 역의 일라이저 우드, 선한 마법사 간달프 역의 이안 맥컬린, 그리고 악한 마법사 사루만 역의 크리스토퍼 리 등의 연기도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등, ‘반지의 제왕’의 인기는 이제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을 단순한 판타지 모험영화로서가 아니라, 권력문제를 다룬 한 편의 훌륭한 정치영화로 보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제임스 핑커턴은 원작소설보다 영화가 “권력에 대한 유혹과 권력자의 부패를 더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 영화의 비판대상은 물론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체제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은 심지어 선인들까지도 마법의 반지와 그것이 제공해주는 권력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은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하는 절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미인들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을 자신들의 애완동물에 붙이기를 좋아할 만큼 톨킨의 이 판타지소설과 영화를 사랑한다. 이 작품에서 자신들의 신화와 설화와 민담을 발견하고, 종교적 전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톨킨이 창조한 중간계의 주민인 호빗들 역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호빗은 톨킨이 1937년 ‘호빗’이라는 아동용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미 판타지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반지의 제왕’으로 인해 리얼리티를 가진 존재들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호빗들은 사실 약소국이나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 사우론은 영화에서는 거대한 악의 에너지로 묘사된다. SF인 ‘스타워즈’에서도 악의 힘은 강력한 기(氣), 즉 에너지로 묘사되는데, 이는 현실에서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심성의 힘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들 작품들은 테크놀로지를 오용했을 때, 그리고 심성을 바르게 쓰지 않고 탐욕에 젖어 유혹에 넘어갈 때, 우리는 모두 악의 화신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인류문명과 사회현상, 그리고 시대상황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경고를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한 것이 판타지문학의 존재가치이며, 진정한 판타지문학은 ‘반지의 제왕’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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