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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 글: 민 들 레(필명)

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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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혼모의 육아일기
몇해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던 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처럼 씨(정자)를 받기 위해 낯선 도회지로 원정 나가 비상작전을 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심지 끝에 겨우 불을 붙이듯 어렵게 한 생명체를 내 안에 품게 되었다. 처음 산부인과에서 ‘임신’이란 진단을 받았을 때 내 가슴은 여성이라면, 어머니라면 누구나 느꼈을 환희, 두려움, 신비함에 호흡이 힘들 정도로 쿵쿵 뛰었다.

산부인과 진료실 칸막이 뒤에 설치된 진찰대 위에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몸을 쭈욱 펴고 누웠다. 의사는 초음파 진단기에 연결된 마우스를 내 배 위에 얹었다. 그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모니터에 아기집 내부가 나타났다. 맨 처음 아기는 희미하게 깜박이는 하나의 점이었다. 검은 화면엔 짧게 끊긴 하얀 실선들이 흐물흐물 움직이고 그 한가운데 좀더 뚜렷한 하얀 점이 있었다. 의사는 그 점을 가리키며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모습은 그대로 한 장의 작은 사진으로 출력돼 내게 주어졌다. 의사는 사진 속 그 하얀 점이 정확히 ×월 ×일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말해줬다. 나는 그 사진을 수첩 비닐 커버 안쪽에 넣고 다니며 보고 또 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나는 내내 상기되었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왠지 모를 허전함으로 내 가슴엔 늘 바람이 휑휑 지나는 것만 같았는데 그 바람이 어느 순간 잦아들고 내 마음은 몹시 바빠졌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일까. 보름 후 다시 병원에 갔을 때 그 점은 작지만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어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의 엄숙함을 내게 아로새겨 주었다. 작은 몸을 웅크리고 내 몸 가장 깊고 은밀한 곳, 그 한없는 고요 속에, 어둠 속에 홀로 생겨나 오로지 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가냘픈 생명.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가진 것 하나 없는 못난 나를 믿고 내 안에 자리잡은 순진무구한 생명체. 나는 이 생명의 보금자리가 돼주어야 한다. 비바람, 눈보라로부터, 온갖 해롭고 사악한 것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생명임을 확인시켜준 이 신비… 내가 무엇인가,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한순간에 깨달은 것만 같았다. 나는 운명에의 외경과 환희를 비로소 실감했다.

축복 받지 못한 임신

그러나 나의 임신은 주위로부터 전혀 축복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이 생명에게 가난과 헤어나기 힘든 뿌리깊은 인습의 멍에를 물려주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둠의 한 자락은 이미 병원에서부터 너풀댔다. 지하에 다방, 1층엔 24시편의점이 있는 작은 건물 3층에 자리잡은 산부인과엔 꽤 많은 여성이 들락거렸다. 대기실엔 앳된 얼굴의 십대 소녀부터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대여섯 명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 낙태수술을 받으러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아기가 더 크기 전에 죽여야 할 것 같은, 형체 없고 소리 없는 압박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현재 임신 3주여서 수술을 한다면 보름 이내에 해야 안전합니다.”

은밀히 다가와 건네는 간호사의 말투는 내게 모종의 선택을 재촉했다. 새 생명의 탄성이 들리지 않는 곳, 날카로운 메스의 금속성 냄새가 지배하는 곳, 그것은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그 느낌이 두려워 나는 병원을 바꾸었다.

간절히 소망하던 것이지만 내 안에 한 생명체가 오롯이 자리한 것을 안 그 순간부터 나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가족, 친족은 남부끄럽다고 여길 것이다. 십 수년 간 터잡은 직장, 동료들과 맺어진 온갖 관계의 끈은 한순간에 끊어지고 나는 ‘미혼모’로 전락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허울뿐인 듯한 이런 관계는 결국 나란 인간을 규정하는 실체 아닌가.

그토록 원한 임신이었지만 대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자 나는 많이 흔들렸다. 우선 배가 불러오기 전에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당장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다.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번거롭고 치욕적인 일들을 당하지 않으려면 일단 잠적하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어디로 잠적할 수 있을까. 이제 내 앞엔 어떤 삶이 놓일 것인가. 또 태어날 아기의 삶은…. 일말의 두려움이 잉태의 기쁨을 반감시켰다.

아기는 날마다 조금씩 자라며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왔다. 배가 고프다 밥을 달라, 호흡이 곤란하다, 맑은 공기를 공급하라, 이런 음식은 먹고 싶지 않다, 다른 음식을 달라, 이런 노래는 싫다, 이런 음악이 좋다 등등. 내 안에 고귀한 생명체를 품고서야 비로소 나는 사람과 사람살이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어머니가 돼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야 했다면 얼마나 허무했을까. 전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일에 쉽게 감정이 흔들리고 무엇보다 눈물이 흔해졌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고 텔레비전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학대받는 아이의 모습이 비치면 금세 눈물이 핑 돌고 콧물이 흘러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와 코를 풀곤 했다. 아, 이 어린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배고플 때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추울 때 따뜻이 품어줄 수 없다면 어쩌나. 문득문득 두려움이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담담히 새로운 삶을 준비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전방위에서 내 안의 생명체를 버리라고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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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민 들 레(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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