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꿈은 이루어져야 한다

  • 글: 홍사종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장 sjhong55@hotmail.com

    입력2003-06-26 17: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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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은 이루어져야 한다
    IMF 체제에서 아내가 처음 한 말은 ‘생활비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잘려나간 비용이 외식비와 음식물비였다. 먹고 마시는 비용의 최소화가 당시 아내가 설정한 절약 목표다. 다음으로 아내가 선언한 것은 정말 뜻밖의 내용이다. ‘아이들의 과외비만은 절대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못났지만 내 자식만은…’ 하는 마음으로 한낱 유전적 숙주로서의 삶을 자처하는 이 땅 모든 부모의 마음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모름지기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물건’은 안 사도 ‘꿈’은 산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미국 군수산업 다음으로 거대한 산업규모를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도 대공황기였다. 오늘날 할리우드의 영화는 공황기의 어렵고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피땀이 밴 임금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절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면서 영화 속 주인공들을 통해 그들은 꿈을 샀다. 그레고리 펙 같은 이름 없는 미국의 신문기자가 유럽 소공국의 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게리 쿠퍼와 같은 노동자도 금노다지를 발견해 일확천금의 갑부가 되는 꿈을 그들은 영화에서 산 것이다. 춤, 노래,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 주요 주제인 최근의 인도 영화가 하층 카스트인 천민계급의 열렬한 성원(?)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어려울 때일수록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 꿈을 향한 구원의 출구가 지난 대통령선거 아니었을까. 혹자는 지난 선거를 세대간 갈등양상이라고 입방아에 올리지만 실은 꿈도 희망도 없는 암울한 미래에 절망한 이 땅의 젊은 세대가 탁 막힌 현실의 장벽을 부수고 솟아오르고 싶은 열망을 그렇게나마 반영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의 신분상승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경야독하며 일류대학 나와 사회지도층이 된다는 말 또한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천에서도 용이 나와줘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프랑스혁명도 시대를 거스르며 제3신분인 평민의 권리를 제약하고 귀족의 권한을 강화한 데서 촉발됐다. 출구가 막힌 사회는 절망하는 사회다. 프랑스혁명은 출구 막힌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이 짓밟힌 꿈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찾아낸 사건이다.

    서울대 신입생의 절반이 재력이 몰려 있다는 서울지역 학생들이고 그 중 상당수가 강남 출신이라는 통계만 보더라도 모든 국민에 균등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헌법의 정신이 무색해진다. 높은 청년 실업률, 일류대 장벽과 학벌사회에 가로막혀 끊임없이 패배자가 되어가는 젊은이들, 심지어는 지방대 졸업자라고 신입사원 면접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들은 좌절했고 허탈한 가슴을 수없이 쓸어내렸을 것이다.

    낙담한 그들에게 대통령선거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그리하여 상고 학력의 역경을 딛고 우뚝 선 노무현 후보의 모습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은 희망을 읽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노무현 후보를 통해 대리구현한 것이다. 요즈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 있는 로또 복권열풍을 가만히 뒤집어보면 지난 대통령선거 양상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분상승 욕구를 노무현 대통령을 통해 찾아냈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될 수 없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경제 구조 안에서 부자 될 꿈을 사람들은 로또 복권에서 찾아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또 광풍은 말도 안 되는 이벤트요, 속임수다. 수백만 분의 1도 안 되는 확률을 가지고 ‘부자 되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에 편승하여 가뜩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빈 호주머니를 턴다. 이 사회적 폐단은 ‘어쩌다 한 번 터질 대박’을 향한 사행심리로 매도돼 세간의 혹평을 받지만 로또 복권이라는 출구를 통해 폭발 일보 직전의 사회갈등이 그나마 건전(?)하게 해소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실 우리나라 경제구조에서 봉급생활자가 내 집 마련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연일 폭등하는 집값, 물가, 교육비 부담에 허리 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들에게도 꿈은 있다. 부자 되고 싶은 꿈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꿈은 현실이 아니다. 그 꿈을 구현해내는 데 있어 로또만큼 매력적인 상품이 또 있을까. 로또의 매력은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누구에게나 당첨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상품의 마력은 확률이 수백만 분의 1이더라도 분명히 당첨자를 낸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첨이 안 돼도 타인의 대박 꿈 구현을 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게 된다. 다행히 이 사업은 매주 계속 시행된다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오늘은 당첨자를 못 내도 모아서 한꺼번에 내는 운영방식도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끌어들인다.

    부익부 빈익빈의 빈부 격차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주는 이 복권 프로젝트야말로 우리나라와 같이 경제구조가 왜곡된 나라에서는 적합(?)한 상품이 아닐 수 없다.

    바꿔 말하자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 될 길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부여잡을 수 있는 희망의 끈이 로또 복권이라는 뜻이다. 로또 복권 열풍을 망국병이라고 지탄하는 사람들이 먼저 펼쳐야 할 논지는 바로 이 비뚤어진 경제구조를 바로잡는 일임에도 애꿎은 로또는 연일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가 절망한 젊은이들이 신분상승이라는 사회적 욕구의 출구를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찾아낸 것이라면 로또 복권의 탄생과 열풍은 우리 사회의 공정하지 못한 경제구조와 그로 인한 질곡의 삶이 찾아낸 출구다. 아주 묘하게도 노무현 정부와 로또는 비슷한 시기에 태동됐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재미있는 것은 태동의 배경도 같지만 이 시대가 갈급해하는 ‘꿈의 대리 구현’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어두운 사회가 노대통령과 로또 복권을 통해 희망을 찾아낸 것이다. 꿈은 이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로(盧)’정부의 탄생과 로또는 같은 ‘로’자 돌림이라고 해서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로또는 그 자체가 허상에서 출발한 상품이지만 사람들에게 허상을 일깨워줄 일도 없고 실망시킬 일도 없다. 어차피 로또 발행이 계속 이어지는 한 꿈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속 당첨자를 낼 것이기 때문에 남이 부자의 꿈을 대리 구현해주니 행복하다. 언젠가 나도 당첨될 수 있다는 꿈이 지속되는 한 로또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온갖 아픔과 패배자로서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희망 속에 탄생한 노무현 정부는 다르다. 당첨 가능성이 낮았는데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까지는 로또와 같은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는 로또처럼 매번 열리는 행사가 아니다. 젊은이들의 꿈을 먹고 탄생했지만 그 꿈은 구체적 실현을 요구하는, 너무나 냉혹한 현실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탄생한 지 벌써 100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에게 신분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학원 학군 좋은 강남 집값은 천정부지로 높기만 하고 발랄하게 자라나야 할 이 땅의 청년들은 아비규환 입시지옥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왕좌왕 경제정책 때문에 청년실업은 더욱 큰 사회문제를 예고하고 있다. 거기다 NEIS 시행 갈등 등 교육정책의 혼선은 온국민을 허탈과 분노에 떨게 했다. 그밖의 정책 혼란을 다 열거해서 무엇하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게 마련이다. 노대통령 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한 것을 두고 언론 탓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노대통령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를 강렬히 원했던 젊은 지지자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일이다. 그렇긴 해도 이 땅 젊은 그네들의 꿈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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