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독자의 뇌 유린하는 ‘겸손한 천재’의 상상력

베르베르 전문번역가 이세욱의 베르베르 이야기

  • 이세욱·번역가 jeromesulee@hanmail.net

    입력2002-10-08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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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의 뇌 유린하는 ‘겸손한 천재’의 상상력
    작년 11월 초의 일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웹사이트 홈페이지에 이례적인 감사의 메시지가 실렸다.

    “저의 신작 ‘뇌’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문학상 시즌에 출간되어 여러 문학상 수상작과 후보작을 누르고 수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입맞춤을 보냅니다.”

    그의 소년 같은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런데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 메시지를 보고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작가는 그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못 해봐서 한이 맺혔나보군’ ‘대중적인 인기에 굉장히 연연하는 작가로군’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베르베르는 ‘뇌’가 출간되기 전에도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바 있다. 비록 한 주간에 그치기는 했지만, ‘천사들의 제국’으로 1위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런 베르베르가 왜 ‘뇌’의 성공에 그토록 솔직하게 기쁨을 드러냈던 것일까.

    베르베르의 승부수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작가들이 문학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랑트레(rentre)’라는 시기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랑트레란 7, 8월의 바캉스 시즌이 끝나고 일상적인 활동이 재개되는 시기를 말한다. 학교로 말하면 개학이고, 기업이나 상점으로 말하면 업무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시점이다.

    문단과 출판계에도 랑트레가 있다. 9월 초에서 11월 초에 이르는 두 달 남짓한 기간에 프랑스 신간 소설의 대부분이 출간된다. 프랑스 사람들이 1년 동안 읽을 새로운 소설들이 두 달 사이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올해의 경우 이 시기에 약 700종의 소설이 출간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관행은 공쿠르, 페미나, 르노도 등 주요 문학상 수상작들이 11월 초에 발표되는 오랜 전통과 맞물려 있다.

    프랑스 문단의 랑트레는 말하자면 작가와 출판사들이 문학상을 놓고 한바탕 레이스를 펼치는 시기인 셈이다. 그래서 문학상 경쟁에 뜻이 없는 작가들이나, 신작의 홍수 속에 자기 작품이 묻혀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 작가들은 이 시기를 피해서 책을 내는 게 상례다.

    9월 초에 프랑스 문단의 거물 필립 솔레르스가 소설 ‘연인들의 별’을 출간했다고 해서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솔레르스가 공쿠르상에 욕심을 내고 있다”면서 그의 수상여부가 이번 랑트레의 최대 이슈가 될 것이라고 점치기도 한다. 솔레르스 자신은 “공쿠르상을 받기에는 내 경력이 너무 무겁다”며 짐짓 점잔을 빼고 있지만, 프랑스 문단과 출판계에서는 그가 9월에 ‘연인들의 별’을 출간한 것을, 문학상 경쟁에 참여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솔레르스와는 이유가 달랐겠지만, 베르베르도 지금껏 문학상 시즌을 피해서 책을 내왔다. 자신의 문학세계가 문학상을 다투는 전통 장르와 거리가 멀다는 인식도 있었을 것이고, ‘현대사회에서는 과잉 출판이 곧 검열’이라는 우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엔 문학상 심사 결과가 한창 발표되고 수상작들이 베스트셀러로 급부상하는 시기에 신작 ‘뇌’를 출간했다. 자칫하면 언론으로부터 떠들썩하게 각광받는 문학상 수상작들에 치여 빛을 못 볼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베르베르 자신도 내심으로는 그 점을 적잖이 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승부수가 적중했음을 보여줬다. 소설 ‘뇌’는 출간 1주 만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기세를 올리더니, 이후 몇 달 동안 공쿠르 수상작 ‘붉은 브라질’과 수위 다툼을 벌이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러니 스스로 프랑스 문단의 ‘아웃사이더’로 규정했던 베르베르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올해 초, 프랑스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종합주간지 ‘렉스프레스’는 지난해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읽힌 작가들 몇 명을 초청해 축하행사를 가졌다. 베르베르는 미셸 우엘베크, 카트린 밀레, 장 크리스토프 뤼팽 등과 함께 이 행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다른 참석자들과 베르베르를 비교해보면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미셸 우엘베크는 ‘소립자’라는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 책만 냈다 하면 온 신문과 방송이 크게 다뤄주는 하이퍼 미디어제닉이고, 카트린 밀레는 프랑스 문단의 최고 권력 ‘솔레르스 사단’의 지지를 얻으며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카트린 M의 성생활’의 저자이며, 장 크리스토프 뤼팽은 소설 ‘붉은 브라질’로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다. 요컨대, 이들은 열렬한 찬사든 냉혹한 비판이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에 힘입어, 또는 문학상의 권위를 등에 업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작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서 베르베르는 평단이나 언론으로부터 화려한 조명을 받은 적이 없다. 베르베르가 7년 동안 과학부 기자로 일했던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지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지면을 할애해주고, 몇몇 주간지나 지방신문에서 간간이 큰 기사를 실어주긴 했지만, 중앙의 유력 일간지들은 대체로 그에게 냉담했다. ‘르 몽드’ 같은 신문은 뒤늦게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뇌’가 나온 지 몇 개월이 지난 올 3월에야 처음으로 한 면 전체를 그에게 할애하며 특별한 대접을 해줬다.

    한번은 베르베르에게 프랑스 문단이나 언론이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먼저 자기 소설 장르의 특수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과학적인 정보와 추리 기법과 철학적인 내용을 융합한 자신의 소설은 기존의 장르 구분법으로는 SF, 추리소설, 일반소설 등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평론가도 자기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새로움’을 알아주지 않는 프랑스 문단의 보수성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프랑스 문단이 말로는 늘 새로움을 강조하면서도, 상상력도 빈곤하고 이야기도 없는 소설을 양산하고 있을 뿐, 과학과 소설을 결합하려는 자신의 새로운 시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아웃사이더’는 이젠 옛말이 됐다. 예전에 가끔 그는 자신에 대한 프랑스 평단의 무관심을 염두에 두고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법”이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어떤 권위나 인맥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쌓아온 베르베르의 성채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우뚝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필자는 그의 웹사이트 홈페이지에 실린 자축과 감사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당신은 기뻐할 자격이 있다’고.

    베르베르는 이따금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펼쳐 보이는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들 때문에 그런 별명이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난 7월 그가 서울에 왔을 때 한 여성지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부르던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아이처럼 웃으면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겸손한 천재다. 나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으니까”라고 답했다. 농담으로 받아넘기긴 했지만, ‘천재’라는 소리가 그다지 싫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특별한 정신적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기보다 ‘자기의 천분(天分)을 일찍부터 알고 그것을 계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니는 부정적인 측면, 예컨대 심리적 불안정성, 과민성, 모순성 같은 것을 그에게선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베르베르는 1961년 9월18일 프랑스 툴루즈의 한 유태인 중산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랑수아 베르베르는 나치 군대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그들의 유태인 사냥을 피해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나중에 미군 기갑부대 공병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엔지니어였고, 어머니 셀린은 마치 안네 프랑크처럼 2차 세계대전 동안 줄곧 벨기에의 한 은신처에서 숨어 지낸 피아니스트였다.

    어린 시절의 베르베르는 새집 모으기, 볼펜 껍질로 비행기 만들기, 열쇠고리 수집 등을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공부나 운동, 예술 분야 어디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려서부터 예술을 즐기는 법을 배운 것은 확실하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6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고,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해서 어른들로부터 장차 화가가 되리라는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이때부터 몸에 밴 예술 취향은 오늘날 그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그는 이따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피아노를 치면서 기분을 바꾸기도 한다).

    베르베르의 어린 시절에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일찍 깨달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프랑스의 여류 언론인이자 정치가, 작가인 프랑수아즈 지루는 최근에 낸 자서전 ‘행복’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인생을 그르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스무 살 나이에, 좋아하는 거라곤 춤추는 것과 날개 펴고 날아오르는 것이 고작일 아직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기의 진정한 천분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어렴풋한 욕망, 막연한 야심, 모순된 혹은 거부된 욕망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베르베르는 대단한 사람이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까 말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친구들과 장난치고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이 더 즐거웠다고 한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자기가 진정 행복하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첫 단편소설 ‘벼룩의 모험’을 썼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발에서 시작하여 바지와 팬티와 셔츠 속을 지나 머리까지 가면서 인체를 샅샅이 탐험하는 벼룩의 이야기라고 한다(어떤 인터뷰에서 이 얘기를 들은 우리나라의 한 신문기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원고를 아직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베르베르는 “어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아주 자신있게 대답했다. 필자는 언젠가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이 원고를 보여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먼 훗날에 그의 전기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베르베르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과학과 발명에 대한 열정이다. 중학교 시절에 그는 전자공학과 모형 비행기, 마야 문명, 이스터 섬의 석상(石像)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천문학에도 심취하여 툴루즈 천문학센터에서 정기적으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했다. 그러나 과학을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고등학교에서 이과에 들어가는 데는 실패했다. “암기력이 워낙 좋지 않아서 수학 공식을 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에 비춰 보면, 과학에 대한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진로지도 교사들은 베르베르의 수학성적 때문에 그가 문과 쪽에 더 적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과학에 대한 애정을 계속 키워 나갔다. 그의 탈출구는 과학소설과 발명이었다. 그 무렵에 그는 쥘 베른의 소설을 탐독했고, 고교 시절에는 아이작 아시모프, 프랭크 허버트, H. G. 웰즈에 심취했으며, 스물한 살 때는 미국 작가 필립 K. 딕을 발견하고 그의 작품들을 자기 글쓰기의 전범(典範)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글쓰기와 과학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법과대학을 중퇴하고 파리 고등언론학교에 진학했으며, 언론학교에서도 동기생들 중 유일하게 과학부 기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글쓰기와 과학이라는 두 갈래의 지향은 개미라는 곤충을 통해서 행복한 접점을 만난다. 베르베르가 개미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쓴 것은 고교 시절 ‘유포리(Euphorie)’라는 신문을 만들 때였다. 그가 파브리스 코제라는 친구와 함께 창간한 이 고교생 신문은 지면의 30%가 학교생활에 관한 기사로, 나머지 70%는 만화로 채워졌다.

    여기에 실린 만화는 여느 만화와 달리 음악이 딸리고 분위기에 맞게 향기가 배어나는 베르베르의 발명품이었다. 베르베르는 시각, 청각, 후각을 동시에 사용해서 즐기는 만화를 만들기 위해 만화의 중간중간에 갖가지 향료를 묻힌 가느다란 종이 오리를 붙여놓았고, 만화를 읽으면서 들어야 할 음악을 표시해놓았다. 만화는 코제가 그렸고, 베르베르는 시나리오를 썼다.

    개미와 베르베르의 인연은 이 만화를 위한 7쪽짜리 시나리오에서 시작된다. 여왕개미가 개미세계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 변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의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베르베르는 진짜 개미들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베르베르는 개미를 소재로 장편소설을 써보리라 결심하고, 매일 4시간씩 글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언론학교를 나와 과학부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그 원칙을 충실히 지키면서 개미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개미집을 집안에 들여앉혀 개미의 생태를 정밀히 관찰했고, 언론단체의 기금을 받아 아프리카 마냥개미를 탐구하러 갔다가 개미떼의 공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개미군단’, 국경을 뛰어넘다

    베르베르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해보려고 노력했다. 쓰고 또 쓰기를 되풀이하는 치열한 절차탁마의 세월이 이어졌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지 13년, 자기 책을 받아줄 출판사를 찾아나선 지 6년 만에 마침내 그의 첫 소설 ‘개미’가 세상에 나왔다. 되도록 완벽한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허물었다가 다시 짓기를 120번이나 거듭한 보람이었다(“소설을 그렇게 많이 고쳐 쓴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작업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 독자들이 더러 있다. 베르베르의 설명은 이러하다. 그는 한 작품을 쓸 때마다 다수의 버전을 만들고, 각 버전에 번호를 매긴다. 이 번호는 ‘B-5’ ‘P-63’ 하는 식으로 문자와 숫자로 이뤄져 있다. 그의 수정 작업은 대략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먼저, 플롯을 변경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버전 번호의 문자가 바뀐다. 다음은 문체와 장면에 변화를 주는 경우다. 이때는 버전 번호의 숫자가 바뀐다. 따지고 보면 그의 퇴고 작업은 완전히 허물었다가 다시 짓는 비능률적인 작업이 아니라, 최선의 버전을 찾아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소설 ‘개미’의 최종 버전 번호는 ‘Z-53’이다).

    베르베르는 개미집으로 들어가는 구멍만큼이나 좁은 문으로 프랑스 문단에 등장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되, 개미군단이 그에게 안겨준 성공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평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기성 문단의 ‘따분함’에 질린 프랑스의 젊은 독자들과 여성 독자들이 특히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의 개미군단은 자기들을 위해 대서사시를 써준 베르베르의 은혜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프랑스 국경 안에 머물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줬다.

    베르베르가 ‘개미’를 발표한 것이 1991년 3월이니까 이제 그가 작가로서 활동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 동안 그는 ‘개미’ 3부작(제1부 ‘개미’, 제2부 ‘개미의 날’, 제3부 ‘개미혁명’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5권으로 간행됐음)을 비롯해 ‘타나토노트’ 3부작 중의 두 편(제1부 ‘타나토노트’와 제2부 ‘천사들의 제국’), 인간 탐구 3부작 중의 두 편(제1부 ‘아버지들의 아버지’, 제2부 ‘뇌’) 등 모두 7편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밖에 그의 여러 소설에 실렸던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으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과 그것의 증보판인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독자가 주인공이 되어 4원소의 세계를 여행하게 한다는 독창적인 발상의 산물인 ‘여행의 책’ 등도 출간했다.

    첫 작품의 산고(産苦)가 매우 길었던 것에 비하면 일단 전업작가가 된 뒤에는 아주 순조롭게 작품활동을 해온 셈이다. 물론 ‘아버지들의 아버지’나 ‘뇌’ 같은 과학소설은 과학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부터 구상하고 준비해온 것이므로 위의 모든 작품이 10여 년 동안에 쓰여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베르베르가 발표한 소설들은 제재(題材)나 기법의 측면에서 크게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개미’ 3부작에서 ‘아버지들의 아버지’를 거쳐 최신작 ‘뇌’로 이어지는 과학추리소설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타나토노트’에서 ‘천사들의 제국’으로 이어지는 환상모험소설 계열이다(‘여행의 책’도 일종의 소설이라고 본다면 이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과학추리소설 vs 환상모험소설

    첫번째 계열에 속한 작품들은 인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과학적 발견이나 작가의 아이디어를 극적인 반전의 중심에 배치하고, 그보다 작은 아이디어나 과학 정보들을 작품 전체에 골고루 안배한 과학소설이자, 작품 앞부분에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을 제시하고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주요한 플롯으로 삼은 추리소설이다.

    베르베르는 이런 계열의 작품들을 쓸 때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중대한 과학적 발견을 설정하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알려지는 대반전의 대목을 먼저 써놓은 다음 나머지 부분을 써나간다고 한다. 처음부터 생경한 과학 정보로 충격을 주기보다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현실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낸 다음 작은 정보들을 적절하게 제공하면서 이야기의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는 전략이다.

    그 전략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수수께끼, 유머 등 많은 요소들을 동원하고, 과학자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얻은 새로운 정보들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버전을 시도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그의 작품들은 ‘즐기면서 배울 수 있게 하는 소설’, ‘다 읽고 나면 뭔가 얻었다는 뿌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두번째 계열에 속한 작품들에서는 과학적인 정보보다는 기발한 상상력과 작가의 직관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임사(臨死) 체험자들의 증언에서 영감을 얻고 세계의 많은 신화들을 연구하면서 구상됐다는 ‘타나토노트’는 사후 세계의 신비를 밝히려는 ‘영계(靈界) 탐사자’들의 이야기다. 줄거리만 들으면 황당무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베르베르는 웅대한 상상력과 동서고금에 걸친 신화학적 정보, 정교한 서스펜스의 힘으로 한 편의 독특한 서사문학을 이뤄냈다(필자가 만난 베르베르 독자들 중에는 이 작품을 ‘개미’나 ‘뇌’보다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베르베르의 작품 가운데 유독 이 소설만 비교적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기독교나 유대교의 사후 세계관을 융합한 이 소설은 죽음의 문제에 관한 깊은 사색을 유도하고,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타나토노트’는 천사들의 위치에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그린 ‘천사들의 제국’으로 이어졌고, 내년 10월에는 천사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추적하는 ‘신들의 왕국’을 통해 3부작이 완성될 것이다.

    위에서 베르베르의 소설을 편의상 두 계열로 나누어 거칠게 비교했지만,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다. 베르베르는 최근 들어 자기 소설에 대해 철학과 사이언스 픽션을 결합한 ‘필로조피 픽션(Philosophie-fi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 베르베르가 필립 K. 딕의 과학소설을 일컬을 때 사용하던 용어를 자신의 작품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 작품에 철학적 깊이가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일 수도 있고, 앞으로 그런 작품을 쓰겠다는 작가적 야심의 표출일 수도 있겠다.

    ‘개미’를 출간한 뒤로 몇 년 동안 베르베르에게는 언제나 ‘개미 작가’ ‘개미 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그를 소설가가 아니라 곤충학자로 알고 있는 프랑스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소설 ‘개미’를 통해서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개미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세상이었다고 강조했다. 그가 원래 예정되어 있지 않던 2부와 3부를 잇달아 쓴 것도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품은 ‘타나토노트’라고 선언함으로써 ‘개미’의 열렬한 팬들을 실망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애써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천사들의 제국’이 ‘개미’를 능가하는 베스트셀러가 되고(우리나라에서 ‘천사들의 제국’이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뇌’가 다시 그 기록을 깸으로써 ‘개미’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자연스럽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가 다양한 시각에서 인간 세상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점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개미’ 3부작이 현미경적 세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대화라는 문제를 다룬 소설이라면,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은 천체망원경적 관점에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다.

    게다가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뇌’를 거쳐 또 다른 작품으로 이어질 3부작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이 ‘인간탐구 시리즈’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고생물학적 추리소설이라면, ‘뇌’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 신경학과 정신의학, 컴퓨터공학,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호메로스의 서사시 등을 활용한 작품이다. 이 3부작의 나머지 작품은 당연히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교양의 온상’이라는 TV 독서 대담 프로그램으로 프랑스 독서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베르나르 피보(지난 여름에 KBS의 ‘TV, 책을 말하다’ 50회 특집방송에서 ‘독서의 왕’으로 소개된 바 있다)가 ‘개미혁명’이 출간된 1996년에 처음으로 베르베르를 자기 프로그램에 초청한 적이 있다. 그때 피보의 첫마디는 “당신은 한국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다던데, 참 놀라운 일이군요”였다. 그 자리에서 베르베르는 한국 독자들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이야기했고, 자기를 온전하게 이해해준 한국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한국은 베르베르에게 특별한 나라다. 조국 프랑스보다 자기를 먼저 알아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려고 애썼다. ‘최지웅(베르베르 작품의 한국어판 출판사인 열린책들 홍지웅 사장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한국계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했고, 우리 문화에 관한 약간의 지식을 소설 속에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소설에 서문을 싣지 않는 관행을 깨고 한국어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번에 방한했을 때도 한국 일정에 맞추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일정을 변경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만일 기자나 독자들이 ‘오 필승 코리아’라는 노래를 불러보라고 부탁했다면, 그는 서툰 발음으로나마 기꺼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기자회견 직전까지 열심히 연습했는데, 아무도 청하는 사람이 없어 아쉬웠다). 그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한국팀의 경기는 거의 다 봤다고 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벌인 8강전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제는 조국 프랑스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베르베르지만,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조금도 변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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