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계백 장군충청도 사투리 썼다

  • 글: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tohsh@chol.com

    입력2003-08-25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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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일러스트·홍성찬

    드라마나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방영되었던 KBS의 ‘태조 왕건’을 시청하면서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황산곡(黃山谷)의 격전 장면이 틀림없이 나오려니 하고 은근히 기다렸다. 태조 왕건 하면 우선 이곳 전투부터 떠오를 정도로 역사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유서 깊은 개태사(開泰寺)가 자리잡고 있는 황산곡(黃山谷,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天護里)이다.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격전 끝에 승리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 있다.

    태조 왕건은 승전 기념으로 격전지인 황산곡에 ‘나라를 크게 열다’라는 뜻을 담은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천호산’이라 불리며 산 아래 마을은 지금도 ‘천호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백제 장군 계백은 왕건보다 3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 지 여부에 대해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계가 있는 그의 출생지와 생활 근거지(주소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백제어에 관한 이모저모도 종합적으로 밝혀야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막연한 아득한 옛날 한반도의 언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제어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백제어의 기원을 증언하는 횃불의 존재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앞에서 제시한 ‘위례홀’과 쌍벽을 이루는 ‘미추홀’의 별명이 ‘매소홀’(買召忽)인바, 이 별칭의 첫글자 ‘매(買)’가 ‘매홀(買忽=水城, 요즘의 수원)’ 등과 같이 ‘수(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부 지역의 남단인 청주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인데, ‘매(買)’가 어미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수 간만(干滿)의 이름에도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중부지역의 남단인 어청도에선 음력 초하루를 ‘일굽매’라고 부르는데, 남부지역의 북단인 흑산도에선 ‘일곱물’이라고 한다. 열이틀은 어청도에선 ‘세매’, 흑산도에선 ‘서물’이다.

    이처럼 ‘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분포되었고 마한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어는 부여계어를 쓰던 ‘위례홀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백제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제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이른바 경기도 ‘한홀’(漢城) 시대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홀’(현재의 경기도 광주)은 백제 시대 전기·중기(BC 18~AB475년)의 중심이었다.

    ‘백제 역사=공주·부여시대’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이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 1-3 지명에 의거하여 그려진 삼국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황해·경기·강원 영서·충북) 지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475년) 이후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백제의 역사가 상당 부분 묵살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가 애써 감춘 사실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에 그 단초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의 전기·중기 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과 국내성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살수(청천강)였다. 따라서 백제의 중기 말(475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전·중기 판도를 그린 결과 중부지역이 오히려 백제의 소유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인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 언어는 백제어였음에 틀림없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 무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겨우 77년간만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토착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의 전기·중기어로 봄이 타당하다.

    지명은 가장 보수성이 강한 언어다. 경기·충청지방의 지명들이 고구려어도, 마한어도 아닌 백제어(위례홀어)와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잠시 지명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고장이었던 ‘바빌론’을 비롯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우르크’, 아수르왕국의 수도 ‘아수르’ 등의 옛 지명이 5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라크 전역에서 지명으로 쓰이고 있어 얼마 전 이라크전쟁 보도 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백인들이 점령하기 이전 인디언 지명과 하와이 원주민의 지명이 그대로 쓰인다.

    백제어 중 수를 세는 어휘인 밀(3), 옻(5), 나는(7), 덕(10)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를 세는 단어가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일(1), 이(2), 삼(3) 등 중국의 수사체계를 빌려 쓰고 있음이 좋은 본보기이다. 다만 우리는 고유의 수사체계를 아울러 쓰고 있지만 일본은 둘 다 차용하고 있음이 다르다. 이처럼 고대 일본이 백제어의 수사체계를 차용할 정도였으니 다른 어휘의 차용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어가 현대 일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실증한다.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한홀⇒고마(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소부리(현재의 충남 부여)’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하였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언어는 상당기간 존속하는데, 백제어는 망국 후 적어도 1세기 남짓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어의 실질적인 존속기간을 약 800년 정도로 추산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본다.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전기 백제사회도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다. ‘달(達)’은 산(山), ‘단(旦)’은 계곡(谷), ‘매(買)’는 물(水), ‘파혜(波兮)’는 고개(嶺)를 뜻한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홀’이 ‘비리>부리’로, ‘달’이 ‘뫼’로, ‘단’이 ‘실(實)’로, ‘매’가 ‘믈(勿)’로, ‘파혜’가 ‘고개(古介)’로 달리 쓰였다. 고대 호남지방 언어인 ‘바달(波旦-현대의 바다)’에 해당하는 전기 백제어는 ‘나미’로 서로 달랐다. 바다를 뜻하는 현대 일본어는 ‘우미’다.

    전기 백제어의 수사 체계는 독특했다. 백제 지명에서 ‘밀’(密=3), ‘옻’(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과 같이 기본수 네 개가 발견된다. 이 수사들은 ‘셋, 다섯, 일곱, 열’이라는 현대 한국어 단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오히려 일본어와 연결된다. 백제가 한반도 내의 전기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전기 백제어의 상당부분이 한반도에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신라어에 비해 백제어는 중기에 이르러 상당히 다르게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정치단위가 하나라고 해서 언어적인 면에서도 단일한 것은 아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두 국어로 쓰는 스위스가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사례를 중기 백제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언어였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알 수 있다.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 옮긴 도읍지 공주 시대로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어는 이 후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백제사 668년 중 185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하다. 언어는 곧 문화발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발달한 문화는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특히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한 이후 122년간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발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졌더라면 백제 말기 언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 수준의 자료는 아니지만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단어들이 전·중기의 것들만큼이나 이 시기에도 남겨졌다.

    나라가 멸망한 후 백제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가 함락된 뒤 백제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다. 거의 100여 년이나 끈질기게 지속하였으니 그 저항정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항정신 속에 언어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소중한 우리말을 빼앗긴 적이 있다. 이후에 한국어는 되살아났지만, 백제어는 백제 멸망 100여 년 뒤 소멸되고 만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언어 통일을 위하여 전국의 고을 이름을 한자(漢字) 지명으로 개정했다. 신라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백제어 억압 정책’은 백제어의 소멸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외세에 의해 언어탄압을 받지 않은 일본의 언어에 고대 백제어의 잔재가 매우 많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백제어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역사 자료를 토대로 후기 백제어 단어들을 정밀 분석해보자.

    ● 고마 :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라 불렀다. 이 이름이 ‘용비어천가’(1445)에 나오고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북쪽’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형 변화 과정으로 따져볼 때 ‘고마’가 줄어 ‘곰’이 되었듯이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 ‘서울’의 본 뿌리는 ‘소부리’이다.

    ‘님’의 기원은 백제어 ‘니리므’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후진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 니리므 :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 이처럼 현대어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계백 장군의 영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삼충사 소장.

    나라 잃은 언어는 결국 쇠퇴하여 한 지역의 방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백제어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다. 그렇다면 백제어를 계승한 방언은 지금 어느 지방의 방언일까. ‘표준 백제어’를 계승한 현대어는 바로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으로 추정된다(충남 공주 부여 논산 서천 보령과 전북 익산 방언).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백제어는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중기에 이르러 호남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선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혼용되어 단일 언어사회에 가깝게 됐다.

    그러나 백제 후기에도 왕족과 귀족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명할 정도로 부여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상류층은 여전히 부여어계 백제어를 구사했다. 마한어를 토대로 부여계어가 혼합된 형태의 백제어는 주로 피지배층이 사용했다.

    즉 상류층은 백제 멸망 때까지도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여어계 언어를 계승, 사용한 것이다. 이들 상류층의 언어는 후기 백제의 수도, 즉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수도권 백제 표준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호남 방언은 마한어에서 주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충남 공주-부여 방언은 호남 방언과 언어학적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따라서 충남 공주-부여 방언이 후기 백제의 수도권 표준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계백 장군은 제2품(달솔)의 고관, 즉 상류층 귀족계급으로 백제의 수도인 부여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계백장군은 수도에 거주하는 백제 상류층이 사용한 언어, 즉 백제 표준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계백 장군이 굳이 현대 한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호남 사투리가 아닌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다만 부여어계와 마한어가 백제의 영토 내에서 혼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호남 방언도 수도권 백제 표준어의 특징들을 상당부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벌 전투를 백제 표준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누르리모이부리에서 산화한 패장 계백은 어떤 인물일까. 이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열전의 기록뿐이다.

    이 전투에서 맞서 싸운 신라 장군 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10권 중 3권에 나누어 자세히 기술하였으나 계백은 열전 제7의 13인 중 맨 끝에 소개하였는데 그나마 짤막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계백이 생포했다가 돌려보낸 화랑 관창에 관한 내용이 배나 길다. 승자에 비해 패자의 모습은 이렇듯 초라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생지(生地)와 가계를 확실히 밝히며 서울(서라벌)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계백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백제 사람이라는 것과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 되었다고 적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階伯, 텏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를 동음이자로 표기한 것을 보면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씨는 기록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백제 인물들이 ‘장군 允充(윤충) 殷相(은상), 좌평 成忠(성충) 義直(의직) 興首(흥수) 忠常(충상) 常永(상영), 달솔 自簡(자간) 助服(조복)’ 등과 같이 성씨 없이 이름만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삼국사기’엔 신라왕은 박·석·김(朴·昔·金) 3성으로 불렀지만 백제왕은 성씨 없이 온조, 다루, 기루, 개루 등과 같이 이름만 적혀 있다. 백제에서는 왕처럼 백성들도 이름만 불렀을 것이다.

    백제인은 두 자 성씨, 두 자 이름

    계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 열거한 다른 이름들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계백의 의미도 알 수 없다. 신라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밝아누리’,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지(毗處)’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염독(厭獨)을 ‘이차돈(異次頓)’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이름은 신라처럼 한자어로 표기한 별명이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백제 왕명 중에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는 무령왕뿐이다. 무령왕은 부모(왕과 비)가 국빈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중에 왕비가 일본 규슈(九州)의 북쪽 한 섬에서 해산하였다.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세마(斯麻=嶼)’라 불렀다고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마(斯摩)로 적혀 있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적혀 있어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백제어 ‘세마’ 또는 ‘사마’에서 기원하여 ‘섬(島)’이라는 현대 한국어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고마(熊)’가 변하여 ‘곰’이 된 것처럼 끝 모음을 잃고 단음절로 줄었다. 백제는 왕성이 ‘부여(扶餘)’씨이고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장수 은솔(西部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 별부장(別部將)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은 한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 반면 현대 일본인은 계백 등 고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계백 장군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가 거주하였던 곳은 어디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계백의 출생지와 거주지가 어느 문헌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러 모로 탐색하여 짐작할 뿐이다. 역사서는 귀실복신을 서부 달솔이라 지칭하였으니 그가 서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계백도 예외가 아니다. 계백의 벼슬이 달솔이었으니 품계로 따지면 제1품인 좌평(佐平) 다음가는 높은 자리이다. 이러한 그의 벼슬로 미뤄보아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 사람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더구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 왕이 그를 구국의 선봉장으로 삼았다면 그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누르리모이부리 전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황산벌(黃山之野)은 어디였을까.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 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라 명명한 것이다.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계백 장군은 백제 수도인 현재의 충남 부여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도권 표준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에 있는 백제 별궁의 연못 궁남지.

    이들 여러 지명 중에 어느 곳이 당시의 결전장이었을까. 본래 싸움터란 일정한 곳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싸우다가 다른 장소로 밀려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굳이 지정한다면 ‘누르미, 누르기, 황산리’ 일원이 아닐까. 전해 내려오는 ‘황산벌 싸움’의 지명 ‘黃山, 누르모이’와 같기 때문이다. 상당히 넓은 이 벌판은 계백 장군의 지휘사령부에서 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하던 사령부는 황산성(黃山城)에 위치해 있었다. 누르모이 싸움의 요새였던 이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93보(步)이고 성 안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필자는 소년 시절 황산성에 있었다는 이 샘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수량이 많고 깨끗해서 물맛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황산벌 성터는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북쪽은 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멀리서 움직이는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위치로 서쪽으로는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성)가 아련히 보인다. 이 성터 지휘대에 올라서서 구름처럼 몰려든 신라군과 맞서 싸우며 계백장군은 한두 번쯤 서울 소부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한반도 서부와 일본을 호령하던 ‘700년 제국’ 백제의 멸망을 예감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논산시 관동은 화랑 관창에서 유래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이 있다. 이 산골의 이름은 신라 화랑 관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제7에 화랑 관창(官昌 또는 官狀) 이야기가 나온다.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백제를 침공할 당시 관창은 부장(副將)이었다. 신라 군사가 느르뫼벌에 이르러 백제군을 네 차례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에게 홀로 백제군에 진격하여 용맹을 떨치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관창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백제군을 여러 명 죽였다. 그러다 사로잡혀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 장군이 관창의 갑옷을 벗기게 하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감함을 어여삐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선비가 많다. 소년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는 어떠하랴” 하며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내가 아까 적진에 돌격하여 장수의 목을 베고 영기(營旗)를 꺾지 못하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다시 쳐들어가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외친 후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뒤 재차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맹스럽게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이번에는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말이 관창의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자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라고 외쳤다. 이를 본 모든 군사가 분개하여 목숨 받쳐 굳게 싸우기로 결의한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해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으며 후대에 ‘창’이 생략되어 ‘관골(官洞)’이 되었다가 현재엔 관동이 됐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忠谷里) 마을 북쪽 산기슭에 1340여 년 전에 사망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다. 최후의 결전장에서 직선으로 거의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계백은 비록 패했지만 5000의 군사로 5만 군사와 싸워 네 번을 격퇴시킨 충장(忠將)이었다. 그가 전사한 후 어떻게 여기에 묻히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사한 장군을 누군가 남몰래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에서 이곳 부근에까지 밀려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이곳 충곡리에서 전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곳은 백제 서울 소부리 쪽으로 후퇴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백제 충신 계백의 무덤이라는 전설로 인하여 이곳은 지금도 충곡(忠谷)이라고 불린다. 지명이 지닌 역사적인 증거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묘가 가짜일 수도 있다 하여 의심해왔다. 의심을 풀기 위하여 1966년 여름 실제로 묘를 파 보았는데 증거물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묘는 계백 장군의 묘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우선 묘 속의 길이가 12척이요, 넓이가 6척이나 되며 석회로 천장을 다섯 층이나다진 것 등은 상고(上古)시대의 무덤 규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곡이라는 지명이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조선 영조 18년(1692년)엔 충곡서원이 창건되어 계백 장군을 배향(配享)하였다.

    최근 논산시가 계백 장군 묘의 봉분을 장군 묘답게 키우고 묘역도 넓혔다. 묘소에 충혼비도 세웠다. 아울러 부근에 계백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앞의 넓은 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000 결사대 최후의 순간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계백의 벼슬은 달솔이었다. ‘달’은 백제어로 ‘높다(高)’는 뜻이다. 또한 ‘달’은 ‘아사달(阿斯達=九月山)’, ‘부사달(夫斯達=松山)’, ‘소물달(所勿達=僧山)’ 등과 같이 산(山)의 뜻으로도 쓰였다. 달솔(達率)은 대솔(大率)로 다르게 적기도 하였다.

    고유어 ‘한’을 한역하면 ‘大’이다. 대전(大田)을 ‘한밭’, 대천(大川)을 ‘한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솔’은 고구려의 벼슬이름 중에서 ‘욕살(褥薩)’의 ‘살’에 해당한다. 이 ‘살’, ‘솔’이 변하여 후대의 ‘슬’이 되었다. ‘벼살’이 ‘벼슬’로 바뀐 것이다.

    계백 장군은 장졸 5000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 소부리를 출발하여 ‘두락모이(石城)’를 지나 ‘가디나이(恩津)’를 거쳐 ‘누르리모이(黃等也山)’에 당도했을 것이다. 도착하자 세 진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맞섰다. 아마도 당시의 세 진영 중 제1영은 현 관동리의 서쪽산 위에 축성한 석성 ‘누르모이잣(黃山城)’이고, 제2영은 이 제1영에서 정남을 향해 왼쪽(남동쪽)에 있는 흙성 ‘누르재잣(黃嶺城)’이며, 제3영은 오른쪽(서남쪽)에 있는 흙성 ‘오이잣(外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령탑인 제1영을 중심으로 양팔을 벌린 듯이 두 진영이 펼쳐 있어 적을 품안에 끌어들여 섬멸할 수 있도록 설치됐다.



    계백은 5000 결사대를 작전에 알맞게 3개 진영에 분산 배치하고 주성인 제1진영에 올라 총지휘하여 10배가 넘는 5만여 신라군을 네 차례 격퇴했다. 그러나 싸움이 계속되면서 기진맥진한 백제군은 신라군의 다섯 번째 진격을 맞아 ‘누르리모이부리’ 마지막 싸움에서 마침내 전멸한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계백은 후기 백제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고마·소부리’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화 속 계백 장군은 공주·부여 지방 방언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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