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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人像’과‘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 글: 구광모

‘友人像’과‘女人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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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人像’과‘女人像’
2002년 2월2일(수) 오후, 필자는 국회도서관에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된 조선어판 ‘朝鮮(조선)’을 읽고 있었다. 월간지 ‘朝鮮’은 조선총독부가 조선통치에 필요한 광범위한 정보 수집과 그 제공을 목적으로 일본어와 조선어로 발간하던 종합 잡지다.

‘朝鮮’ 1930년 2월호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격렬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목차에서 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의 정책논설과 함께 이상(李箱)의 장편소설 ‘十二月 十二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월간지에는 이외에도 조선인의 글로 이능화(李能和)의 ‘朝鮮喪祭禮俗史(조선상제례속사)’와 안확(安廓)의 ‘各國(각국)의 綴字論(철자론)과 한글문제’ 등도 수록돼 있었다. ‘十二月 十二日’은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되었다.

소설 제목 ‘십이월 십이일’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파동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 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에 대해 해괴한 욕설을 퍼부은 작품을 썼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를 향한 기발한 욕설

이상의 생년월일이 1910년 9월23일이므로, ‘십이월 십이일’을 집필한 1930년 2월이면 그의 나이 만 19세 4개월 남짓한 무렵으로 그가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임명된 지 11개월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9개월에 걸쳐, 십이(12), 십이(12)라는 육감(肉感) 진한 우리 욕설을 숫자로 위장해 소설 제목으로 인쇄해놓은 그의 담력과 기발함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12월12일은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인 동시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주인공이 죽을 날이기도 한 동시에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라고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12, 12로 상징되는 욕설과 함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는 그의 소설 속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상은 원래 숫자와 기호를 사용해 그의 생각과 울분을 상징화하는 기법을 많이 활용한 작가라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나의 아버지(具本俊)는 자주 말씀했다. 시 ‘烏瞰圖(오감도)’에 나오는 “13人의 兒孩(아해)가…”가 그렇고, 이상이 ‘제비’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다방도 그렇다. 그 외에도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을 포함해 이상은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다채롭게 숫자와 기호들을 시어(詩語)로 만들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곧바로 국회도서관 1층으로 내려와서 이상에 관한 도서들을 대출 받아 읽기 시작했다. 고도의 지성과 해학과 풍자로 일제를 비하, 야유하고 암울한 현실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한 이상의 외침을 좀더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먼저 이상과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의 관계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이 나의 당숙(堂叔)인 구본웅 화백의 50주기 기일이어서 내가 11세 때인 1952년 46세에 폐렴으로 운명한 그에 대한 추억과 추모의 정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생후 4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던 구화백은 그의 숙모(朴仁淑)인 나의 할머니를 평생 동안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그는 1929년 결혼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 우리 집을 찾았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봄에는 두 달 동안이나 우리 집에 와서 살았다. 당시 아홉 살인 나와 키가 비슷했던 그는 나를 데리고 놀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상의 전기(傳記)를 담은 여러 책에는 구본웅과의 극적 교우관계가 쓰여 있었다. 시인 고은(高銀)은 ‘이상 평전’에서 “꼽추 구본웅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함께 파리 물랭루주의 난쟁이 화가를 방불케 하고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비유되기도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둥근 안경을 쓰고 예리한 감각과 후덕한 입술과 함께 스폰서 기질을 가진 그는 이상과 동세대로서…그를 만나자마자 이상은 특이한 동성애적 우정을 가지고 그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라고 기술했다.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는 ‘李箱硏究(이상연구)’에서 1933년(이상의 나이 23세)의 연보에 “구본웅과 사귐. 금홍과 사귐”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내가 읽은 모든 책은 이상이 구본웅을 처음 만난 때를 1933년경이라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상과 구본웅은 초등학교 동기동창

이상과 구본웅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던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나는 즉각 두 분의 연보(年譜)를 도서관에서 확인해 보았다. 두 분 모두 신명(新明)학교 1921년도 졸업생이 틀림없었다. 나는 당숙의 아들들(具桓謨·相謨·橓謨)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히 그의 셋째 아들은 서산과 신명학교 동기동창인 이상호(李相昊)라는 분으로부터 “우리 셋은 같은 반이었는데 구본웅은 글씨를 잘 썼고 김해경(金海卿·이상의 본명)은 말을 잘했고 나는 공부를 잘했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도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상보다 네 살 많은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초등학교를 다니다말다 하는 바람에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꼽추인 구본웅을 따돌렸다. 그러나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 있었다. 항상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김해경(이상)이었다. 당시에 동급생 중에는 구본웅보다 몇 살이 더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 취급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도 이상은 구본웅에게 계속 존대어를 쓰며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래서 구본웅과 동갑인 이상호가 초등학교 졸업동기인 것은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았지만, 이상과 구본웅이 동기동창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서산 구본웅은 1906년 3월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불행은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었다. 그의 어머니 상산(商山) 김(金)씨는 산후병에 시달렸다. 산후조리를 위하여 그녀의 친가가 있는 황해도 연백으로 구본웅을 데리고 갔지만 그녀는 4개월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래서 구본웅은 동네사람들에게 젖동냥을 다녀야 했고 허약한 체질로 어른들의 애를 태웠다. 그런데 젖을 얻어 먹이고 집에 돌아와서 대청마루로 오르던 하녀 복실이가 등에 업힌 두 살 무렵의 구본웅을 댓돌위에 떨어뜨렸다. 돌 위에 떨어진 그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에 오랫동안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1년이 지나 아버지 구자혁(具滋爀)은 아이의 척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치료를 위해 즉시 서울 본가로 돌아왔지만 구본웅은 곱사등이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구본웅 계모와 이상 부인의 애증 관계

구본웅이 네 살 때 변동숙(卞東淑·1890년 생)이란 분이 계모로 들어왔다. 만 19세의 그녀는 잠사(蠶絲)학교를 졸업한, 당시로는 고학력 인텔리였지만 결혼 적령기에 들었을 때 그녀 집안의 살림이 기울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 하나 있는 양반 출신 부자에게 시집간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가 양육해야 할 아들이 불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변동숙은 잘생긴 용모에 성격이 괄괄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이 뛰어난 전형적인 마님 타입이었지만 남편과 구본웅에 대한 정성은 지극했다.

그녀의 아버지 변국선(卞國璿)은 늦게 첩을 두었다. 본부인 소생이 구본웅의 계모가 된 변동숙이며 소실의 소생 1남2녀 중 장녀가 훗날 이상과 결혼한 변동림(卞東琳 1916년 생)이다. 이런 관계이다 보니 변동림은 26세나 더 많은 이복언니 변동숙을 생래적으로 좋게 대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장인(丈人·변국선)댁 살림을 돕고 있었기에 친정과 이복동생들에 대한 변동숙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변동림이 폐병이 심한 6살 연상의 이상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은 이를 극구 만류했다. 그녀는 이상이 동경으로 갈 때 구본웅이 이상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은 묵인했지만, 이복동생 변동림의 동경 유학을 지원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상이 죽은 후 변동림이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화백과 재혼한다고 했을 때 그에게 본부인이 있는데 첩살이하는 꼴이거나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 아니냐며 변동림의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 정도로 그들의 혼인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흥분한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환기와 동거에 들어갔다. 몇 년 후에 그들은 본부인을 내쫓고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복자매 간의 이러한 애증 관계는 구본웅의 계모와 김환기 화백이 모두 죽은 후 되살아났다. 시인 겸 화가인 김향안이 다시 이상의 부인 변동림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본웅의 계모가 된 이복언니 변동숙을 근거 없이 깔아뭉개는 폭언을 많이 했다. 심지어 1980년대 중반에는 유명문학지에 “언니는 학교에서 낙제를 하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아 어머니가 그것을 말리려 했고 집안의 평화가 언니 때문에 깨진다고 생각되어 나는 언니를 싫어했다”는 기고문을 싣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은 결혼 전에 그녀의 친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결코 친아버지의 소실과 그 자녀들이 사는 집에 함께 기거한 적이 없었다. 나이 차이로 보아도 변동숙이 학교에 다닐 때에 변동림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변동림과 마찬가지로 이복언니 변동숙도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편이었다. 변동숙은 엄청난 소설 애독자로 특히 구운몽, 옥루몽, 삼국지 등은 거의 외울 정도로 수십 번씩 탐독했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곁에서 지켜 보아온 필자도 그녀의 뛰어난 기억력, 유창한 화술은 물론 소설 구절들을 적절히 인용하는 재주가 탁월함에 언제나 탄복할 정도였다. 변동숙은 변동림이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꾼 뒤 더 이상 이복동생을 상면하지 않았고 1974년에 구본웅의 장남인 구환모(具桓謨)의 자택에서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구본웅은 신명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중·고등학교의 전신)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필기시험 결과는 상위권에 들었지만 면접과 사정회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구본웅은 면접시험에서 “우리 학교는 정신적 신체적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최고의 영재들만 선발하고…” 운운하면서 경멸의 눈웃음을 짓던 한 선생님 얼굴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소년 구본웅은 한동안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울분과 좌절, 허탈감에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그는 결국 사립학교인 경신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신고보는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해서 다른 학교들보다 분위기가 자유롭다고 소문이 났었다. 당시 교장선생님 쿤스(한국이름 군병빈)는 장애인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교장선생은 구본웅을 만날 때마다 공부를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린다며 칭찬을 해주었고 항상 자상하게 대했다. 이런 환경에서 구본웅은 매학년 1등을 했다. 학교 공부뿐 아니라 문학서적을 새벽까지 탐독했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YMCA에 있는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에게서 서양화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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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구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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