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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農人 장영란의 우리 땅, 우리 맛 ⑥

들판엔 나락 익어가고 산에는 빨간 오미자와 보랏빛 머루가

  •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들판엔 나락 익어가고 산에는 빨간 오미자와 보랏빛 머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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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집 지은 이곳은 가로등이 없다. 이웃집 불빛도 제법 멀다. 그러니 우리 집 불을 끄면 어둠뿐. 하루는 밤에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절대 고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물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믐이었다. 그믐의 어둠과 고요. 어둠과 고요가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

거꾸로 밤에 자려고 모든 불을 다 꺼도 대낮처럼 환할 때가 있다. 사물이 하나하나 다 보여, 마당의 흙 알갱이까지 보이는 날. 그런 날은 보름이지. 그런 날은 나도 모르게 한밤중에 논으로 내려가 논둑을 거닐기도 한다. 달빛을 받고 서 있는 벼들. 달빛이 벼 잎으로 스며드는 느낌. 보름달이 신비하다.

전깃불에 익숙해져 보름이 뭔지 그믐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서울 아파트에 살 때, 딸애 유치원에서 달을 관찰해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밤에 나가 거닐며 밤하늘을 보았지만 달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달보다 더 환하고 큰 가로등.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마다 불빛을 쏟아내고, 그러고도 모자라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그 속에서 달을 보기는 힘들었다.

이제야 알지만 달이 밤하늘에 늘 떠서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보름달은 긴 밤 내내 보이지만, 초승달과 그믐달은 때를 알고 보아야 한다. 초저녁에 잠깐 떴다가 지거나 새벽에 나타나기도 하니.

자연에 살아가니 달이 보인다. 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데 따라, 보름에 환한 달빛을, 그믐에 어둠을 그대로 맞이할 기회가 있다. 달이 보이니, 어두울 때 어둡고 환할 때 환해야 자연에서 자라는 곡식도 사람도 제대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위해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천지 운행을 기록하여 달력을 만들고, 육갑을 정하여 하루하루를 이해하였고, 경험을 정리하여 풍년과 흉년을 점치고, 때와 땅에 맞춰 농사하는 법을 연구·정리하였다. 옛 농사 책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보면 곡식마다 심고 거두기에 좋은 날을 자세히 정리해놓았다. 하나를 들어보면, “벼 파종은 무(戊)일이나 기(己)일, 계(季)일(음력 18일)에 하는 것이 좋다. 벼 파종을 꺼리는 날은 인(寅)일, 묘(卯)일, 진(辰)일이다.”

인디언 이야기인 ‘The education of Little Tree’를 보면 인디언 할아버지가 씨 뿌리는 날을 잡는 이야기가 나온다. 밤하늘을 살펴보고, 바람 부는 것도 살펴보고, 새 소리도 듣고 씨를 뿌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대안교육으로 널리 알려진 루돌프 슈타이너. 그는 옛 독일 농부의 지혜가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하며 농업강좌에서 ‘식물의 생장에는 우주 전체가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슈타이너의 제자인 마리아 둔은 40년 넘게 실험하고 연구하여 한 해 농사력을 만들고 있다. 정농회는 그 농사력을 가져와, 해마다 우리나라에 ‘생명역동농법 농사력’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세계다.

곡식도 밤에 어두워야 잘 자라

비가 오기에 앞서, 서리가 오기에 앞서, 그 조짐을 알 수 있다는데, 나는 아직 자연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달력에 빼곡이 적어놓고, 거기에 따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자연의 흐름이 조금 보인다. 그래서 정농회에서 내는 생명역동농법 농사력에 따라 농사를 해왔다.

해, 달, 별의 움직임에 따라 작물의 열매, 꽃, 잎, 뿌리에 좋은 시간이 있단다. 거기에 맞춰 열매, 꽃, 뿌리, 잎 그리고 쉬는 시간을 달력으로 표시하고 있다. 오늘이 열매의 날이라면 곡식을 심거나 돌보고. 잎의 날이라면 잎을 먹는 남새 농사를 한다. 뿌리의 날이라면 무, 감자와 같이 뿌리식품을 심고 가꾸고. 농사일을 쉬는 게 좋은 시간인 휴경일도 있다.

우리가 농사력에 따라 살아가니, 한가하게 이웃집에 마을을 가면 이웃이 “오늘이 휴경일”이냐고 묻기도 한다. 해마다 봄이면 한 해 농사력을 받아보는데, 일년 365일 날마다 적당한 때를 미리 내다보는 농사력의 신비. 몇 년을 따라하다 보니 몇 가지 나름대로 몸에 익기 시작한다.

하늘이 열리고 날이 맑을 때 곡식을 심고, 거두고. 비가 오고 흐릴 때 잎채소를 돌보지. 왠지 음산한 기운이 도는 날은 대부분 휴경일이기 쉽고. 날이 맑은 날은 꽃의 날이나 열매의 날이다. 봄에 장 담글 때 보면 신기하다. 우리 전통의 장 담그는 날인 말(午)날. 이 날은 어김없이 맑고, 또 열매의 날이나 꽃의 날이곤 하다. 열매를 먹는 나무나 곡식은 달이 차오를 때 심는다. 달이 차오르는 기운. 그 기운을 받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뿌리를 먹는 무, 고구마, 감자는 달이 기울 때 심는다. 달이 기우는 기운을 받고 땅 깊이 들어가라고.

사람도 잠잘 때 어두워야 깊은 잠을 잘 수 있듯, 곡식도 밤에는 어두워야 잘 자라리라. 앞에 이야기한 논주인 할머니가 왜 가로등을 끄고 싶어했는지. 이제는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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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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