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失鄕記

이역 땅에서의 풍찬노숙(風餐露宿) 27년

失鄕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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失鄕記
1990년 12월 나는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1963년 6월 조국을 등졌으니 실로 27년 만의 일이었다. 고향 제주에서 하는 말로 가시나무에 드러누워도 단잠을 잘 푸른 나이에 이 땅을 떠나 백발이 성성해져 돌아왔다. 누가 내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제 발로 걸어나가 삼십여 성상(星霜)을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한 것이다.

1953년 6·25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휴전 협상이 무르익어갈 무렵 나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제주시 화북동에 터전을 잡고 6대째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던가. 아버지는 조부의 명에 따라 서울서 유학하여 동성상업고등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뒤 철도국 회계과에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이북 여러 지방을 전전하던 우리 식구는 평양에서 6·25를 만났다. 그리고 1·4 후퇴 때 어머니와 네 동생을 남겨둔 채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형만 월남했다. 부산을 거쳐 제주로 낙향해 보니, 혼자 된 할머니가 소작을 부쳐가며 근근이 농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북에서 철도전문학교 전기과 2년을 다니다 온 나는 교원 양성소 단기 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 대정국민학교로 발령받은 참이었다. 스물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서는데 김흥태 선생이 나를 불렀다. 김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위였지만 같이 월남한 처지라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김선생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보고 있던 신문(제주일보)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육군 제2기 노어(露語) 통역장교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대충 훑어보고 고개를 들자 김선생의 열띤 시선이 나를 마중했다. 나는 그 눈길이 무얼 뜻하는지 금방 알아챘지만 짐짓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김선생이 “바람도 쐴 겸 부산에 한번 갖다오자”고 했다. 시험 장소가 부산 병사구 사령부였다. 이북에서 제1 외국어로 공부한 터라 노어 구사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나이 제한이 문제였다. 응모 자격란에 만 23세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또 월남 후 입대한 형이 이미 전방에서 소위로 근무중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넓은 세상 진출 위해 통역장교 도전

그날 저녁 김선생은 하숙집까지 날 쫓아와 “청춘을 이렇게 접장질이나 하면서 썩일 거냐”며 비위를 긁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징집을 기다리고 있었고 제주를 떠나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고 싶었다. 나는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계모를 집에 들였다. “집에는 살림하는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당신이 늘상 물고 있던 장죽(長竹)으로 놋재떨이를 두드리며 할머니가 부추기기도 했지만 이북에서 부모님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책상물림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주말마다 화북 본가에 들르던 내 발길이 계모가 들어온 이후 점차 줄어들 때었다.

제주를 뜨기로 마음을 굳힌 나는 호적초본의 생년월일을 34년 생에서 31년생으로 변조하고 응모 원서를 제출했다. 김선생과 나는 ‘로서아어 4주간’이라는 일본 책을 구해 같이 공부했다.

한 달 후 집에는 잠시 출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부산으로 갔다. 필기 시험이래야 기본적인 문법과 간단한 작문, 번역을 하는 것이었다. 구두시험 시간엔 통역 장교를 의미하는 앵무새 병과 배지를 어깨에 단 비쩍 마른 중위가 노어로 성명과 직업 및 통역 병과를 지원한 동기 등을 물었다. 나는 떠듬거렸지만 별 실수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나중에 가까이 지내게 된 그 중위의 이름은 김학수였다. 그는 후일 유명한 노문학자가 되어 내 조카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두 김학수 번역판으로 읽었노라 했다.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돌아와 다시 아이들과 뛰놀며 시험 본 사실 자체를 잊어갈 무렵 나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교장은 학교 걱정은 말고 얼른 통지서에 맞춰 출발 준비를 하라며 덩달아 기뻐해줬다. 김선생도 합격했다. 나는 뛸 듯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논밭 팔고 공부시킨 아들이 객지로만 떠돌아 못마땅했던 할머니도 ‘사람은 그저 꼴 베고 소 먹이며 농사짓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얘기를 꺼내지 못한 가운데 김선생과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나는 짤막한 편지를 아버지 베갯머리에 놓아두고 집을 빠져나와 제주시 산지항에서 김선생을 만났다. 배가 출항하기 몇 분 전 “승객 중에 이춘식이가 있으면 찾는 사람이 있으니 하선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뱃고동이 울리고 닻이 올라갈 때 갑판으로 나가보니 저만치 부두에 우왕좌왕하는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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