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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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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천진하고 괴팍한 천재’로만 알려진 모차르트.
  • 그러나 그는 동시대 어떤 음악가보다 전복적이고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마술 피리’ 등 걸작 오페라들을 통해 본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와 계몽 사상.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모차르트(1756~91)를 흔히 신동, 천재라 한다. 문학·미술의 경우와 달리 음악의 천재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특히 모차르트의 경우에 해당한다. 천재인 탓일까? 그의 삶이나 음악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대다수 예술가에 있어 그의 작품은 ‘그 인간’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는 인간과 작품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화며 연극, 신화적 전기에 묘사된 천진난만한 천재의 모습은 그의 작품이 지닌 성숙도, 즉 풍부한 감정표현이나 사회의식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물론 ‘아마데우스’ 같은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특히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설정은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꼭 참고해야 할 작품이다.

사실 ‘유치한 인간성에 대비되는 작품의 성숙성’이라는 현상은 비단 모차르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음악가, 아니 모든 예술가는 다 그와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문제는 사회 사상인데, 베토벤·바그너·베르디·무소르크스키 등의 음악가들은 나름의 확고한 사회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이 창작한 음악 또한 그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사상의 측면에서조차 확실하게 알려지고 이해된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반귀족주의를, ‘마술피리’에서는 이상주의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당시 지배계급인 귀족에 대한 계급투쟁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천재’ 모차르트가 과연 그러한 계급투쟁 사상을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인

여기서 우리는 모차르트가 12세에 작곡한 최초의 오페라 ‘바스티앙과 비스티엔’(1768)이 당시 계몽주의자 루소의 작품을 대본으로 삼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적어도 20대 이후의 모차르트는 대단히 강렬한 정치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당시 시민혁명 이전의 사회계급, 계급차별, 계급투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이성적 휴머니즘에 공감했다. 물론 이는 모차르트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그가 20대를 보낸 당시의 사상적 특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모차르트는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자신감과 강한 자존심으로 인해 일찍부터 평등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귀족의 사랑을 받은 신동에서 완전히 탈피해 그에 저항하는 반항아로 변모한 것이다. 그를 증명하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25세에 벌인 대사제 콜로레도와의 충돌이다. 당시 그는 베토벤에 뒤지지 않는 인간 선언을 한다.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입니다. 나는 백작이 아니지만 수많은 백작보다 더 많은 명예심을 가질 작정입니다. 백작이든 하인이든 저를 모욕하는 자는 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모차르트는 파리에까지 이르는 연주여행을 다녀와 지금 우리가 듣는 작품들의 대부분을 쓴다. 그러나 사제나 귀족으로부터 독립한 음악가의 생활은 비참하여 10년 뒤 35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는다. 그의 인간 선언은 죽기 직전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그는 왕자입니다”라는 말에 대해 “그 이상이지요, 그는 인간입니다”라고 답하는 아리아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25세의 모차르트가 독립을 택한 것은 그 자신의 결단이었다기보다는 시대적 경향 탓이라고 봄이 옳다. 귀족이 예술가를 보호하는 시대가 간 것이다. 1790년 하이든은 30년간 봉사한 귀족의 곁을 떠났고, 베토벤 역시 1794년 독립하여 음악시장에서 자유계약 작곡가로 살았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가들이 귀족이 아닌 대중에 영합해야 함을 뜻했다. 예컨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질투의 화신 살리에리는 당시 모차르트보다 훨씬 인기 있는 작곡가였다. 왜냐하면 그는 경쾌한 오락으로 오페라를 작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너무나도 심각해 대중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만능형 작곡가였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독주곡 등 기악곡에서부터 오페라, 가곡, 교회음악 등 성악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페라 작곡이 가장 중요했다.

이는 18세기 유럽 음악의 중심이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대규모 연주회장에서 기악곡 콘서트가 성행한 19세기와 달리 18세기에는 기악곡이 실용적인 것이어서 작곡가에게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하이든의 경우에도 작품을 말할 때는 오페라를 말했지, 기악곡은 단지 사족으로 열거하는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청년 모차르트가 뮌헨의 궁정에 취직하고자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 내세운 것도 ‘이미 이탈리아에서 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사실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유럽 여러 나라를 방랑하던 중 세 번이나 이탈리아를 찾은 것도 오페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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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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