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바람, 雲海, 심산계곡 ‘달력속의 풍경’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3-11-27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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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두대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한반도의 역사다.
    • 오랜 세월 한민족의 애환을 묵묵히 지켜보며 보듬어온 삶의 터전이자 뿌리다. 백두대간은 곧 우리다. 백두대간 종주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2003년 10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1년1개월 동안 백두대간 대장정을 시작한다. 지리산은 그 첫걸음이다. 지리산은 계절마다 시간마다 수천만 가지로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람, 雲海, 심산계곡  ‘달력속의 풍경’

    코재에서 내려다본 지리산 전경.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여지편람’의 ‘산경표(山經表)’에 등장하는 명칭이다. 이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백두대간이고, 백두대간의 양 끝을 이어주는 것이 정간(正幹),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정맥(正脈)이다. 결국 산경표는 한반도를 1대간 2정간 12정맥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지리 수업을 열심히 들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체계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이 우리 국토의 등줄기라고 외웠던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아닌 소백산맥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준봉일 뿐이기 때문이다(일제시대 일본의 지리학자와 지질학자들이 한국의 산맥을 거론하면서 한 목소리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강조한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튼 산맥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지형을 파악하는 이론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학계의 주류로 등장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의 논리로서 ‘산경표’의 백두대간 체계는 태생적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내포하게 됐다. 1980년대 민족사학의 르네상스와 더불어 백두대간이 새롭게 주목받은 것이나, 역사의 자주성을 중시하는 재야 사학자들이 백두대간의 복원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백두대간의 세부 구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짧게는 30여 개 구간에서부터 길게는 50여 개 구간으로 나뉘기도 한다. 필자는 이 가운데 강승기 선생이 구분한 44구간을 중심으로 종주기를 쓰고자 한다. 강승기 선생은 1995년부터 2001년 사이에 남한 땅에 있는 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을 모두 종주한 산악인으로, 특히 산경표를 신봉한다. 필자가 이번 호에 소개할 구간은 1~2구간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지리산 종주 능선이다.

    개천절 오후, 지리산으로 떠나다



    필자는 2003년 10월3일 개천절,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왜 하필 개천절인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필자가 현재 몸담고 있는 국가기관의 국정감사가 전날(2일) 끝나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조금 더 늦추면 가을철 국립공원 입산통제기간에 발목이 잡힐 것 같아 부득이 휴일 오후에 짐을 꾸린 것이다.

    확실히 요즘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 편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지리산을 가려는 사람들이 전라선 막차에 몸을 실었지만, 요즘은 백무동이나 중산리로 직접 들어가는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대전에서 진주까지 새롭게 뚫린 고속도로는 지리산을 한결 가깝게 끌어들였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무르면 지혜를 얻어 달라지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지리산(智異山)은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백두산이 반도를 타고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두류산(頭流山), 한라산 금강산과 함께 신선이 사는 세 개의 산이라는 의미의 삼신산(三神山), 큰 스님의 처소라는 뜻을 가진 방장산(方丈山) 등이 그것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민족은 지리산에 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왔다.

    지리산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드넓게 펼쳐진 산이다. 넓이로는 1억3000만평이나 되고 둘레로는 무려 800여 리에 달한다.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은 한라산을 제외하면 남한에서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에는 10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에 이른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묘한 매력으로 마니아들을 유혹하는 산, 남한 최대의 산이면서도 늘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산. 한국인은 그런 이유로 이 지리산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오후 7시30분 중산리에 도착했다. 중산리는 지리산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곳이자 백두대간의 출발점이다. 이곳에서 20여 년째 지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주성근 계장을 만났다. 주계장과는 벌써 수 년째 지리산을 드나들며 인연을 맺어온 사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겠지만 뭔가에 20년 이상 몰두하면 도가 트이고 마음으로 사랑하기 마련인가보다. 주계장은 소주잔을 비우자마자 국립공원에 대한 걱정부터 털어놓는다.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데 있어 선진국과 한국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외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데, 한국은 길을 막고 파헤치고 난리 법석을 떨거든요. 홍수가 나서 둑이 무너진다고 시멘트로 다 발라버리면 그건 이미 자연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주변의 땅을 사들여서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래야 미생물이 자라고 다람쥐나 노루가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주계장의 얘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지리산에 사는 기인들이며 지리산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무용담을 끝없이 풀어놓기 때문이다. 필자도 지리산이라면 수십 번 들락거리며 웬만한 코스는 다 밟아보았지만, 주계장 앞에서는 입을 다문다. 그에 따르면 “계절마다 시간마다 산의 모습이 다르고,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의 느낌이 다르니, 다니고 다녀도 모르는 게 지리산”이라는 거다. 이런 까닭에 지리산에 깊이 취한 사람일수록 말을 아끼는지도 모를 일이다.

    10월4일. 일찌감치 민박집을 나섰다. 새벽 하늘엔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다. 중산리 매표소 앞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섰다.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듯 싶은 수십 명의 등산객들이 랜턴을 비추며 내 앞을 지나쳐갔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보다 더 긴 행렬이 바쁜 걸음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해발 1915m)에 오르는 코스는 크게 세 갈래. 가장 긴 길이 대원사에서 치발목을 거쳐 써리봉 중봉을 밟는 코스이고, 중간 길이 순두류 아지트를 경유하는 코스이다. 가장 짧은 길은 칼바위를 지나 직접 정상으로 가는 코스다. 나는 이 가운데 최단거리를 택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막차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 9시.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30분 만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30분 정도 빠른 속도였다. 앞서 가던 산악회원들이 워낙 빨리 걸어서 거기에 보조를 맞추다 보니 당초 계획보다 일찍 정상에 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천왕봉 하면 일출에 대한 감회와 기대를 앞세운다. 그 중 압권은 역시 “3대가 공을 쌓아야만 천왕봉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지리산에서 맑은 일출을 보기가 어렵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지리산 천왕봉을 단지 일출만으로 평가한다면 이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비 개인 오후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운해와, 눈보라 날리는 천왕봉에서 굽어보는 조망도 기막힌 절경이다. 어디 그뿐이랴. 천왕봉은 흐리면 흐린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나름의 풍모를 보여준다. 단언컨대 천왕봉은 일단 오르기만 하면 본전 이상을 건질 수 있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은 겨울에 걸어야 제 맛이다. 머리 위로는 눈 터널이고, 허리 아래로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이다. 필자는 친구들에게 이 길을 가리켜 ‘달력 속의 풍경’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앞서 걷는 사람이 눈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장면이 수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달력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거든, 겨울에 이 코스를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9시40분. 장터목 산장은 수백 명의 인파로 북적였다. 해가 중천에 떴는 데도 땅바닥에 비닐을 깔고 누워 비박(야숙)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보인다. 산에 처음 오른 사람들은 비박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지만, 정말 산에 미친 사람들은 산장에 자리가 나도 비박을 고집하곤 한다. 다만 비박은 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안전한 장소, 철저한 장비, 튼튼한 체력 등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비박은 절대 금물이다.

    장터목에서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에선 무엇보다 바람을 즐겨야 한다. 아마도 지리산 종주 능선 가운데 이 코스의 바람이 가장 맵고 사나울 것이다. 필자의 친구는 언젠가 이 길을 걸으면서 “돌멩이가 날아다닌다”고 말한 일도 있는데, 정말 어떤 때는 몸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세석산장을 코앞에 두고 가파르게 올라서면 촛대봉(해발 1703m)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지리산의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지리산 공비토벌 루트 안내도’

    최근 몇 년 사이 지리산 주변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쟁적으로 빨치산 상품화 작업에 나섰다. 이런 탓에 지리산 입구마다 당시 빨치산 들이 쓰던 장비가 진열돼 있는가 하면, 수많은 공비토벌 루트 안내판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중산리 입구의 기념관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승자의 역사만을 일면적으로 기록해놓은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역사의 객관성을 감안한 ‘물건’을 하나 고르자면, 바로 벽소령의 ‘입간판’이 아닌가 한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기상과 혼, 애환이 담긴 명산이다. 해방 이후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빨치산의 의미를 되새기며, 분단의 아픈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빨치산과 토벌대의 투쟁현장을 함께 찾아가보자.’

    세석산장에서 벽소령으로 가는 길은 지리산 빨치산들이 가장 처절하게 싸웠던 현장이다. 먼저 세석산장에서 대성골로 이어지는 계곡은 최후격전지로 유명하고, 벽소령에서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빗점골은 지리산 유격대장이었던 이현상의 아지트로 알려져 있다. 대성골과 빗점골은 찾는 사람이 적어서 일단 산에 들어서면 능선에 오를 때까지 혼자서 산행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고독을 즐긴답시고 함부로 찾아갈 일은 아니다. 지리산국립공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은 뱀도 많고 반달곰이 자주 출몰하는 코스라고 한다.

    오후 2시. 벽소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음정골로 이어지는 옛 군사도로를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음정골은 벌꿀로 유명한 곳인데, 몇 해 전 물난리가 나서 주민들이 큰 피해를 당했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음정골을 내려다보면 상하로 길게 늘어선 줄무늬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산사태의 흔적이다. 음정골로 가까이 갈수록 수마의 상처는 더욱 처절해 보였다. 아직까지도 다리는 끊겨 있고, 나무는 쓰러져 있다. 이 때문에 예전 같으면 마을에서 곧바로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아스팔트길을 한참이나 더 걸어가야만 한다.

    같은 길이지만 다른 길

    바람, 雲海, 심산계곡  ‘달력속의 풍경’

    피아골에서 임걸령으로이어진 산행길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필자와 아들.

    10월 11일. 1주일 만에 다시 배낭을 챙겼다. 이번엔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마천에서 내렸다. 마천은 음정골로 가는 입구로, 지난주에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이 코스를 택한 것이다. 이곳에서 하차한 이유는 더 있다. 바로 마천에서만 맛볼 수 있는 ‘원조 소문난 자장’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 중국집의 사장 겸 주방장은 팔이 하나 없는 분인데, 한 손으로 정성껏 볶아낸 자장 맛이 일품이다. 값은 3000원. 그리 비싸지도 않다. 게다가 주방 앞에 서서 외팔이 아저씨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후 3시30분. 음정골로 들어가기에 앞서 막걸리와 손두부를 샀다. 어차피 산 중턱에서 해가 떨어질 거라면, 취기를 느끼며 걷는 것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음정골로 가는 들녘에서는 추수가 한창이고, 전망 좋은 터에서는 관광객들의 춤판이 뜨겁다. 가뜩이나 좁은 마을길은 관광버스 때문에 더욱 어지럽고, 그 사이사이로 경운기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똑같은 길도 내려갈 때와 올라갈 때가 다르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것 같다. 1주일 전 여유롭게 내려서던 그 길이 다시 올라서려니 적지 않은 피로를 안겨준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다. 해는 떨어졌고 산중에는 몸 누일 곳도 마땅치 않다. 다행스럽게도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민박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샛길로 들어섰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밤길에 단단히 고생할 뻔했다.

    저녁 7시40분. 마침내 벽소령산장에 도착했다. 벽소령은 본래 달로 유명한 곳이지만 구름이 많아 달구경은 진작에 포기했다. 밤길에 힘을 너무 뺀 탓인지 저녁 생각도 없었다. 야외 나무식탁에 앉아 밤풍경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배낭 속에서 적당히 뒤섞인 김치와 손두부가 알싸한 냄새를 풍겼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미군부대에서 일한다는 중년의 아저씨가 막걸리 냄새가 좋다며 옆에 와 앉는다. 필자는 그분에게 막걸리를 따라주었고, 그분은 미군들이 먹는 시레이션을 안주로 내놓았다. 우리는 ‘미군’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서로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산에서는 그런 일도 다 넘어가게 마련이다. 다들 머리를 씻으러 산에 들어왔기에, 조금 복잡해진다 싶으면 자세를 낮추고 알아서 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 雲海, 심산계곡  ‘달력속의 풍경’

    주능선에서 바라본 운해.

    12일 아침 6시40분. 컵라면과 이동식 전복죽을 먹고 연하천을 향해 출발했다. 아내가 일러준 일기예보대로라면 비가 내려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가 올 조짐은 없다. 봉우리 하나 넘을 때마다 하늘 빛이 바뀌었지만 비구름은 보이지 않는다.

    오전 10시. 삼도봉에서 긴 휴식을 취했다. 평소 같으면 뱀사골에서 원기를 회복하고 출발했겠지만, 그곳엔 워낙 사람이 많아서 그냥 달리다 보니 삼도봉까지 왔다.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나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바로 반야봉인데, 지리산 종주에 나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봉우리를 슬쩍 빼버리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야봉은 한번쯤 거쳐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지리산 주능선을 멀리서 바라보면 크게 천왕봉과 반야봉이 우뚝 솟아 있는 모양새를 띤다. 또한 예로부터 반야봉 아래쪽에는 수도승들의 거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산은 사람을 기른다’라는 백두대간 순례기를 쓴 윤제학 선생은 반야봉을 지리산의 ‘심장’이자 ‘나이테’라고까지 평한 바 있다. 반야봉이 간직한 또 하나의 놓칠 수 없는 볼거리가 바로 낙조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가장 운치 있고 장엄하다.

    12시05분. 노고단(해발 1507m)에 도착했다. 노고단의 멋은 운해와 아고산식물군이다. 운해는 여름철 아침에 특히 아름답고 아고산식물군은 자연탐방시간에 둘러보는 게 좋다. 지리산국립공원은 생태계 복원을 위해 곳곳에 출입통제구역을 만들었는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변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역시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최선인가 보다.

    성삼재에서 구례로 내려가는 길은 단풍 관광차량으로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운전자들은 길이 막힌다 싶으면 곳곳에서 경적을 울려대며 통행을 재촉했다. 2차선 도로 위에 불법으로 주차시킨 차량들 때문에 체증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필자는 그제서야 어정쩡한 시간대에 산에서 내려온 것을 후회했다. 단풍철에는 아주 일찍 도망가거나 아주 늦게 빠져나와야, 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다는 충고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단풍을 봐야 ‘거시기’를 하고

    가을에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마당에 지리산의 단풍을 빼놓고 ‘거시기할(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는 고심 끝에 어머니와 네 살 된 아들 녀석을 데리고 단풍구경을 가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네 살짜리가 어떻게 지리산에 오르느냐고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이들은 몸이 가벼워 어른보다 더 쉽게 산에 오르는 것 같다. 다만 무리할 경우 연골 등을 다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쉬면서 올라가야 한다.

    10월27일 새벽 0시25분. 수원역에서 기차를 탔다. 지리산으로 가는 고전적 교통편인 전라선 마지막 열차다. 10월 말은 단풍도 단풍이지만 천왕봉의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때라서 그런지, 기차의 좌석은 대부분 등산객들로 채워져 있었다.

    새벽 5시10분. 구례구역은 서울보다 쌀쌀했다. 구례터미널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피아골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참나무가 많아 다소 밋밋한 것이 지리산 단풍의 특징이라지만, 피아골과 거림 계곡만큼은 설악산 못지않게 화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예상대로 직전마을을 지나 삼홍소에 이르자 사방이 붉게 타는 장관이 연출됐다.

    이곳에서부터 피아골산장으로 오르는 길이 바로 그 유명한 피아골이다. 이 지역 사람들에 따르면 원래는 피가 많이 자라서 피밭골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피아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피아골이라는 지명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데는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영향도 컸다. ‘태백산맥’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하대치’가 빨치산 씨름대회에 출전해서 아깝게 2위를 차지하고, 소를 잡아 축제를 벌이는 이른바 ‘피아골 대합창’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오전 11시. 피아골산장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임걸령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코스는 계단이 많아서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길이다. 아니나다를까, 어머니가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오르는데, 아들 녀석은 저만치 앞서가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확실히 이 녀석은 타고난 산꾼인가 보다. 네 살에 지리산을 세 번이나 올랐으니, 산꾼이라 불러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임걸령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2주 전에 이미 걸었던 주능선 코스. 그래서 이번에는 고개마다 쉬어가며 지리산의 가을 풍경을 만끽했다. 속도가 느려지자 아들 녀석이 조금씩 꾀를 부렸다. 다리가 아파서 못 간다고 버티더니 끝내는 업어주지 않으면 안 가겠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럴 때는 당근이 필요한 법. 필자는 오르막길에서 목마를 태워주고 내리막길에서 손을 잡고 걷는 방법으로 노고단까지 아들을 무사히 데려갈 수 있었다.

    저녁 6시. 노고단산장에서 김치찌개를 끓여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들 녀석이 배가 아프다며 끝없이 우는 것이다. 뭔가 심통이 단단히 난 모양이다. 필자는 아들의 배를 문질러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집에 가면 엄마가 ‘판판이’(블럭 장난감의 일종)를 사준대.” 아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 다음에는 ‘판판이’하고 같이 지리산에 오자.”

    지리산은 아직도 남아 있고

    새벽 2시. 아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다시 보채기 시작했다. 필자는 아들에게 두꺼운 옷을 입힌 뒤 산장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필자는 아들에게 별자리를 설명해주며, 노고단 주변을 산책했다. 하지만 아들은 별보다 아빠의 머리에 붙어 있는 랜턴 불빛이 더 좋은 모양이다. 랜턴을 벗어서 아들의 머리에 씌워주자, 갑자기 만화영화의 로봇 목소리를 흉내내며 온갖 포즈를 취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산장으로 돌아왔다.

    28일 아침 6시. 즉석 사골우거지국을 끓여 아침을 먹고 성삼재로 내려왔다. 백두대간 첫 번째 코스는 여기까지다. 원래는 성삼재에서 만복대와 정령치를 지나 주촌리 쪽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으나, 어머니와 아들의 몸 상태를 감안해서 성삼재에서 일단 길을 멈추기로 했다. 지리산을 한번에 끝내기엔 왠지 아쉬움이 남는 데다, 제2구간을 성삼재에서 시작한다는 핑계로 지리산의 가을을 한번 더 느끼고 싶은 욕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제 중산리에서 성삼재까지 왔다. 빨리 달리자면 하루에 내칠 수 있는 코스를 세 번에 걸쳐 나누어 걸은 셈이다. 지리산국립공원 관계자에 따르면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5시간여 만에 주파하는 철인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산을 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막히면 쉬었다 가고, 지치면 다음을 기약하는 기분으로 백두대간 종주에 나서려 한다. 결코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이는 긴 여정을 통해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일 테고, 필자의 감동이 여과 없이 ‘신동아’ 독자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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