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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③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집은 크고 튼튼하며 마당엔 잘 자란 가축이 놀고

  • 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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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가 살았던 금당촌, 이순신 장군이 둔전제를 실시했던 녹둔도, 러시아 군부대에 무참히 짓밟혀 역사속으로 사라진 나선동.
  • 두만강 일대 국경지역에는 수백년 전의 역사와 수십년 전 근대사의 아픈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핫산에 있는 핫산호수. 호수 건너 바라다보이는 철교가 ‘두만강 철교’다.

피터대제만 연안 두만강 일대는 과거 조선, 러시아, 중국 3개국 모두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중의 변방이다. 오래 전부터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민족의 활동무대였지만 땅이 척박하고 깊은 산골짜기와 늪지대가 많아 농사를 짓기에 무척 힘든 곳이었다.

이 지역은 또 3개국의 접경지대로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가간의 관계변화에 따른 국경분쟁의 소지가 상존해왔던 만큼, 거주민들에게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때 200여 개에 달하는 한인마을이 분포해 있었다.

이곳 한인마을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탐험대만의 크라스키노로부터 남쪽 길을 따라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핫산(Khasan)지역이다. 이 길의 끝이 바로 북한, 러시아, 중국 국경이 만나는 핫산이다. 그곳에서 마주보이는 두만강 건너편이 북한의 경흥이다. 핫산의 남쪽은 늪지대다. 길이 없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으로 과거 크라스노예 셀로라 불렸던 녹둔도(鹿屯島 또는 鹿島)가 있다. 크라스키노에서 크라스노예 셀로에 이르는 중간 지역 곳곳에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까지만해도 한인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다른 지역은 크라스키노로부터 서쪽으로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따라 중국의 훈춘(琿春)에 이르는 곳이다. 과거 크라스키노와 훈춘 사이의 이 지역에도 한인마을들이 여러 군데 형성돼 있었다. 이 길은 현재도 훈춘으로 들어가거나 반대로 중국에서 러시아로 나오는 상인이나 관광객들의 주요통로다.

“길이 구릉 위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영국의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4년 가을 조·러·중 3국의 국경지역을 방문했다.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지대를 거쳐 조선 경흥과 중국 훈춘을 직접 보고자 했던 그녀의 노정은 크라스키노를 떠나 크라스노예 셀로를 거쳐 다시 훈춘과의 국경지방으로 이어졌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은 그녀가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꼈던 바를 기록하고 있다.

비숍의 책을 보면 핫산으로 가는 중간에는 포시에트만 해안을 따라 여러 개의 한인마을들이 있었다. 주민들은 염전을 일궈 소금을 만들었는데 정제과정을 거친 소금은 중국의 훈춘으로 운송했다. 바닷가로부터 내륙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가 곳곳에 한인마을이 있었다. 그 광경을 비숍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아름다운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한인의 집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인의 집은 다 허물어져 쓰러질 것 같고 얼마 되지도 않는다. 무단으로 점유했든 구입했든 한인들은 토지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가축을 길러 땅을 아주 비옥하게 만든다. 깊게 갈고 작물을 돌려가며 재배해 상당한 수확물을 거둔다.”

오늘날 핫산에 이르는 도로는 비교적 상태가 좋다. 도로 양편으로 펼쳐져 있는 평원과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낮은 구릉 사이로 쭉 뻗어 있는 것. 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늪과 개천이 많아 다니기 쉬운 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숍은 “달리는 마차 앞에 뻗은 길이 구릉 위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는데, 특히 처음 40베르스타(약 42km) 거리에 늪이 많았다”고 적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고지도에도 이 지역은 팔지(八池)라고 표시돼 있다. 여덟 개의 크고 작은 호수 또는 못들을 의미하는 것. 또한 홍양호(洪良浩)의 ‘북새기략(北塞記略)’에 의하면 팔지 주변지역은 알동(斡東, 音은 烏東)이라고 불렸다. 특히 여덟 개 호수 가운데 세 번째 호수 위에 있는 산의 이름이 흑각봉(黑角峯)인데, 그 산밑 금당촌(金堂村)이란 촌락이 조선왕조의 창건자인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5대조 목조(穆祖)가 경흥의 용당(龍堂)으로부터 옮겨와 살던 곳이다. 초기 한인농민 마을 가운데 하나다.

물 속에 담긴 듯한 자레치예

러시아의 고지도를 보면 이 지역의 강과 호숫가에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한인마을들이 산재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와 문헌자료에 나타난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마을은 자레치예(Derevnia Zarech’e)다.

크라스키노로부터 25베르스타(약 27km) 떨어진 곳에 있던 자레치예에 1880년 지신허, 연추, 그리고 조선 국내로부터 이주해온 농민 14가구가 정착했다. 이후 조선으로부터의 이주가 금지된 1889년까지 주민의 수가 늘어갔고 주변지역에도 여러 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1895년경에는 포시에트만의 토본가이만[(Zaliv Tobongai, 현재의 레베디니이만(Zaliv Lebedinyi)]으로부터 두만강가의 박석골마을(Paksekori)에 이르는 자레치예 평원에 8개의 마을이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자레치예’라는 이름은 이들 8개 마을의 총칭으로도 쓰였는데, 좁게는 삭파우호[(Ozer Sakpau, 현재 자레치예 호수 Ozer Zarechnoe)]가에 위치했던 마을 하나를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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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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