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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사업가로 성공한 70년대 통기타 문화의 기수 이장희

“여자도 마약도 대자연만큼 날 사로잡진 못했다”

  •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byeme@donga.com

재미 사업가로 성공한 70년대 통기타 문화의 기수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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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얼굴, 작지만 다부진 체구, 잘 울리는 목소리가 인상적인 ‘동생’은 일세를 풍미한 싱어송라이터 이장희(55)다.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그 애와 나랑은’ ‘자정이 훨씬 넘었네’…, 이런 당대의 히트곡들을 짓고 불렀다. 정미조의 ‘휘파람을 부세요’,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 록그룹 ‘사랑과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같은 노래들도 그의 작품이다.

1970년대, 콧수염과 오토바이가 트레이드마크인 이 ‘시건방진’ 청년에게선 파격과 재기가 넘쳐흘렀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이런 ‘되도 않는’ 가사들을 조영남으로부터 음치 판정을 받은 느적느적한 목소리로 잘도 읊조리고 다녔다. 그는 가요 가사에 언문일치를 도입한 최초의 가수였다.

이장희는 또한 라디오 스타였다. 한국의 사오십대라면 1970년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을 기억할 것이다. 주철환 이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도 한 글에서 “공부가 지겹던 수험생 시절 한밤에 라디오를 틀면 늘 거기 그가 있었다. ‘In the year of 2525’라는 시그널 음악으로 시작되던 그 프로그램을 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1980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현재 LA ‘라디오코리아’ 그룹 대표다. 1992년 LA폭동 당시 ‘라디오코리아’는 단연 돋보이는 활약으로 교민사회의 구심점이 됐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이장희 앞에서 맞장구인지 딴죽 걸기인지 모를 말을 툭툭 던지고 있는 이는 가수 조영남(57)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영남이 강문고등학교 1학년, 이장희가 서울중학교 2학년생일 때 일이다.

“그때 우리집에 아버지 이복동생, 그러니까 삼촌이 같이 살고 있었거든요. 영남이형은 우리 삼촌 학교 친구였어요. 어느 날 오후 집에 들어갔는데 웬 쬐그만 고등학생이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구요. ‘마이 베이비…’ 뭐 그렇게 나가는 팝송이었는데, 전 너무 놀라 졸도하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충격적으로 좋은 건 세상에 나서 처음 봤거든.”

조영남의 ‘졸도할 만큼 멋진 노래’는 탐험가가 꿈이던 말없는 소년을 단박에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인연은 화려한 무교동 ‘쎄씨봉’ 시절을 거쳐 고달픈 미국 생활, 머리칼 히끗해서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만큼은 양보가 없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장희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콧수염도 밀어버렸다. 독재의 검열과 마리화나의 회색지대, 애증의 폭풍을 뚫고 그가 안착한 곳은 돌과 별과 바람의 세계다. 자유 앞에 거짓 없는 삶이 고팠던 이 사내는 인생 55년에 무엇을 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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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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