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 글: 민 들 레(필명)

    입력2002-12-03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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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몇해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던 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처럼 씨(정자)를 받기 위해 낯선 도회지로 원정 나가 비상작전을 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심지 끝에 겨우 불을 붙이듯 어렵게 한 생명체를 내 안에 품게 되었다. 처음 산부인과에서 ‘임신’이란 진단을 받았을 때 내 가슴은 여성이라면, 어머니라면 누구나 느꼈을 환희, 두려움, 신비함에 호흡이 힘들 정도로 쿵쿵 뛰었다.

    산부인과 진료실 칸막이 뒤에 설치된 진찰대 위에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몸을 쭈욱 펴고 누웠다. 의사는 초음파 진단기에 연결된 마우스를 내 배 위에 얹었다. 그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모니터에 아기집 내부가 나타났다. 맨 처음 아기는 희미하게 깜박이는 하나의 점이었다. 검은 화면엔 짧게 끊긴 하얀 실선들이 흐물흐물 움직이고 그 한가운데 좀더 뚜렷한 하얀 점이 있었다. 의사는 그 점을 가리키며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모습은 그대로 한 장의 작은 사진으로 출력돼 내게 주어졌다. 의사는 사진 속 그 하얀 점이 정확히 ×월 ×일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말해줬다. 나는 그 사진을 수첩 비닐 커버 안쪽에 넣고 다니며 보고 또 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나는 내내 상기되었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왠지 모를 허전함으로 내 가슴엔 늘 바람이 휑휑 지나는 것만 같았는데 그 바람이 어느 순간 잦아들고 내 마음은 몹시 바빠졌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일까. 보름 후 다시 병원에 갔을 때 그 점은 작지만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어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의 엄숙함을 내게 아로새겨 주었다. 작은 몸을 웅크리고 내 몸 가장 깊고 은밀한 곳, 그 한없는 고요 속에, 어둠 속에 홀로 생겨나 오로지 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가냘픈 생명.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가진 것 하나 없는 못난 나를 믿고 내 안에 자리잡은 순진무구한 생명체. 나는 이 생명의 보금자리가 돼주어야 한다. 비바람, 눈보라로부터, 온갖 해롭고 사악한 것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생명임을 확인시켜준 이 신비… 내가 무엇인가,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한순간에 깨달은 것만 같았다. 나는 운명에의 외경과 환희를 비로소 실감했다.

    축복 받지 못한 임신

    그러나 나의 임신은 주위로부터 전혀 축복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이 생명에게 가난과 헤어나기 힘든 뿌리깊은 인습의 멍에를 물려주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둠의 한 자락은 이미 병원에서부터 너풀댔다. 지하에 다방, 1층엔 24시편의점이 있는 작은 건물 3층에 자리잡은 산부인과엔 꽤 많은 여성이 들락거렸다. 대기실엔 앳된 얼굴의 십대 소녀부터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대여섯 명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 낙태수술을 받으러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아기가 더 크기 전에 죽여야 할 것 같은, 형체 없고 소리 없는 압박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현재 임신 3주여서 수술을 한다면 보름 이내에 해야 안전합니다.”

    은밀히 다가와 건네는 간호사의 말투는 내게 모종의 선택을 재촉했다. 새 생명의 탄성이 들리지 않는 곳, 날카로운 메스의 금속성 냄새가 지배하는 곳, 그것은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그 느낌이 두려워 나는 병원을 바꾸었다.

    간절히 소망하던 것이지만 내 안에 한 생명체가 오롯이 자리한 것을 안 그 순간부터 나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가족, 친족은 남부끄럽다고 여길 것이다. 십 수년 간 터잡은 직장, 동료들과 맺어진 온갖 관계의 끈은 한순간에 끊어지고 나는 ‘미혼모’로 전락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허울뿐인 듯한 이런 관계는 결국 나란 인간을 규정하는 실체 아닌가.

    그토록 원한 임신이었지만 대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자 나는 많이 흔들렸다. 우선 배가 불러오기 전에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당장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다.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번거롭고 치욕적인 일들을 당하지 않으려면 일단 잠적하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어디로 잠적할 수 있을까. 이제 내 앞엔 어떤 삶이 놓일 것인가. 또 태어날 아기의 삶은…. 일말의 두려움이 잉태의 기쁨을 반감시켰다.

    아기는 날마다 조금씩 자라며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왔다. 배가 고프다 밥을 달라, 호흡이 곤란하다, 맑은 공기를 공급하라, 이런 음식은 먹고 싶지 않다, 다른 음식을 달라, 이런 노래는 싫다, 이런 음악이 좋다 등등. 내 안에 고귀한 생명체를 품고서야 비로소 나는 사람과 사람살이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어머니가 돼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야 했다면 얼마나 허무했을까. 전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일에 쉽게 감정이 흔들리고 무엇보다 눈물이 흔해졌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고 텔레비전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학대받는 아이의 모습이 비치면 금세 눈물이 핑 돌고 콧물이 흘러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와 코를 풀곤 했다. 아, 이 어린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배고플 때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추울 때 따뜻이 품어줄 수 없다면 어쩌나. 문득문득 두려움이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담담히 새로운 삶을 준비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전방위에서 내 안의 생명체를 버리라고 강요했다.

    아기는 처음 현기증으로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렸다. 왠지 모르게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 일하면서 나는 몇번씩 눈을 비벼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마흔을 앞둔 서른아홉 살 때쯤부터 나는 생리 날짜에 조바심쳤다. 조금만 늦어져도, 양이 줄어도 아주 끊겨 폐경이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폐경은 곧 생식능력의 상실을 뜻하고 그것은 영영 2세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 달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활은 기계적이었다. 출근시간 두 시간 전으로 맞춰놓은 자명종 소리에 깨어 간단히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하고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 회사 내 자리, 정확히 말해 책상 한 칸에 앉아 정해진 일을 하고 저녁엔 아침의 역순으로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와 세수하고 밥 먹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이 단조로운 시간표에 따른 생활을 십 년이 넘게 이어왔다. 일에서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나를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공허뿐이었다. 해마다 내게 남는 것은 12장의 월급 명세서뿐이었다. 돈이 무엇이기에 여기까지 왔을까. 회사 업무를 챙기듯 내 자신을 챙기고 보듬었다면 지금 이토록 허허롭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내게도 친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결혼하면서, 아니 내가 결혼하지 않아서 점점 멀어져 일년에 전화 한두 번, 어느 해는 전화연락 한 번 없이 지내게 되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만나면 자녀 이야기, 남편 이야기, 시부모 이야기가 전부여서 나는 늘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서로 공감할 부분이 없는 만남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마련이어서 결국은 나가지 않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우들은 입사 2~3년차가 되면 어김없이 결혼 청첩장을 돌리고 정확히 일년 후 득남이니 득녀니 게시판에 붙이고 백일잔치 돌잔치로 이어졌다. 물에 기름 겉돌 듯 결혼하지 않은 나는 언제 어디서고 외롭고 쓸쓸했다. 내 모습은 영락없이 승자만이 사랑을 나누고 그 씨를 이어가는 동물의 세계에서 거세된 수사자였다. ‘그래, 남이 저렇게 열심히 씨를 퍼뜨리고 기르니 나까지 나서지 않아도 인류의 씨가 마르지는 않으리라’ 냉소로 일관하며 위안을 삼았지만 허전하고 외로운 건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마흔이 넘도록 남들 다 하는 결혼을 못했을까. 결혼은 정말 짚신도 짝이 있다는 옛말처럼 자연현상일까. 이대로 살다보면 나머지 한 짝의 짚신이 내게 와서 청혼하게 될까. 마흔이 넘으면서 나는 이대로 나의 짚신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험관 아기는 싫다

    결혼과 상관없이 생식기능이 살아있을 때 나의 2세를 얻자는. 물론 이 사회는 이런 결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았았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다. 개인적 갈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그러나 나는 내 갈망이 절도나 사기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면, 규범을 지키기보다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 나의 소망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성욕을 포함하는 사랑이, 배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 본능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채워져야 한다고. 그리고 성 행위 결과로 생겨나는 2세를 원하고 어미의 사랑으로 키워보려는 의지가 있다면 낳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나는 사전 정지작업이라도 하듯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난생 처음 산부인과에 가 임신 가능성을 알아보기도 했다. 나팔관이 막히지는 않았는지, 자궁에 이상은 없는지를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의사는 당연히 나를 결혼했으며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의사는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는데도 아직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팔관도 정상이고 사진상 자궁에 특별한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이 사십이 넘으면 난자와 정자가 결합해 자궁에 착상할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진다고 설명하며 왜 진작 병원에 오지 않았냐고 말했다. 의사의 말은 내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줬다. 자궁에 별 이상 없이 정상이라는 데서 희망을 얻고 나이가 많아 착상률이 낮다는 말에 실망했다.

    시험관 아기, 정자은행에 보관돼있다는 냉동 정자,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단어가 오갔다.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나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2세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영화에서처럼 낯선 도시로 원정 가 전혀 모르는 남자를 유혹해 정사를 벌이고 감쪽같이 사라지는 방법도 문제다. 적어도 세파에 시달려 고달프고 외로운 마음에 위안을 주고 때로 크게 상심했을 때 상처를 닦아주며 위로해줄 줄 아는 지극히 인간적인 심성의 소유자와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사랑으로 2세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런 상대를 만났기에 다들 결혼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생식기능이 사그라들 위기에 닥치도록 그런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나이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부쩍 홀로 늙어간다는 게 외로움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짝을 못 만나 영영 스러져갈 처지에 놓여있던 내 유전자가 벼랑 끝에서 한 유전자와 결합해 내 안에 새생명체를 안겨주었다. 이 생명체는 결국 나일까, 또 다른 나일까. 사람이 성을 갈구하는 것은 쾌락 때문이 아니라 종족 본능을 향한 강한 희구가 아닐까. 성적 욕구와 종족 본능이 반드시 결혼한 사람에게만 용납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산부인과에서 임신이라는 말을 들은 기쁨은 잠시, 나는 결혼하지 않은 나의 임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것은 앞으로 맞닥뜨릴 수많은 난관에서 나와 아기를 지켜줄 힘이 될 것이다. 태교는 꿈도 못 꾸었다. 내 머릿속은 돈 계산으로 바빴다. 사직서는 언제 내야 적당할까, 퇴직금은 얼마가 될까, 퇴직금을 어떻게 활용해야 오래도록 생활에 도움이 될까, 그것도 태교가 되었다면 아이는 장차 수리에 소질을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한편으로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내가 만삭이 되도록 회사에 출퇴근하고 출산휴가를 신청한다면 어떻게 될까. 산전 휴가 조항엔 결혼 여부를 밝히지 않은 채 단지 임신 중의 여자조합원에게 시간외 수당을 제외한 월급여 전액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에 결혼 여부를 밝히지 않은 것을 미혼의 임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아전인수식 해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회사의 품위를 손상시킨 중대 과실로 해고 사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력 사항 기재에 중대한 사항이 허위로 판명된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다. 이 또한 해고 사유다. 더욱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정신질환 등으로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곤란하다는 객관적 증거라고 몰아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모자보건법은 꼭 결혼한 경우에만 적용 대상이 될까. 모성은 결혼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것일까. 미혼에 출산휴가를 쓴 선례는 없을까.

    그러나 내겐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특별히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남다른 기술도 갖지 못한 내가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밥줄’을 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출산 후엔 혼자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남이 알아채기 전에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서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 집으로 오는 좌석버스에서 나는 소리없이 울었다.

    그로부터 출산 때까지 꼬박 다섯 달 동안 나는 석양 이전에는 한 번도 외출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지내다 어스름 저녁 무렵 헐렁한 점퍼를 걸치고 동네 인근 두서너 블록을 산책하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했다. 느릿느릿 걸으며 나는 뱃속 아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선 모두들 이미 나를 노처녀, 독신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출산 후 아기 예방주사를 맞히러 가는 첫 외출 때 경비 아저씨와 옆집 할머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 유배지로 떠나듯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타 도시로 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기는 의사가 말한 예정일보다 20여 일 빨리 세상에 나왔다. 그날 새벽 4시 반쯤 배달된 조간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왠지 입안이 텁텁해 양치질을 했다. 다시 잠자리에 누워 막 자려는데 밑에서 뭔가 왈칵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라 여겼으나 누런 액체였다. 병원 야간진료안내소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양수가 터진 것이라며 곧 분만실로 오라고 했다.

    병원 분만실에서도 나의 수난은 계속됐다. 아기는 머리를 위로 한 채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수술에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 보호자는 남편이나 시부모 등 시가 쪽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도 없고 시가도 있을 리 없는 나는 예상 밖의 사태에 진통이 심한 상태에서 당직의사와 잠시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제왕절개 수술은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달려있는 중대 사안이니만큼 보호자 동의 규정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지만 진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언성을 높인 그날 당직의사의 처사는 내게 심한 굴욕감을 주었다.

    그 바람에 온 병원에 내가 미혼모라는 소문이 났던지 일주일 입원 기간 내내 내게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6인용 병실의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 소곤소곤 키득거리고 회진하는 의사와 간호사도 신기하다는 듯 나를 한번씩 더 보곤 했다. 미혼모는 동물원 원숭이처럼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닌가보다.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여아, 몸무게 3.2킬로그램, 신장 50센티미터. 아기를 본 것은 이틀이 지나서다. 왼팔 손목에 링거주사를 맞고 있는데다 소변줄까지 끼고 있는 상태라 꼼짝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아기는 신생아실에 있다. 아직 아기를 보지 못하고 나는 나대로 통증에 시달리느라 아기를 낳았다는 실감이 들지 않고 아기를 버린 것만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수술 이틀 후 소변줄을 빼자마자 링거줄을 주렁주렁 매단 채 신생아실로 갔다. 신생아실엔 아기 바구니가 두 줄로 놓여있고 바구니마다 갓난 아가들이 손목에 엄마 이름표를 달고 누워 있었다. 메모지에 산모인 내 이름을 써서 유리창에 대자 간호사가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바구니에 누워 있는 아기를 안고 나왔다. 아기는 잠이 든 듯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눈자위가 퉁퉁 부어오르고 빨간 피부는 조글조글 쭈그러져 있었지만 도톰한 입술 윤곽이며 부드럽게 선 콧대, 둥그스름한 얼굴형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낯이 익다. 나는 아기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아가는 내가 엄마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쪽 눈을 겨우 떠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누굴까. 저 얼굴은…. 신생아실 간호사 품에 안겨있는 아가의 얼굴은, 바로 나였다. 복제라도 한 듯 나를 빼닮은 아기. 한마디로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조물주의 조화가 아닌가.

    젖을 물리지 않고 어미 자격이 있을까

    아기는 내내 우울했던 내게 기운을 주었다. 뭔가 모를 느낌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는 병실 안쪽 가장자리 병상에 배정됐다. 창가라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다 머리 위에서 환풍기가 돌아가 좀 추웠지만 창가를 향해 돌아누우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산모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나중에 후유증이 없다는 말도 아랑곳할 바 없었다. 저들의 시선만 피할 수 있다면.

    6인용 병실은 출산을 축하하러 오는 다른 산모들의 친지들로 항시 붐볐다. 산모들의 병상 머리맡엔 선물 받은 꽃다발과 갖가지 아기용품들이 쌓였다. 그들처럼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지는 못했지만 새생명을 얻은 기쁨, 양육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어미의 마음에 차이가 있을까. 남자냐 여자냐를 떠나서, 결혼하고 아니 하고를 떠나서 오로지 한 인간으로서 2세를 갖고자 한 것이 과연 천리를 거스른 것인가. 그렇다면 나를 잡아다 단두대에 올려라.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나는 단두대를 택할 것이다, 모욕보다는.

    나는 이제 한 사람의 어머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온갖 상념을 뿌리쳤다. 한가하게 상념에 빠져있을 수 없다. 이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과 멸시가 나와 아기 앞에 장벽처럼 놓여 있다. 나는 어머니로서 그 높고도 두터운 장벽을 뚫고 아기를 보호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입원 나흘째. 아기에게 모유를 먹일 것인가 분유를 먹일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간호사는 모유를 먹일 예정이라면 젖이 잘 돌게 유방을 뜨거운 물수건으로 문질러 멍울을 풀어주고 수유실에서 초유를 먹이라고 했다. 분유를 먹일 계획이라면 젖을 말려야 한다며 넓은 붕대로 유방을 꽁꽁 싸매라고 했다. 나는 나이 많은 산모라 젖이 충분치 않을 것이고 그리 되면 아기도 엄마도 고생한다는 어머니 말씀도 있고, 또 언제고 돈벌이에 나서야 할 형편이어서 분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모유가 아기에게 좋다는 점은 차치하고 젖을 물리지 않고 과연 어미 자격이 있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관습의 올가미 걷어낼 자유의 바람이기를

    입원 엿새째, 마침내 퇴원이다. 오전 10시부터 퇴원수속을 밟았다. 수술비 입원비 처치비 등 모두 90여 만원이 나왔다. 제왕절개 수술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퇴직금을 빼먹고 사는 나에게는 큰 부담이지만 아기가 건강하게 이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미리 준비한 돈을 원무과에 내고 신생아실로 아기를 찾으러 갔다.

    병원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해 훈훈한 바람이 맞아준다. 크레졸 냄새로 꽉 찬, 그보다 더 지독한 사갈의 눈초리로 가득한 병실 밖으로 나오니 흡사 탈출한 느낌이다. 나는 엿새 만에 맞는 햇살이고 아가에겐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는 햇살과 바람이다. 심호흡을 하며 이 바람이 아가와 나를 옭아매는 관습과 제도의 올가미를 훌훌 걷어내 줄 자유의 바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기를 내 집 안방에 뉘고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아기는 너무나 작고 연약해 어디를 어떻게 안아야 할지 모르겠다. 집안 온도와 습도는 아기에게 잘 맞을까. 벽에 걸린 온도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해보고 가습기 물을 갈아주고 젖병 소독하고 이것저것 챙기느라 몹시 바쁘다. 그래도 소파에 기대 빌려온 비디오 테이프를 반복해 보며 지내던 독신 때보다 삶의 의욕이 넘친다.

    배고프면 울고, 먹고 나면 다시 자는 아기. 울음소리도 앙칼지고 분유통 꼭지도 힘차게 빨던 아기가 나흘째 똥을 누지 않는다. 이제 열 이틀 밖에 안된 아기를 병원으로 데려가기도 내키지 않아 집 근처 약국으로 달려갔다. 열 이틀 난 아기라 하니 약사도 조심스러워한다. 약사의 조언에 따라 관장약, 먹이는 정장제, 경기에 먹이는 약 등을 샀다. 관장은 자신 없어 정장제를 분유에 섞어 먹였다. 다음날 아기는 짙은 쑥색 된똥을 누었다. 똥을 누느라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을 쓰는 아기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내가 더 힘이 들었다.

    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었다. 출생신고는 출생 후 한 달 이내에 하게 되어있다. 처음부터 아기를 내 앞으로 올릴 생각이어서 이미 지난 겨울에 분가 독립 신청을 내 단독 호적을 취득해놓았다.

    그런데 정작 출생신고 하려니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내가 어머니께 아이가 생겼으며 낳아야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하나를 얻기 위해 열을 버리는구나’ 하시며 그 하나가 열보다 소중하다면 옳은 판단이라 하셨다. 물론 내가 천하의 불효자라는 건 나도 안다)께서 아기 앞날을 생각해 결혼한 오빠 호적에 올리는 것이 좋겠다시며 출생신고를 잠시 늦추자고 하셨다. 우리 호적법이란 게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남녀 사이에 이른바 사적으로(국가에 혼인을 신고 않고) 2세를 낳았을 경우 남자 호적에 올리면 상대 여성이 생모(生母)로 등재되지만, 여자 호적에 올리면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로 등재된다. 내 호적에 올리면 사생아가 되고 오빠 호적에 올리면 올케가 생모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싼 고민은 의외로 간단히 끝났다. 키도 작은 올케가 180센티미터 키의 오빠의 멱살을 움켜쥐며 완강히 거부해 대판 부부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올케는 오빠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 몰래 아이를 낳고는 자기를 속이는 줄 오해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로 나는 내 단독호적을 취득해놓은 주소지 구청에 가 출생신고를 했다. 아기는 비로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인격체로서 이 세상에 실재하게 되었다. 구청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법에 대해, 형제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원하면 2세를 낳아 잘 기를 수 있어야 하며 이에 법적으로 불이익이 없는 사회라야 진정한 복지국가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자문해본다. 나의 아기가 사회의 주역이 되는 시기엔 인습의 굴레가 없는 사회,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고 편견이 없는 사회, 본능의 억제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성장이 얼마나 빠른지 손톱을 매일 깎아줘야 할 정도다. 혼자 노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 자는가싶어 들여다보면 어느새 잠에서 깨어 놀고 있다. 팔다리를 힘차게 휘저으며 기분이 좋으면 ‘끼익끼익’ 소리도 낸다. 한쪽 발을 높이 들어 휘저으며 두 다리와 엉덩이를 번쩍 들어 몸을 옆으로 기울이는 동작을 반복한다. 아마도 뒤집기 연습을 하는 듯하다. 뜻대로 안되는지 칭얼대는 아가. 저렇게 열심히 연습하니 곧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될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아기 입 속에 침이 생겼다. 누워 노는 아기를 들여다보니 아래윗입술 경계에 침으로 작은 방울을 만들며 재미있다는 듯 방긋 웃고 있다. 혀도 촉촉해져 날름날름 움직인다. 분유 먹을 때도 젖병 꼭지를 입안 이리저리 굴리며 노는 것이 여간 유연한 게 아니다. 침이 점점 많아지는 듯 처음엔 손가락을 빨더니 주먹째 입으로 가져가 빤다. 눈도 커지고 발그레 홍조를 띤 뺨에도 살이 붙어 신생아실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예뻐졌다.

    초라한 백일잔치

    아기가 태어나 두 달 반을 지나면서 적막하기만 하던 집안이 좀 시끄러워졌다. 옹알이를 하며 방긋 웃다가 싫증나면 칭얼대기도 한다. 그 소리가 아주 동글동글 부드러운 것이 ‘은방울 구르는 소리’란 표현 이외 달리 붙일 게 없다.

    백일을 앞두고 아기는 눈에 띄게 자랐다. 이래서 예부터 백일잔치를 해주었던 모양이다. 목에 힘이 생겨 완전치는 않지만 목을 가눈다. 1분, 아니 30초의 짧은 동안 혼자 힘으로 목을 꼿꼿이 세운다. 무언가 자기 의사를 표시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울음소리가 커지고 소변도 횟수가 준 대신 양이 늘었다. 산책을 나서면 집에서와 사뭇 다르게 의젓하니 보채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엄마를 알아보는 것이 역력해 눈으로 계속 나를 쫓으며 내가 보이지 않으면 잘 놀다가도 보챈다. 그 간절한 눈빛에 눈물이 난다. “아가야,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필요로 하는 한 엄마는 네 곁에 있을 것이다.”

    아기가 이 세상에 나온 지 어느새 백일째 되는 날. 간소하게나마 백일상을 차려 아기가 세상에서 치르는 첫 통과의례의 의미를 간직하게 해주고 싶었다. 상차릴 준비를 하다 문득 회사 다닐 때 숱하게 초대받았던 백일잔치 돌잔치가 떠올랐다. 남들의 결혼, 백일, 돌, 회갑… 내가 그 동안 남의 경조사에 낸 봉투만도 아마 수백만원에 육박할 것이다. 이제 실직한 데다 이른바 미혼모라 사람을 초대할 형편이 못돼 정작 내 아기에게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처지다보니 마음이 아팠다. 집에서 찐 백설기 위에 건포도를 촘촘히 박아 ‘축 백일’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평소보다 찬 두어 가지를 더 얹어 조촐한 백일상을 차렸다. 어머니와 언니를 초청, 네 식구가 둘러앉아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그간 초대받아 다녀본 백일잔치 광경이 떠올라 쓸쓸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호텔에서 비디오 촬영 기사가 영화 찍듯 백일을 맞은 아기의 온갖 재롱을 찍던 광경들. 초라한 백일상 만큼이나 아기에 대한 내 사랑마저 초라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가 들었다.

    아기는 대체로 새벽 4시경에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연다. 팔다리를 놀리는 부스럭거림, 무언가 원하는 칭얼거림, 쌔근쌔근 잠자는 숨소리 리듬의 변화에 일어나 기저귀를 살펴보면 틀림없이 흠뻑 젖어있다. 기저귀를 갈아주며 토실토실 살이 오른 엉덩짝에 ‘푸’하고 입방귀를 뀌어주었다. 아, 순간 아기는 깔깔깔 소리내 웃는다.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 번 입방귀를 뀌어주니 계속 웃는다. 아가야, 엄마는 오늘을 기억해두마. 네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소리내 웃은 날. 두 주먹 불끈 쥐고 울면서 세상에 나와 계속 울기만 하던 네가 소리내어 웃은 날, 엄마는 이 날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놓인 긴 시간을 웃음으로 수놓아가마.

    아기를 돌보는 일 가운데 비중이 큰 것은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키고 분유 먹이고 재우는 일이다. 말로는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거의 중노동이다. 먹고 자고만 하는 아기도 있다는데 내 아기는 잠투정이 심하고 예민해 축축한 기저귀를 좀 늦게 갈아준다든지 안아주기 원할 때 좀 늦으면 달래는 데 여간 애를 먹지 않는다. 혼자서는 밥 먹을 짬도 없다. 기저귀만 해도 헝겊 기저귀를 쓰는데 세탁기에 빨아 들통에 삶고, 삶은 것을 다시 헹구어 널어야 한다. 물론 빠는 과정을 세탁기가 한다 해도 널 때에 일일이 손질해 널어야 하고 마른 기저귀도 일일이 손질해 개켜야 한다. 아기가 하루에 사용하는 기저귀는 대략 열 넉 장. 종이 기저귀를 사서 쓸 형편도 못된다.

    아기를 키우는 데엔 생각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든다. 우선 분유 값이 만만찮다. 아기 의류를 비롯해 용품도 가격이 꽤 비싸다. 대부분 저가품을 구입하지만 유모차는 안전을 생각해 유명 제품을 샀다. 친지와 담을 쌓고 살다보니 얻어쓸 수도 없었다. 한번은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품 버리는 곳에 가보았는데, 제법 쓸만한 딸랑이며 소꿉놀이 봉제 인형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딱한 아가에게 남이 버린 물건을 쓰게 하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기 돌보기로 복작이다보니 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어느새 여름이다. 한낮엔 몹시 덥다. 아기는 여름나기가 힘들다고 한다. 토실토실 살이 져 목, 팔꿈치 안쪽, 오금, 허벅지 안쪽 등 접히는 부분에 땀띠가 나기 쉬워 항시 청결하고 보송보송하게 해줘야 한다. 목에 땀띠가 나지 않게 어느새 뒷목을 덮도록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 미장원에라도 다녀온 듯 제법 깔끔해졌다. 거울을 보여줬더니 무얼 아는지, 시원해서 그러는지 방글방글 웃는다.

    아기는 가끔 자면서 흐느낀다. 어떤 때는 한 맺힌 여인의 흐느낌같이 처절한 소리를 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잠든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막연히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겨온 전생에 대해 어떤 확신 같은 것을 느낀다. 아기가 자면서, 무의식중에 내지르는 흐느낌은 전생과 연결된 실마리인 것만 같다. 어쩌면 아기는 전생에 이미 나와 연이 맺어져 현생에서 이렇게 만났는지도 모른다. 다음 생에선 저토록 섧게 울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보살피고 아기가 이 사회에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훗날 아기가 자라 ‘나는 누구인가’로 고뇌할 때 나는 무엇으로 그 짐을 덜어줄 수 있을까. 결코 성 행위의 부산물이 아니며 내 삶의 목적이었음을, 오랫동안 간절히 기원했음을 어떻게 얘기해줄까. 아이가 자랄 때까지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돼야 할 텐데… 마음이 무겁다. 가진 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무언가 자영(自營)의 길을 강구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아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되었을까. 결혼을 안한 것일 수도 있고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좋아한다던 남자도 서넛은 된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내게 정식으로 청혼한 사람은 없다. 나는 결혼시장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상품이 못되었던 셈이다. 물론 누군가와 좀 오래 사귀면 내심 결혼하자고 할까봐 상대를 멀리했다. 누군가는 야멸차게 끊었다. 그러니까 나는 말로는 결혼해야 한다고 했지만 마음으론 결혼을 거부한 셈이다. 그러며 어느 순간 내겐 독신주의자니 독신녀니 따위의 딱지가 붙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결혼을 안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좀더 파고 들어가보면 나는 결혼이란 통과의례에 가로놓인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탓에 자라면서 도대체 부(父)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없는 것이 결손이라 느껴본 적이 없었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핍의 느낌은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은 결혼 시장에서다. 이른바 적령기에 두어 번 선을 봤고, 상대방은 내게 물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나.” 만약 그들이 내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를 물었다면 나는 헌신적으로 열심히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를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어머니를 묻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실망할 뿐. 그후로 나는 사람을 소개받지 않았으며 소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결혼을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내식대로 친 사랑의 울타리

    그리고 내겐 이성간의 사랑보다 더욱 소중한 핏줄의 사랑이 있었다. 남보다 좀 모자라는 지력에 너무도 순박해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면서도 동생들 뒷바라지에 결혼은 꿈도 못 꿔보고 속절없이 늙은 큰언니와 젊디젊은 나이에 지아비를 잃고 홀로 오남매를 키우느라 늙고 지칠대로 지친 어머니. 나는 외견상 독신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두 사람을 부양하는 가장이었으며 가족 경제의 축이었다. 이미 결혼한 다른 형제들로부터, 남은 가족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마음까지도 그들이 쳐놓은 결혼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아온 터라,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꽃다운 젊음을 희생한 큰언니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마음에 새겼다. 그간 내가 보아온 바로는 결혼은 이러한 나의 희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제도임이 분명했다.

    결혼이란 것이, 사랑하는 한 사람이 기존 가족공동체에 편입되는 형태가 아니라 가족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인 한 나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른바 하자 없는 잘난 사람끼리 만나 울타리를 치는 배타적인 결혼이 아닌, 상처받고 능력 없는 가족을 어루만지고 감싸안을 수 있다면 비록 그것이 결혼이란 외양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훨씬 바람직한 제도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독신에 2세를 갖기로 감히 마음먹었던 것이다. 내 식대로 사랑의 울타리를 치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기는 별다른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기어다니고 앉고 서더니 마침내 걷게 되었다. 혼자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 일어서서 걷는 아기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아기가 기어다니기도 전 봄부터 빨강 노랑 파랑색이 배합된 작은 신발을 사놓고 아기가 걷게 되길 기다렸다. 그걸 신고 파란 하늘 아래 녹색 초원 위를 마음껏 걷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기가 서서 아장아장 걷는 모습은 완전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만 같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동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직립의 인간. 출생부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참 대견하다. 지금까지처럼 부디 그 앞에 놓일 역경을 이기고 이 사회에서 우뚝 섰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 사회의 장벽과 편견은 생각보다 견고한 것이었다. 결혼을 거부한 죄로 나는 철저히 내몰렸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과적으로 직장에서 밀려나고 이웃은 나와 아이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한다. 친지들은 나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게 됐다며 발길을 끊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구설에 오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인연을 끊고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주는 것뿐이다.

    한 사회의 보편적 인식은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 것인가보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잔인할 만큼 인정하기 싫어한다. 왜일까. 수적으로 소수에 대한 승리에 도취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수에 대한 건방진 도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심리일까.

    아기가 돌이 지나고 걷게 되면서부터 점점 바깥 나들이도 많아졌다. 엄마가 죄인이라고 해서 아기까지 집안에 갇혀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적당한 햇볕과 바람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성장에 꼭 필요하니까. 아기가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나는 동네사람의 수군덕거림과 따가운 시선을 감수하며 아기와 자주 산책했다.

    처음 병원에서 퇴원해 아기를 집으로 데려올 때는 아무도 우릴 보지 못했다. 아기가 처음 동네사람 눈에 띈 것은 간염 2차 예방주사를 맞으러 갈 때였다. 경비 아저씨와 옆집 할머니, 503호 아줌마와 그 아들이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있었다. 경비 아저씨와 옆집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져 ‘아니 웬 아기냐’고 합창을 했다. 나는 그저 “네에” 하고 말꼬리를 흘리며 택시에 올라탔다. 가족 중 누군가는 이웃의 눈을 미리부터 예상했는지 “배불러 있을 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남들이 물으면 고아원서 입양했다고 말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아가를 고아원에서 데려왔다고 하라니… 아무리 남의 눈과 입이 무섭다 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에미에게서 미혼모라는 딱지를 떼려고 아기에게 고아라는 또다른 멍에를 씌우라는 말인가. 그건 비겁함에 더해 잔인한 짓이다.

    소문은 그날로 온 아파트를 돌았다. 설사 내가 속인다 해도 넘어갈 사람들도 아니었다. 세상살이 산전수전 다 겪은 옆집 할머니는 대뜸 “산욕기가 아직 안 풀렸나봐” 하고 운을 떼었다. 나와 인사 한번 한 적 없는 이웃 아주머니도 다가와 “딸이냐 아들이냐” 고 물었다. 우리 줄 반장을 맡고 있는 304호 여자는 복도 끝에서 뛰다시피 다가와 “어머, 미슨줄 알았는데 결혼했어요?” 하고 물었다. 그날 이후 이웃으로부터 내게 전해지는 야릇한 분위기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우선 드나들 때마다 안해도 될 말을 늘어놓으며 인사를 하고 무거운 짐을 들었을 땐 얼른 받아주던 경비 아저씨는 뉘 집 개가 드나드냐는 투로 인사 한번 하지 않았다. 몇차례 우리 집에 잠깐씩 아이를 맡긴 적이 있는 옆집 애기 엄마는 나를 아예 외면했다.

    아기가 나의 보호자

    이런저런 사정으로 출입 때마다 엘리베이터 타기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나는 아기를 데리고 동네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놀이터는 가능한 한 피하고 주로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공원에 갔다. 아기는 외출을 참 좋아했다. 공원에 풀어놓으면 뒤뚱뒤뚱 넘어지면서도 꽃잎을 따고 모래 만지기를 좋아했다. 말도 빨리 익혀 웬만한 의사 표시는 다 할 줄 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나는 아기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참 이상하게도 작고 힘없는 아가인데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때때로 내가 아기의 보호자가 아니라 아기가 나의 보호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동네는 주변에 작은 공원이 많아 공원을 끼고 산책하기 좋고 마을버스가 지나다닐 뿐 노선버스도 다니지 않아 비교적 조용한 곳이다. 걸어다닐 만한 곳에 초중고교가 다 있어 아이 교육에도 그만인 곳이다. 그러나 아기가 말을 알아듣게 되면서 나는 이사를 서둘러야 했다. 아이가 동네사람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자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적금 들던 것도 깨 생활비로 다 썼고 국민연금도 일시불로 타 생활비에 충당했다. 퇴직금만큼은 비상시에 대비해 건드리지 않으려 했으나 벌지 않고 까먹는 생활에 돈이 굳어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형편에 이사를 하려면 그 경비가 만만찮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래 정든 이 집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살아야 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떠나지 않을 수 없는 형편 아닌가. 동네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얘기꽃을 피우다가도 나와 마주치면 외면하며 하던 이야기를 뚝 끊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때는 그들이 미처 끊지 못한 말꼬리를 내 귀로 듣기도 했다. “ 글쎄 처녀래. 결혼을 안했대.” 심지어 놀이터에서 자주 본 초등학교 5학년 짜리 남자애는 집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은 듯 내 딸을 가리키며 “얘네 아빠는 왜 한 번도 안 보여요” 하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 아이를 기를 수는 없다. 아이가 상처를 입을 게 뻔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색다른 것에 관심이 많은가보다.

    아이와 나의 2인극

    일주일 남짓 복덕방을 돌아다닌 끝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수도권 서남쪽 소도시에 집을 얻었다. 이곳을 택한 까닭은 살던 동네보다 집값이 싸고 연고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아기와 함께 가 살면 홀어미로 알면 알았지 미혼모라 손가락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사 과정도 간단치만은 않았다. 주민등록 전출입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주소지 전출입시 서류가 동사무소에 비치될 뿐만 아니라 동네별로 구성된 통반장에도 전출입 사실이 전달된다는 것. 아무리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해도 통반장을 통해 내가 미혼모이고 내 딸이 사생아란 사실들이 온 동네에 공개되는 것이다(공무원이 공무수행중 알게 된 개인의 신상정보를 누설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궁리 끝에 살던 집으로 이사오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 나는 주소지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남고 이사갈 새집은 언니 이름으로 계약해 아이만 주소지 전출입 신고를 했다. 그래서 아이는 현재 이모의 주민등록에 동거자로 올라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살던 집에 이사오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만약의 경우(집이 경매 처분된다든지 할 경우) 전세등기 우선순위 등에 문제라도 있지 않나 무척 염려했던 것이다.

    왜 이리도 구차스럽게 살아야 하는지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정말 큰 죄를 지은 죄인이 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나는 타인에게 눈곱만큼의 해도 끼치지 않았다. 사회질서를 파괴하지도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면 미풍양속에 해를 끼쳤을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내 소신으론 나는 죄짓지 않았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그건 지금 나를 비난하는 타인들이 아니라 오로지 내 딸에 대한 죄일 뿐이다. 단죄는 훗날 내 딸이 할 것이다. 인생이 연극이라면 이미 1막은 끝나고 2막이 올랐다. 1막은 나의 1인극이었으며 2막은 아기와 내가 함께 출연해 부대끼며 살아가는 2인극이 될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짐 정리를 대충 마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심기일전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일 게다. 아이를 기르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찾아보고 활기차게 살아보자. 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가.

    이사는 백번 잘 했다. 우선 출입하는 데 심적 부담이 없어 거동이 자유로웠다. 이 동네에선 아직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오래 살다보면 집에 남자가 한번도 드나들지 않는 것을 보고 분명 ‘이혼녀일까’ ‘사별했나’ ‘현지처일까’ 등등 별별 말이 다 돌 것이다. 그러면 또 어디로 이사해야 할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가진 돈이 점점 줄어들면서 나는 좀 초조했다. 급한 마음에 아이를 들쳐업고 면접을 보러갔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다. 그 참담함은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돈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 것인 줄 진작 알았다면 사람을 사서라도 위장 결혼식을 올리고 회사에 계속 다니는 것인데 잘못했다는 후회도 했다.

    다행히 아이는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듯하다. 아직까지는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구김살 없이 밝다. 어린이날 2000원 짜리 줄넘기 선물을 받고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조그만 일에도 깔깔깔 웃는 그 웃음소리는 온갖 시름을 날려보낸다. 김치부침개만 해줘도 좋아하고 인스턴트 자장면을 맛있다고 뚝딱 해치우지만 그렇게 먹고 싶어하는 피자 한번 못 사주고 중국집 자장면 한번 못 사주는 어미 눈에는 애처롭기만 하다.

    아이가 자라면서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시켜줄 거냐였다. 아이 대상의 모든 책자와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가족 구성을 기본적으로 아빠 엄마 동생 언니 할아버지 할머니로 상정하고 있다. 아버지 없이 살지만 아버지의 개념은 알아야 하기에 나는 의식적으로 다양한 그림과 비디오 자료들을 가지고 남자, 아저씨,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딸에게 심어주려 시도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아버지는 돈을 벌러 멀리 나가기도 하고 회사에 다니느라 집에 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아이의 마음속에 아버지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이는 지금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아빠’를 자연스레 구사한다. 마치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딸(이젠 내 아기나 내 아이보다는 내 딸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자랐다)이 언젠가 엄마의 선택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면 아버지에 대해 사실대로 알려주겠다. 아마도 나의 선택은 내 딸이 자라서 결혼을 원할 때 결정적 장애가 될 것이다. 가문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내 딸은 근본도 모르는 ‘사생아’이니까. 내 유전자와 결합한 유전자는 심성 반듯한 사람의 것이다. 결코 세상에 부끄러운 유전자가 아니다. 단지 결혼하지 않았을 뿐이다. 딸은 이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부닥치면 한편으로 내 선택을 후회한다. 내 외로움을 덜겠다고, 아이의 고통스런 삶은 생각지 않고 내 욕심만 차렸다는… 무슨 말이든 구차한 변명이 되겠지만 아기는 내 삶에 구원의 빛이었다. 아기가 생기기 전 나는 살아갈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아기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나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사십대에 접어들며 아무 의욕 없이 허탈에 빠져있을 때 한 사건이 있었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독신의 오십대 여교사가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다. 그가 아무도 없는 전세방서 불을 끄고 누워 전세금 얼마, 퇴직금 얼마, 연금 얼마… 하고 재산 목록을 정리해 나갔을 모습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사건 이후 나는 더욱 아기에게 집착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나도 2세를 기르며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강변하면서.

    바로 그때 길고 긴 터널 끝에서 빛이 나타나듯 긴 독신생활 끝에 기적처럼 생의 반려를 만난 것이다. 따스한 체온을 가진 살과 비벼대고 새끼의 입 속에 모이를 넣어주는 어미새처럼, 그를 위해 어디든 날아가 먹이를 물어다 주고픈 모성을 마침내 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은 처음 내가 2세를 가졌으며 낳아 기를 것이라는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글픈 일이지만 일차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경제였다. 미혼에 출산휴가를 쓸 수 없으니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게 첫째 난관이었다. 나는 가정 경제의 주축에 서있었다. 또 아이를 양육하기엔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적어도 아이가 자립할 때까지 뒷바라지하려면 앞으로 20년간 돈을 벌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는가 걱정했다. 누구는 혼자 사는 괜찮은 남자를 알고 있다며 소개할 터이니 얼른 아기를 지우고 혼인을 서두르자는 안도 제시했다. 어떤 여자는 그렇게 해서 팔자를 고쳐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나는 누군들 평생 먹고 살 거 가지고 결혼할까, 그렇다고 이 소중하고도 귀한 생명을 돈 때문에 죽일 수는 없다, 뱃속의 아이를 없애고 난 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진실을 은폐하고 아무리 잘산들 무슨 소용인가하고 맞섰다.

    지금 나는 경제적으론 고통받고 있지만 나름대로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엇이든 가르치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고 엄마를 걱정해주는 내 딸. 기분좋을 땐 엄마를 껴안아주고 뺨에 뽀뽀를 퍼붓는 딸이 있다. 내가 일하고 돌아오면 힘들었지 하며 팔다리를 주물러주는 기특한 딸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말아야지. 어린 딸의 마음씀에 나는 힘을 얻어 내가 진창에서 구르더라도 너만은 지켜주마고 다짐한다. 그러나 마음뿐 남과 같이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간 나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일당 3만원에 김밥 말기도 해보았고 제본소에서 책 묶는 일도 해보았다. 정부가 벌이는 공공근로 사업에 참가해 공원 운동장 하천 둔치 등 도심 곳곳에 있는 녹지의 쓰레기를 줍고 잡풀을 뽑아낸 뒤 꽃을 심는 작업도 했다. 또 아파트를 돌며 집집마다 현관문짝에 홍보 전단을 붙이는 일도 해보았다. 아이가 자라 어느 정도 시간이 나면서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려 기를 썼다. 그러나 대개 한시적인 일인 데다 그 보수는 아르바이트 수준이어서 쌀값과 관리비를 충당하기에도 모자란다. 그간 해본 일 중 그래도 공공근로가 가장 잘 맞았다. 무엇보다 일찍 끝나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지루함을 덜 수 있고 답답한 실내가 아니라 밖에서 일한다는 점이 좋았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일하다보면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뻐근하지만 햇살을 등에 받고 맑은 바람을 쐬며 일하는 게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지난한 삶의 여정을 전혀 고통스럽지 않게, 낙관적으로 풀어내는 구수한 입담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부서 하는 일이라 노임을 떼일 염려가 전혀 없어 좋았다.

    사실 신생회사에 가서 일해주고 임금을 떼인 적이 두 번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한 후로 아무리 번드르르한 말을 해도 믿을 수 있는 업체인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우는 아이를 떼놓고 가서 한 일에 대한 보수를 고스란히 떼인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근로는 여러 사람에게 고루 기회를 줘야 해 석 달밖에 할 수 없었다.

    한번은 아주 좋은 기회가 있었다. 내가 십수년 간 해온 일과 같은 일을 하는 회사에서 사원을 공개채용한 것이다. 나는 주민등록 등본과 최종학교 성적증명서 등 서류를 빠짐없이 갖춰 제출하고 경력자라도 혹 시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험준비를 했다. 그러나 연락이 오지 않았다. 또 한번은 어느 회사에 자리가 났는데 공채하지 않고 내부 추천으로 이력서를 받는데 마침 옛 동료가 그 회사에 있다기에 이력서를 들고 갔다가 크게 무안을 당했다. 내 처지는 이해하나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자신이 남자고 내가 여자에 미혼모여서 오해받기 쉽다는 것. 내 일을 봐주었다가 아이 아버지로 오해받기 싫다는 의미로 나는 해석했다. 그 일이라면 나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취업이든 뭐든 누구에게도 일절 부탁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나는 가슴에 주홍글자를 단 사람 아닌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고개 숙이고 돌팔매질을 하면 맞고 침을 뱉으면 뒤집어써야 한다.

    사실 이력서 호주란에 본인이라 기재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떨칠 수 없다. 내 이력서를 받아보는 쪽에서 미혼모인 여성호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품행이 방정치 않다거나 결격사유로 여기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이력서는 낼 이유가 없는 휴짓조각일 뿐이다. 취직도 못하면서 내가 미혼모임을 광고하는 효과밖에 없으니까. 또한 그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과 연락을 일절 끊은(끊어진) 상태라 나의 재취업은 더욱 힘들었다. 젊은이도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때에 주민등록 등본에 여성 호주로 기재된 아줌마가 일자리 잡기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딸에게 내 성씨 물려준 것 자랑스러워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내가 호주인 게 자랑스럽다. 내 딸에게 나의 성씨(姓氏)를 이어준 것도 자랑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모계사회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머니 호적에 오를 수도 있고 어머니 성씨를 이을 수도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인생살이에 정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혼해서 한 남자의 호적에 올라 그의 성씨를 이은 아이를 낳고 사는 것만이 여자 인생의 정답일까. 그것은 다수의 선택일 뿐 진리는 아닐 것이다. 설사 그것이 정답이라 할지라도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제발 색안경을 끼고 불필요한 관심을 갖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현재 내 월 수입은 평균 50만원 정도다. 비정기 파트타임 일자리를 겨우 잡았는데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그 어느 것도 가입대상이 아니다. 그나마 언제 해고될지도 모를 일이다. 50만원으로 식비와 관리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요즘은 교통비도 많이 올라 좌석버스 타고 일반버스로 한 번 갈아타야 하는 곳에라도 다녀올라치면 금세 5000원 돈이 날아간다. 외출도 극히 삼가고 있다. 건강보험료가 밀려 병원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강보험공단에서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압류 예정통보서가 날아들기도 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꿈은 꾸지도 못한다. 월 20여 만원이 드는 유치원 보육비는 현재 내 월소득의 40%나 된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학원에, 유치원에 가고 없는 텅 빈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내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키우려고 낳은 건 아닌데… 아이는 교육방송(EBS)을 비롯해 여러 방송사 프로그램 중 교육적인 것을 골라 녹화한 테이프를 보며 한글도 떼고 영어도 익히고 있다. 동네사람이 “너 유치원 다니니”하고 물으면 “네, EBS유치원 다녀요”하고 대답하는 딸을 보면 못난 어미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수십번 되뇌지만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이가 곧 취학 연령이 되어 학교에 갔을 때 겪어야 할 고통에 비하면. 더구나 그 고통은 내가 겪어줄 수도 없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나의 죄를 아이가 고스란히 덮어쓰고 겪어야 하지 않는가. 그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호주제는 폐지될까

    딸과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꿈 같은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미혼모와 사생아란 딱지는 사회관계에서 붙는 것이어서 은둔하면 아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나는 벌어먹고 살려고 사회에서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고 아이는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딸이 취학하면 우리에 대한 편견과 멸시는 본격적으로 그 비수를 들이댈 것이다. 눈이 쌓인 날 먹이를 찾으러 산에서 내려오는 노루를 기다리는 사냥꾼이 생각난다. 내겐 초등학교 시절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담임교사가 조회시간에 ‘아버지 없는 사람 손 들어봐’ ‘엄마 없는 사람 손 들어봐’ 하고 묻던 일. 그 일은 연례행사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마지못해 손을 들고 반 아이들은 수군대며 나를 달리 보았다.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 지 모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여성계가 주축이 되어 벌이는 호주제 폐지 운동에는 나도 관심이 많다. 많은 정치인들이 호주제 폐지에 찬성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단순히 여성표를 의식해서 해본 발언인지 정책적 고려를 거쳐 내린 결정에 따른 발언인지는 두고봐야 밝혀질 것이다. 과연 폐지될까. 폐지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될까. 완전 폐지될까, 친양자의 나이 제한선을 완화하는 제한적 개정에 머무를 것인가. 완전 폐지된다면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내 딸이 받을 고통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을까. 호적에는 호주인 남자 ‘갑’의 호적에 병과 정의 딸인 ‘을’이 모월 모일에 혼인으로 입적했다는 사항과 갑과 을이 아이를 낳으면 호주인 갑이 모월모일에 자를 출생신고한 사항이 기재된다. 호주제가 폐지되거나 개정될 경우 세부사항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도 이전에 먼저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언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호주제 폐지론을 놓고 찬반 토론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찬성론을 펴는 측의 대변자들은 여성학자, 여성계 활동가였는데 주로 이혼 후 재혼 가정의 자녀 성(姓)이 문제가 되었다. 이혼 후 엄마가 자녀를 맡아 기르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경우 아이들의 호주는 여전히 전 남편이고 아이들은 주민등록상 세대주인 현 남편(새 아빠)의 자(子)가 아닌 동거자로 새아빠와 성이 다르게 오르는데 학교에 제출하는 서류에 이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 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에 이른바 ‘왕따’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사만 알고 있어야 할 학생의 가정사항이 어쩐 일인지 학생들 사이에 알려져 자녀가 놀림을 받게 되었다는 시청자 전화도 소개했다. 진정한 교육자라면 학생 개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그 프로그램을 본 뒤로 늘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내 딸이 엄마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 어쩌나. 저토록 맑고 밝은 영혼이 상처입고 스러지면 어쩌나. 요즘 학교에선 뭔가 다른 아이와 조금만 달라도 왕따가 된다는데(이런 현상이 비단 학교뿐일까만) 내 딸은 출생부터 남과 다르니 왕따 대상 0순위 아닌가. 왕따의 충격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보도되는 현실에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가 두렵다. 아예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을 할까. 그러면 아이의 사회성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누구는 내게 말한다, 지금이라도 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하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고. 찾아보면 아이 딸린 나와 결혼할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라고. 물론 나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다. 이건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내 개인의 취향이고 내 자유의지라는 게 중요하다. 이 사회가, 사람들이 이런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비난하지 않는 깊이와 폭을 가졌으면 하는 게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내 딸은 이제 여섯 살이다. 내년이면 취학 통지서가 나오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사회와 접촉을 시작한다. 지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서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편법이라도 있다면 가진 돈을 다 털어서라도 남과 같은 모양의 서류를 만들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마침 저녁 뉴스에선 중국 동포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호적을 대량 위조해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도록 알선한 브로커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한다. 어처구니 없겠지만 나는 그 뉴스를 듣고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됐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그러나 이 무슨 자가당착이란 말인가. 스스로 떳떳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 서류를 위조해서라도 남자의 호적에 올리려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솔직히 나는 떳떳하다. 나로서는 미혼모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모욕과 사갈시하는 이 사회의 압력에 주눅들어 나는 점점 나약해지고 있다.

    최근 미혼모를 주제로 한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알았는데 ‘모자원’이란 곳이 있다. 갈 곳 없는 미혼모와 그 자녀(母子)가 자립할 때까지 사는 곳이다. 그곳엔 나이 어린 십대 미혼모로부터 이십대 미혼 여성들이 살고 있었다. 사연은 다양하다. 동거하던 남자가 결혼을 거부하고 달아났다는 사연, 남자쪽에서 아이를 뺏어갔다는 사연, 책임을 회피하고 달아난 남자와 상관없이 아이를 잘 키워보고 싶은데 방 구할 돈도 없고 집에서도 쫓겨나 오갈 곳이 없다는 사연, 집안 망신시켰다 하여 머리채를 잡힌 채 개 끌리듯 마당에 뒹굴어야 했던 여인의 사연, 아이를 지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한테, 자신의 가족한테 구타당해 그 흔적이 몸에 흉터로 남은 여인… 그야말로 인권의 사각지대가 따로 없다. 프로그램은 이른바 자발적 미혼모라 하여 실명을 밝힌 두 여성을 소개했다. 한 여성은 아이는 낳았지만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라 그와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란 판단에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다른 한 여성은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상대 남자가 사고로 사망했으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나는 자발적 미혼모에 속한다.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미혼모 실태와 대비하듯 북 유럽 나라들의 미혼모도 소개했다. 그녀들의 표정은 매우 밝고 당당해 보였다. 임신한 미혼의 직장 여성은 아무 거리낌없이 유급 출산휴가를 쓰고 주변 사람도 그녀의 임신을 축하해주었다. 그 나라에선 이미 결혼이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듯했다. 결혼을 하든, 계약결혼을 하든, 동거를 하든, 독신으로 살든, 독신에 아이를 키우든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는 식으로 가치관이 우리와 사뭇 다르다.

    독신모는 범죄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선 미혼모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이다. 미혼모라면 불륜이나 낙태, 생명 유기, 고아수출의 단어를 곧장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가 고아 수출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갖게 됐다는 뉴스에선 언제나 미혼모가 그 장본인이라고 말한다. 그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낯이 뜨거웠다. 어쨌거나 나 역시 미혼모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가 낳은 아기를 버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기를 버림으로써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타인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누군가와 결혼하기 위함이거나, 잘 길러보려 했으나 경제적으로 도저히 기를 수 없는 형편이라 차라리 친권을 포기하고 남에게 넘기는 것이 아기 장래에 더 나으리라고 판단했거나, 미성년자로서 애초에 아기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이 시쳇말로 일을 저지른 경우라고 볼 수 있으리라.

    뉴스는 언제나 그 대책으로 청소년에 대한 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책은 청소년에게 피임 방법을 잘 가르쳐 셋째 경우의 미혼모를 줄이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결혼 여부와 상관 없이 자신의 2세를 잘 키워보려는 미혼모에 대한 모성 보호와 복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그들에게 비난과 멸시, 온갖 불이익의 굴레를 씌워놓고 기혼 부모처럼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한다고 매도할 뿐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미혼모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선 수적으로 밀어붙이면 안되는 일이 없지 않은가. 독신자만 해도 그렇다. 요즘엔 독신자 수가 늘고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이른바 독신자 문화가 싹트는가보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라는 이유로 십수년간 세월을 질곡 속에서 살아야 하던 나로서는 만시지탄(晩時之歎)밖에 나올 게 없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변화라 하겠다. 이로써 결혼을 한 사람과 안한 사람은 이 사회의 주류냐 비주류냐의 문제이지 결격자냐 완전한 사람이냐, 이상이냐 정상이냐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결혼. 못할 수도 있다. 하기 싫어서 아니 할 수도 있다. 하고 싶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이 사회에는 못생겨서, 가난해서, 농촌에 살아서 결혼 못하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다. 결혼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혼 못한(안한) 사람에 대한 인권침해는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가벼운 농담으로 여기고 독신자에게 툭툭 한마디씩 던진다. “뭐 잘났다고 그리 눈이 높아, 웬만하면 시집(장가)가지” 라거나 “시집(장가)도 못간 것이”라거나. 그것이 독신자에게 모욕이 되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않는다. 나는 내가 빠진 술자리에서 회사 동료들이 나눈 대화를 잘 알고 있다. “처녀일까 아닐까.” “에이 요새 세상에 처녀가 어디 있어?” “여자 나이 사십대에 그게(성욕) 제일 쎄다는데 밤생활은 어떻게 해결할까.”

    내가 그들을 보며 동물 다큐멘터리를 연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동물이면서 아닌 체하는 나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물에 기름 돌 듯 친구들과, 회사 동료와, 결혼한 이웃 사람과 어울릴 수 없었던 근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바 나는 결코 동물이 아닌 체하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이 합법적 성생활을 보장받은 데 비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성생활은 음성적 대상으로, 특히 여성 독신자의 성생활은 음란한 것으로 치부했기 때문일 뿐 나는 내가 성을 원하지 않는 고고한 동물이라고 자처한 적이 없다.

    결혼을 권하는 사회, 결혼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 않는 사회에서 내가 끝내 결혼하지 않은 것은 사랑의 결말인지 시작인지 모를 결혼 이후의 아름답지 못한 실상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결혼한 다수 여성은 ‘시가(媤家)’와 관련된 일은 뭐가 되었든 피곤하다며 ‘시’자도 입에 올리기 싫다고 말했다. 많은 여성이 고부 갈등이 특히 심하다 하여 편모의 외아들과는 결혼하기를 꺼린다. 또 여성의 외면으로 농촌의 수많은 총각이 결혼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편에서 날마다 남편에게 매맞고 살아가는 여성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이혼하면서 서로 2세의 양육을 미뤄 고아원에 맡겨진 아동도 많다. 이것이 과연 사랑의 결실이라는 결혼의 진면모일까. 그 사랑은 나이와 국경은 초월해도 짐이 되는 가족은 초월 못한다는 건가.

    우리 속담에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애를 밴 처녀는 할 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의 반어적 표현이다. 여기서 처녀라 함은 성관계를 한번도 갖지 않은 여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뜻한다고 본다. 나는 할 말이 많다. 그리고 내 딸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내 딸이 엄마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고 엄마와 같은 길을 걷게 될지라도 엄마처럼 질곡에서 고통받지 않고, 다양한 사고와 다채로운 문화가 꽃피고 다수가 소수를 그러안는 포용성을 갖춘 평화의 공동체에서 살아가길 꿈꾼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저 멀리 바다 건너 네덜란드에서만,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북구의 어느 나라에선 미혼 때 어머니가 된 여성이 나라를 다스린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그 여성대통령은 당당한 체구에 활달한 기상을 떨치며 자기 나라의 경제를 위해 외교를 펼쳤다. 자리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을 갖춘 여성이기에 아무 문제될 게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사는 사회의 포용성이 크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심성 곱고 유머가 넘친 그 사람

    미혼모는 사회적 약자며 소수다. 결혼을 거부했든,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았든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어머니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한 생명이 자립할 때까지 홀로 뒷바라지하는 길을 택한 이상 그들도 어머니다. 어머니에 기혼모와 미혼모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리라. 어머니는 어머니일 뿐이다.

    돌아보면 지난 몇해가 꿈이었나 싶다. 그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고 흘러간 현실이었다. 내 딸이 그 시간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을까. 꿈이 없이 밥만으로 사는 삶에선 인생살이의 향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딸이 꿈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을 찾아 헤맸다. 남보다 늦게 꿈을 만나고 남과 다른 형태로 만난 것은 어쩌면 내게 주어진 운명인지도 모른다. 아등바등 버거운 일상을 버티고 여기까지 흘러온 것은 순전히 오기의 힘이었다. 하루에도 수십만의 생명이 태어나고 지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탄생과 사라짐은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계할 뿐 아무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딸이 있으므로 비로소 내 의미와 향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 내게 새생명 잉태의 기쁨을 준 사람에 대해 밝히면서 이 글을 맺어야겠다.

    잠깐 만나보았지만 그는 심성 곱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내 나이로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교통사고 진정 건에서 목격자 진술을 하며 우연히 알게 되었으며 내가 진정서 작성을 도왔다. 영화에서처럼 작심하고 그를 유혹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그 밤의 일은 나의 기원이 간절하여 신이 내리신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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