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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의 조선사랑

의료선교사

  • 김홍권 < 한국종교사회윤리연구소 소장 >

로제타 홀의 조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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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부터 44년간 이 땅의 여성·어린이·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로제타 셔우드 홀.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은 환자 치료중 34세의 나이로 순직했고, 아들 셔우드 홀은 한국 결핵환자의 대부가 됐다. 시련과 편견을 뚫고 조선 의료와 장애인 교육의 기틀을 다진 한 벽안 여성의 감동적인 삶.
1991년 필자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병원 및 요양소를 세우고 크리스마스 실 사업을 시행한 외국인의 유해 이장식이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을 찾았다. 고인의 이름은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 의료 선교사로 ‘결핵환자의 아버지’라 불렸던 그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며, 모국인 캐나다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사랑하는 땅 한국’에 묻히기를 염원했던 이다.

이장식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의 자서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접하게 됐다. 그의 부모 대로부터 시작되는 의료 선교사 4명의 봉사로 점철된 삶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탄압, 남편과 딸을 연이어 여읜 인간적 고통 속에서도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낯선 땅의 불우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즉 셔우드 홀의 어머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43년간 이국 땅에서 온전한 봉사의 삶을 살다가 68세 노인이 되어서야 모국으로 돌아갔던 로제타 또한 가족과 함께 한강 기슭 야트막한 언덕 양화진에 묻혀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홀 집안 사람들은 모두 5명에 이른다.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Willam Jam es Hall),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Sher wood Hall)과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Marian Hall), 마지막으로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 et Hall) 등이다.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로제타는 영국·프랑스의 최고훈장은 물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슈바이처 박사보다 22년 먼저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상가이자 신학자, 음악가였던 슈바이처 박사에 비해 의사의 길에만 전념했고, 게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업적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어떠한 공식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93년 교육부가 주관한 ‘한국특수교육 100주년기념사업’ 당시, 교육부와 해당 학회에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맹아교육을 실시하고 점자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그녀에게 훈장을 추서하려 했으나 몇몇 인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일이 있다. 그녀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미수호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아들인 셔우드 홀 박사는 훈장을 받았으나 그녀에게는 어떤 경의도 표해지지 않았다.

1993년, 모 일간지에서 “로제타 홀의 업적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읽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필자 역시 그녀의 사랑에 빚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보답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전기 집필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무능과 자료수집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작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다행히 2000년 10월, 고려대 의대 내 로제타 홀 클럽과 대한여자의사회 등의 초청으로 내한한 그녀의 손자 윌리엄 제임스 홀과 손녀 필리스 홀 킹 여사를 만나게 됨으로써 작업은 급진전을 보게 됐다.



“여성 의료는 여성의 힘으로!”


미국 개신교가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5년이었다. 당시 개신교는 이미 조선을 제외한 동양 각국에서 오랜 선교 경험을 쌓고 있었다. 미국 젊은이들, 특히 의학도들 사이에서는 인도나 중국에 대한 선교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황사영이 로마교황청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순교하는 등 가톨릭 선교가 전략적 실패를 경험한 뒤, 서방에서는 조선 선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1883년, 통상외교사절단으로 미국을 여행중이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 등이 목사 존 F. 가우처를 만나 조선의 변화에 대해 알린 것을 계기로 미국 선교기관들은 다시금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던 감리교단은 조선에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을 파견했다. 교단은 조선의 관습, 종교 성향, 경계심과 박해 등을 감안해 교육·의료를 통한 선교를 초기 전략으로 채택했다. 특히 집밖에 나서기 쉽지 않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의료선교사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됐다.

한편, 한미·한영 통상조약 등이 체결되면서 문호가 열리기 시작했지만 조선에서 종교의 자유는 여전히 유보적이었다. 1900년에는 조정이 지방관리들에게 선교사 처형을 지시하는 등 선교활동은 여전히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에 매진한 대원군의 부인 민씨(閔氏)가 ‘메리’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이미 조선에는 4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와 2만여 명의 개신교 신자가 있었고 그 수 또한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의 의료 복지 상황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제타는 44년간 여성전용병원 2개, 여자의학강습소 2개, 소아과병원 2개, 간호학교 2개, 결핵병원 1개(아들 셔우드와 함께)를 세우고, 맹아학교와 농아학교 각 1개, 고등학교 1개(남편 윌리엄과 함께), 초등학교 1개를 건립하는 등의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한글 점자 개발, 미국 유학 여의사 및 맹아 특수교사 배출, 맹인 영문과 졸업생 배출, 제1회 동양 맹학교 회의 개최 등도 그가 이룬 성과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에 올 때부터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을 여성의 힘으로!(Medical work for woman by wo man!)”라는 구호로 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로제타가 재정적 어려움과 일제의 감시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여자의학강습소를 계속한 것은 그만큼 여성의 지위 향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숙원 사업 또한 조선 최초의 여자의과대학(고려대 의대의 전신)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사재를 털어가며 헌신했으나 대학 설립 직전인 1933년, 68세의 나이로 정년을 맞게 되자 같은 해 10월2일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5월21일자 동아일보에는 강습회와 조선의학전문학교 기성회 조직 사업에 대한 장문의 기사가 실려 있다.

“장미는 어떠한 이름을 거기에 붙이더라도 그 향기는 언제든지 장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于先(우선) 講習(강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조선여자들에게 醫學上(의학상) 技術(기술)과 學術(학술)을 가르치겠다는 목적으로 그 같이 강습회를 개최하는 것이라는데… 근 70평생을 조선과 조선동포를 위하여 심혈을 다해서 犧牲的(희생적) 勞力(노력)을 아끼지 아니한 許乙(허을) 부인이 이번 사업에도 오로지 精誠(정성)을 다하고 있음으로 재단설립도 仝夫人(동부인)의 손에 이루어질 것은 의심 없는 일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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