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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

르네상스적 인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르네상스적 인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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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적 전인(全人)의 표상 알베르티. 법학·철학은 물론 미술· 건축·음악·어문학 등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보편성과 다양성이라는 양각의 눈으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하고, 한편으론 이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만능인이자 교양인.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우리의 대학에 문제가 많다 하나 가장 심각한 것은 교양인과 지성인은 드물고 전문가와 기술자만 들끓으며, 게다가 그것이 끝없이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특히 각종 고시로 분주한 법대가 그렇다. 고시열풍은 법대만이 아니라 모든 학과에 불고 있다. 그야말로 고시공화국에 고시망국병이다.

2년 전 아주 어렵게 ‘법과 예술’이라는 교양강좌를 열었으나, 고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작 법대 교양과목에서는 제외된 일이 있었다. 법대교수가 예술에 대해 쓴 글이 연구업적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이 글도 당연히 연구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곧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다.

법을 비롯한 우리의 학문과 예술은 대부분 서양의 토막지식을 기술적으로 모방하거나 암기한 것에 불과하다. 연구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베끼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암기하게 한다. 이를 통해 지난 30여 년 군사독재 치하에서 급격한 서양화를 이루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비판과 창조이며, 이는 오직 교양과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보기를 우리는 르네상스에서 찾을 수 있다. 르네상스인·만능인·보편인의 표상인 알베르티는 대학에서 7년간 법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이로써 그는 법을 비롯한 도덕철학 등 여러 학문 분야뿐 아니라 회화·조각·건축·음악·시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역사상 거의 최초이자 최고의 업적을 남겨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다.

알베르티는 다양성 속에서 보편성을 추구했다. 이 두 가지 안목으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하고 또한 이를 뛰어넘기 위해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나갔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인(全人)이며 르네상스인, 겹눈의 인간이다. 또한 교양인, 지성인의 전형이다.



평생의 모토 “다음은 무엇?”


알베르티는 평생 하나의 모토로 살았다. QUVID TUM, ‘다음은 무엇?’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 무엇이든 완성하지 않은 미완의 상태, 영속적인 계기(繼起)와 지속의 반복을 통해 불변부동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을 뜻한다. 그가 쓰고 그리며 만들고 설계한 것들이 모두 그렇다. 시작도 끝도 없는 편린, 해결도 결론도 대단원도 없는 끝없는 모색의 흔적일 뿐이다.

그렇다고 상대주의나 자의성에 빠져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편을 향한 끝없는 몸짓이라 봐야 할 것이다. 개별의 미완성·유동성·다양성은 전체의 통일·조화·균형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예술·학문·기술 등에 두루 통했다는 것은 그런 모토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어떤 구분도, 경계도 무의미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하나’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흔히 르네상스를 개인주의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자화상이나 자서전을 든다. 알베르티는 역사상 최초로 자화상을 조각하고, 자서전을 썼다. 그러나 3인칭으로 서술된 자서전은 끝까지 익명으로 유포되었다. 사실 그는 무수히 다른 이름으로 글을 썼고, 심지어 무명으로 쓰기도 했다. 자기 작품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내버려두었고, 완성품이니 결정판이니 하는 것들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서 우리는 강렬한 자기주장과 더불어 지독한 자기은폐를 본다. 자만과 자폐의 공존이다.

그는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다. 게다가 그 가면은 언제나 변한다. 카멜레온처럼. 그는 변화 무쌍, 변환 자재인 인간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나름의 시야와 논리가 있으며 문제를 짚고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그래서 그를 전능의 천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천재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고정된 위치나 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증거한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이란 보통 중세적 신이 아닌 근대적 인간의 가치를 주장한 것이라고 하는데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 말의 기원인 인문학이란 문법·수사·역사·시·도덕이라는 한정된 연구영역을 뜻하나, 이를 곧 휴머니즘이라 하는 것은 지극히 기술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적어도 알베르티를 통해 휴머니즘을 정의한다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즉 고정된 동일 불변의 내용을 갖는 사상 형태가 아니라, 때와 곳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면서도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고와 태도다. 즉 다양성 사이의 끝없는 대화이자, 그러한 대화를 통해 보편성을 추구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 특히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식의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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