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여행도서도 퓨전 바람

  • 표정훈 < 출판칼럼니스트 >

    입력2004-09-16 1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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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준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는 책 혹은 독서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 문화유산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여행에서 문화가 있는 여행, 이른바 테마가 있는 여행으로의 변화를 이끈 것이다. 유교수가 크게 유행시킨,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은 그런 변화를 대변했고, 이후 답사여행이나 문학기행류의 책들이 봇물을 이뤘다.

    사실 여행도서라고 하면 여행안내 도서, 그러니까 교통, 숙박, 식당 등에 관한 실용정보를 담은 안내서와 여행자의 개인적 느낌과 단상이 주를 이루는 여행에세이부터 떠올리기 쉽다. 그런 책들은 생활실용서나 문학서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는 사실상 교양도서 성격이 짙은 여행도서들이 많이 나왔다. 문학, 사상, 사회, 역사 등이 자연스레 녹아든, 여행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오히려 여행지의 문화·사회·역사적 배경이 내용의 주조를 이루는 책들이다.

    테마 있는 여행서 뜬다

    최근 출간된 책으로 김현종의 ‘유럽인물열전’(전 2권, 마음산책)이 있다. 저자가 ‘마피아의 고향’인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서 겪은 에피소드 하나. 나폴리의 작은 호텔 사장으로부터 친절한 도움을 받은 저자가 고마움을 표하며 “당신이 보스냐”고 묻자 그 사장은, “유일한 보스는 알뿐이다!”고 답한다. 여기서 사장이 말한 ‘알’은 다름 아니라 나폴리 이주민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다. 저자에 따르면 마피아의 행동양식은 고대 로마군단에서부터 유래한 가부장적 시스템의 미국판 폭력 버전이다.

    베니스에서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과 착한 상인 안토니오를 불러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들려준다. 당시는 대금업이 무척 발달했지만 금융소득이 정당한 이자소득으로 취급받지 못해 샤일록이 도둑 같은 불로소득자로 묘사됐다는 것, 재판에서 이긴 안토니오가 판사에게 거액의 현금을 주려 한 것도 당시 횡행한 금권재판의 한 단면이라는 것, 동방세계가 묘사되지 않은 것은 베니스가 동방무역에 실패,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것, 그래서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베니스에 도착했을 때 베니스는 저항 한번 못한 채 손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1895년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는 촬영기 개발에 착수했다. 아버지 앙투안은 그림을 그리다 사진작가로 전업한 케이스. 아버지는 정지된 사진을 찍고 아들들은 활동사진을 찍었다. 부자는 사진 건판 생산공장을 세워 유럽에서 가장 큰 사진판 공장을 운영했다. 아들들이 사업 기반을 닦은 바로 그 해에 아버지는 파리에서 열린 토머스 에디슨의 활동사진 영사기 전시회에 초청받아 영화의 원리를 처음 접하게 됐다. 사진가였던 그는 리옹으로 돌아와 이 신기한 기계를 아들들에게 설명했다.”

    영화사를 다룬 책의 일부처럼 보이는 위 인용문은 저자 김현종씨가 리옹에서 영화의 역사와 만난 결과다. 영화 카메라 겸 영사기 발명가로서 영화의 시조로 불리는 뤼미에르 형제에 관한 저자의 지식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무척 다양한 분야의 역사 지식과 만날 수 있다.

    한편으로 여행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술과 함께 결과적으로는 인생을 통찰하게 해주는 내용의 책들도 최근 각별히 눈길을 끈다. 폴 서로우와 함께 영미권 최고의 여행작가로 불리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책은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사고뭉치 친구와 함께 도전한 저자의 체험을 담았다. 총 3360km에 달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백두대간의 10배 정도나 된다. 1500m가 넘는 봉우리만 350개를 넘어야 한다. 논스톱 종주에도 6개월 이상 걸린다.

    40대의 어느날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저자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비만으로 전과까지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과 함께 길을 나선다. 두 사람이 좌충우돌하는 종주길은 크고 작은 사고의 연속이다. 게으르고 나약한 종주 파트너가 저지르는 실수와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계속되지만, 두 사람은 산행이 결국 삶을 배우는 과정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결과적으로 종주엔 실패하지만, 두 사람은 삶과 화해하는 법을 배운다.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은 인문교양서 성격이 다분한 것이지만, 최근에는 여행을 소재로 한 처세 실용서도 나왔다.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내 인생을 바꾼 스무살 여행’(작가정신)이 바로 그런 책이다.

    트레이시는 1965년 9월 단돈 300달러를 들고 친구들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를 출발한다. 이후 중고 자전거를 구입해 하루 종일 페달을 밟으며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을 지난다. 아프리카 모로코를 지나고 사하라사막을 넘어 종착지인 남아프리카에 도착한다. 꼭 1년이 걸린 악전고투의 여행. 돈이 떨어져 막막해 하기도 하고 의견충돌로 친구들과 헤어지기도 한다. 차가 고장나 사막에서 히치하이킹도 했다. 하지만 어려운 여행을 마친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돼 있었다. 고교를 중퇴한 저자는 뒤늦게 공부에 뜻을 세워 무역학 학사와 MBA를 땄고 철학, 경제학, 역사학, 경영학 등을 공부했다. 지금은 성공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활동중이다.

    이 책의 특징은 ‘사하라에서 배운 성공원칙’이란 부제에서 가늠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저자와 친구들의 여행을 계획과 준비에서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자세히 기술한 책이지만, 각 꼭지 마지막엔 일종의 처세훈이 수록돼 있다. 예컨대 여행이 난관에 부딪혀 다른 사람들이 만류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이런 처세훈을 적어놓았다.

    “가까운 친척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 때문에 당신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 당신이 세운 목표의 가치를 올바로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다른 사람은 언제나 다른 관점에서 보기 마련이다. 그들은 호의를 갖고 비난하지만, 당신의 목표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고 신중히 검토해야겠지만,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질 사람은 결국 당신뿐이란 사실을 명심하라.”

    이쯤 되면 이 책이 평범한 여행도서가 아니라 여행도서의 겉모습을 지닌 처세 실용서임을 알 수 있다. 처세 실용서로서의 여행도서와 대극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만한 여행도서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여행은 뒷전’이고 저자의 교양과 지식, 지적인 감수성을 유감없이 풀어놓는 책이다. 이 글 첫머리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인용했는데, ‘앎’이 ‘봄’을 압도하는 그런 책으로 김화영 교수(고려대 불문학과)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城)’(문학동네)이 있다.

    ‘김화영 예술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30여 년 전의 것부터 최근 것까지 유럽과 인도, 아프리카 여행 후 써둔 글들을 한 권으로 모았다. 불문학자의 예술기행인 만큼 아무래도 프랑스와 유럽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냥 ‘고급 에세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루앙 대성당에 대해 김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이 성당의 역할은 중요하다. 레옹은 ‘난생 처음 여자를 위하여’ 제비꽃 한 다발을 사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엠마를 기다리는 레옹의 상상을 빌려 성스러운 대성당 내부를 ‘거대한 규방’으로 탈바꿈시켜 놓는다. 그같은 시선 속에는 플로베르의 매서운 반교권주의적 풍자가 깃들여 있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그의 ‘마담 보바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김교수의 기행에 동참하기가 무척 힘든 게 사실이다. 요컨대 이 책은 ‘아는 만큼 읽히는 책’에 속한다. 유례를 찾는다면 다작의 저술가이기도 한 김윤식 교수(전 서울대 국문학과)의 101번째 저서인 ‘김윤식 문학기행’(문학사상사), 전영애 교수(서울대 독문학과)의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문학과 지성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떠나는 가상여행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여행도서의 범위는 넓어지고 있다. 그 성격도 매우 다양해졌다. 여행도서란 말로 묶기엔 무리라는 느낌이 들 만큼 다른 분야와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여행도서의 주종을 이루던 여행지 정보 안내서는 인터넷을 통한 여행정보 입수의 편리함으로 인해 다소 위축된 느낌마저 있다. 여행도서의 평가기준은 더 이상 실용적 기능성에만 있지 않다.

    물론 도서 장르의 이런 퓨전화 현상은 비단 여행도서 분야만의 일은 아니다. 예컨대 역사 인물의 리더십을 통해 오늘날의 기업경영 환경에 적합한 리더십을 발굴해내는 내용의 책들, 역사와 처세 실용서의 경계를 넘나든 책들이 유행의 물결을 탄 적도 있다. 결국 도서 장르의 전반적인 퓨전화 현상에서 여행도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최근 여행도서의 또 하나 특징은 실제 여행을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여행이 된다는 점이다.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다림’과 비슷하다. ‘떠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여행도서’니 말이다. 독서의 차원에서 본다면, 읽고 떠나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읽는 것 자체가 떠남이 되는 독서, 일종의 가상 여행(virtual tour)으로서의 독서가 점점 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광고 문구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를 이렇게 바꿔도 좋지 않을까. ‘열심히 일한 당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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