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역사와 자연이 빚는 이중주, 환경사

  • 글: 표정훈 / 출판칼럼니스트 medius@naver.com

    입력2002-11-05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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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자연이 빚는 이중주, 환경사
    역사란 인간이 지내온 내력 자체 또는 그것을 기록·정리·연구하는 일과 그 성과를 말한다. 그런데 ‘고려사’ 천문지(天文志), ‘한서’ 천문지를 비롯하여 전통사회의 역사는 인간의 일이 아닌 하늘의 일, 즉 자연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놓은 문헌을 포함한다.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원형인 ‘사기’의 편찬자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대를 이어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지냈다. 태사령은 사관으로서 역사 기록의 임무는 물론 천문·역법까지 관장했다. 요컨대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을 모두 기록·정리했다.

    전통적인 역사가 하늘의 일, 자연의 일까지 포함했던 것은 그것이 사람의 일과 불가분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재이설(災異說), 그러니까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군주의 덕이 모자라면 하늘이 재이를 통해 경고한다는 관념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연의 내력, 인간의 내력

    이런 관념에 대해 오늘날의 학자들은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고 평가한다. 인간적인 가치관념을 자연에 투영시킨 비합리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근대 이후 탈인간화한 자연은 철저하게 자연과학의 영역이 됐고, 역사는 오로지 인간이 지내온 내력에 한정됐다. 그리고 자연의 내력은 자연사(Natural History), 역사 기후학, 고생물학, 진화생물학, 지질학, 생태학, 천문학 등이 다루는 주제가 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연의 내력과 인간의 내력이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았음은 물론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학문적 인식이 환경사(環境史)란 이름으로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물론 재이설로 대표되는 전통사회의 천인(天人) 상관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환경사라고 하면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에 대한 연구, 그러니까 자연을 대상으로 한 과학적 연구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환경사는 인간과 자연간 상호작용의 측면에 주안점을 둔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나무가 국가나 문명의 흥망성쇠를 좌우했음을 말하는 존 펄린의 ‘숲의 서사시’(따님)를 보면 이해가 쉽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나무를 토대로 문명을 꽃피웠지만 숲이 사라지자 무너졌다. 에게해의 작은 섬 크레타는 메소포타미아인들과 나무 교역을 해 얻은 부로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숲이 고갈되자 쇠퇴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오랜 전쟁은 함대 유지에 필요한 재목을 누가 확보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헬레니즘 세계 변방의 도시국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국가들이 마케도니아 삼림에 의존하게 되면서 지중해의 강자로 떠올랐고, 급기야 알렉산더 대왕의 정벌도 가능했다.

    신대륙에 대한 영국의 각별한 관심과 미국 독립전쟁도 나무와 상관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대영제국 해군의 거대한 주력 전함에 필요한 돛대는 지름 1m, 길이 25m의 거목으로 만들어졌다. 북유럽산 돛대 재목을 네덜란드가 통제하기도 했거니와, 북유럽 삼림에서 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군수 물자로 나무를 확보하려는 영국과 미국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곧 미국 독립전쟁의 배경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 환경 재앙의 배경에도 삼림 남벌이 자리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얼마전 태풍 ‘루사’가 우리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추진한 개발 탓에 흙더미가 무너져내려 피해가 더욱 늘어났다. 앞으로 그런 재앙이 해마다 거듭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마저 들린다. 이렇듯 기상 재앙은 단지 하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서 저지른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환경사 분야의 고전적 저작으로는 텍사스대학 명예교수이자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환경과 역사 연구 총서’의 책임 편집자인 앨프리드 W. 크로스비의 ‘생태제국주의’(지식의 풍경)가 있다. 저자 크로스비는 “유럽의 팽창은 신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정복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다른 발전단계에 있는 생태계 사이의 만남과 경합으로 유럽의 팽창을 설명한다.

    이를 위해 크로스비는 생태계의 주요 구성요소로 인간, 인간과 같이 사는 동물들, 인간에게 질병을 가져다주는 병원균과 미생물, 그리고 잡초를 비롯한 식물 등을 거론한다. 크로스비에 따르면 이런 구성요소들 사이의 경합, 즉 유럽인들이 새롭게 정복해 이주한 땅의 토착종들과 구세계(유럽)의 잡초, 동물, 병원균, 미생물의 경합에서 생명력이 훨씬 강한 유럽 고유종들이 토착종을 몰아냈다.

    크로스비의 책은 정치적·군사적 차원과는 다른,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제국주의를 보여준다. 유럽인들이 본래 거주하던 곳과 자연조건이 비슷한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익숙한 동식물 및 병균을 이식시키는 과정이 제국주의의 중요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환경사 도서는 아니지만 크로스비와 비슷한 논지를 볼 수 있는 책으로, 생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가 있다. 저자는 인류 문명의 불평등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유럽을 정복하지 않고 유럽 문명이 그밖의 지역을 정복했는지 묻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럽은 발달된 총기와 철기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병원균 또한 유럽의 강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가축에서 기원한 유라시아의 병원균이 총기보다 훨씬 더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비유럽인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럽이 먼저 총기와 철기 문명과 병원균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지능이 뛰어나서? 물론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뉴기니인들이 평균적인 서구인에 비해 지능이 높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이 서구인들에게 정복당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야생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가 가능했던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의외로 깊은 환경문제의 뿌리

    본격적인 환경사 도서로는 ‘고대문명의 환경사’(도날드 휴즈 지음, 사이언스북스), ‘녹색 세계사’(클라이브 폰팅 지음, 심지) 등이 있는데, 1996년에 나온 ‘녹색 세계사’는 아쉽게도 현재 절판 상태다. 환경사 도서와 관련하여 한층 더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환경사를 주제로 한 연구서나 교양서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환경사라는 분야 자체가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현실이 그 원인이라 하겠다.

    한편 우리나라 학자가 내놓은 환경사 연구성과로는 명지대 정철웅 교수(사학)의 ‘역사와 환경: 중국 명·청 시대의 경우’(책세상)가 있다. 저자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던 명청(明淸) 시대에 시행된 산악 개발을 중심으로, 중국 전통사회의 환경문제를 조명한다. 저자는 근대 이전 중국에서도 심각한 환경문제가 발생했음을 밝히는 외에도, 환경문제가 서구의 산업 발전에 의해 갑자기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을 부정한다.

    사실 환경친화적인 동양의 자연관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환경친화적으로 보이는 중국의 자연관도 개발의 논리와 끊임없이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최근에도 해마다 범람 위기에 놓이곤 하는 둥팅(洞庭)호는 명나라 때만 해도 현재 면적(5600㎢)의 두 배였다. 명나라 중기 이후 상류지역에서 무분별한 산지 개발이 진행됐고, 그 결과 토사가 씻겨 내려간 것은 물론 호수 주변의 너른 땅이 논밭으로 개간됐다. 결국 둥팅호 범람 위기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다.

    ‘생각은 지구적으로, 역사적으로’

    환경사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전형적인 학제간 연구분야다. 고대 문헌을 뒤적이는가 싶으면 역사 기후학을 살피기도 하고, 현대 생태학의 연구성과를 원용하는가 싶으면 고고학적 발견 성과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결국 환경사는 이미 언급한 자연과학의 여러 학문 분야에 더하여 인류학, 고전 문헌학, 고고학, 의사학(醫史學), 사상사, 인구학, 인류학 등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연구성과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제반 학문분야의 성과를 역사학적 관점과 생태학적 관점으로 수렴·통합하는 것이 환경사의 관건이다.

    환경사의 유효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환경사는 최근의 전지구적 환경문제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와 교훈을 던진다는 점에서 계몽적 성격이 강하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통감(通鑑), 즉 통시적인 거울이 바로 환경사다.

    둘째, 환경사는 인간 및 인간사회를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자연과 균형·조화를 이루는 대안적 인간관과 세계관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환경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마지막으로 환경사는 동시대성과 공시성(共時性)에 치우친 현대의 다양한 환경론에 역사성과 통시성(通時性)을 보완해줄 수 있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모토로 ‘생각은 지구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말이 있다. 환경사는 여기에 ‘생각은 역사적으로’라는 표현을 추가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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