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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21)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당신은 타락한 전문가인가, 참된 지식인인가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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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주류 부랑적 지식인은 사이드가 말한 ‘망명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사이드가 비코를 스승으로 모신 이유는 비코가 바로 그런 지식인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망명은커녕 평생을 나폴리에서만 산 비코는 18세기 이탈리아 사회에서 고독한 한계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에서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9월24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9 월24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오리엔탈리즘’의 번역자이자 오랫동안 사숙한 제자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후 그의 이름이 한국에도 본격 소개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이 글은 사이드의 죽음에 바치는 조사(弔詞)다. 사이드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며, 누군가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당장 ‘오리엔탈리즘’이라 할 만큼 내 인생에 충격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이드에게 위대한 스승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18세기의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다. 사이드는 1975년 ‘시작-의도와 방법’이라는 책에서 비코를 언급했고, 1993년 ‘지식인의 표상’에서는 비코를 자신의 영웅이라 불렀다. 이는 사이드가 죽기 직전에 쓴 ‘오리엔탈리즘’ 2003년판 서문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사이드와 비코의 관계는 물론, 비코라는 인물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비코를 이해하려면 벌린(Isaiah Berlin, 1909~97)이 1976년에 쓴 책 ‘비코와 헤르더’(번역 출간)를 참고해야 한다. 벌린에게도 비코는 정신적 스승이었음에 틀림없고, 사이드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선구자로 비코를 선택한 것처럼, 벌린은 비코를 다원주의의 선구자로 재발견했다. 물론 두 사람의 비코 해석은 약간 다르나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만큼 비코는 매력적인 연구대상이다.

물론 비코가 벌린이나 사이드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생전 무명의 학자였고 심지어 많은 오해를 받으며 질병과 빈곤 속에 죽었지만 비코의 사상은 법학, 정치학, 문학, 미학, 민속학, 언어학, 신화학, 역사학, 철학, 수학, 논리학 등 서양의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다만 한국에서 비코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뿐이다.

여하튼 벌린이나 사이드만이 아니라 19세기 미슐레나 크로체를 비롯해 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비코를 자기식으로 해석했다. 예컨대 미슐레는 그를 낭만주의자로, 크로체는 그를 헤겔주의자로 보았다. 또 자연주의나 역사주의, 심지어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해석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코를 하나의 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적어도 비코는 누구나 사숙하고자 한 거대한 사상의 원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비코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다.

잊혀진 그 이름, 비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는 1668년 나폴리의 한 서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1744년 나폴리에서 죽었다.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독학을 했다. 그리고 이웃마을에서 가정교사를 한 것 외에는 나폴리를 떠난 적도 없다.

비코의 평생 꿈은 나폴리대 법학교수가 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월급이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사학 교수로 42년간 일했다. 명색이 교수였으나 끝내 가난을 면치 못했다. 비코는 어릴 때 낙상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았고 맏아들은 범죄자, 외동딸은 배냇병신일 만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를 학자로 인정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서민출신인 비코가 교수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비코의 시대는 명석한 관념을 중심으로 한 데카르트가 풍미했으나, 비코는 그런 진리가 수학과 자연과학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역사를 비롯한 인문과학이란 여행처럼 여흥거리에 불과하며 키케로의 하녀가 갖고 있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라고 빈정거렸다. 반면 비코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진리란 그 발생을 이해해야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비코는 당대의 주류였던 자연법이론가, 사회계약론자, 공리주의자, 개인주의자, 유물론자, 이성주의자를 모두 부정했다. 즉 그들이 오류에 빠진 것은 체계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인간적 전망과 동기의 영속성, 그리고 그 전망과 동기가 다시 인간 본성의 변화하는 요구에 의해 지배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불변적이고 선험적인 인간 본성의 존재를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구정신을 통째로 부정했다. 이러한 서구정신이 20세기까지 이어져온 것을 생각하면 비코는 여전히 현대 서양문화에 대한 비판가로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벌린이 말한 대로 비코는 인류가 이제껏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갈 일련의 발전단계에서 각 단계 나름의 개성과 필연성, 특히 정당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즉 스스로의 내적 성장법칙에 따라 발전하되 외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변하며, 결코 기계적 인과관계에 귀속되지 않는 비물질적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행하는 일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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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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