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포용력과 다양성으로 불지핀 ‘문명의 용광로’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3-11-28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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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 최고·최대의 종교공간이던 하기아 소피아의 외관. 붉은 벽체 위에 돔형 지붕이 올려져 있다.

    여행자에게 현지의 물가수준은 매우 예민한 사안이다. 물가가 싸면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동과 서가 만나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자연스레 이어주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이질적 문명권을 각각 지배한 제국의 도읍지로 번성했던, 결코 예사롭지 않은 역사를 간직한 덕분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역사도시 이스탄불은 다행스럽게도 물가가 싸 여행자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네스코가 198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한 이 매력적인 도시를 지난 여름 또 한번 찾았다. 그리고는 구석구석을 누볐다. 왕궁과 모스크, 박물관 등이 집중돼 있어 여행객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카가로글루 지구(흔히 ‘舊시가’ 또는 ‘역사지구’로 불린다)는 물론, 비잔틴 시대에 이탈리아의 제네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구시가 동쪽의 갈라타 지구, 갈라타 지구와 연결되며 현대 이스탄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탁심 광장, 최신식 호텔과 오피스 빌딩, 쇼핑센터가 즐비한 베이오울루 지구, 그리고 1973년 개통된 보스포루스 대교 너머 위스키다르 지구까지 빼놓지 않고 살피며 발품을 팔았다.

    완벽하게 열린 도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스탄불은 강이 아니라 바다를 가운데에 두고 있다. 그러나 대양은 아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갈라놓은 보스포루스 해협이라는 좁은 수로다. 폭이래야 넓은 곳이 4km, 좁은 곳은 1km도 채 안 된다. 보스포루스는 ‘황소 여울’이란 뜻이라는데,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제우스와 이오는 연인 사이였다. 제우스는 아내 헤라의 집요한 추적으로부터 이오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황소로 둔갑시켰으나, 헤라는 이런 사실까지 알아내고는 등에를 이용하여 황소로 변한 이오를 괴롭혔다. 황소는 괴로움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해 여울에 몸을 던졌는데, 그곳이 바로 보스포루스였다는 것이다.

    해협 위로 높고 긴 보스포루스 대교가 놓여 두 대륙은 하나로 연결되고 있지만, 해협도 명색이 바다인지라 세계와 통한다. 에게해와 지중해, 나아가 대서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스탄불은 강을 끼고 발달했거나 분지에 자리잡은 도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열려 있다’는 것은 포용력이 강하다는 뜻이고, 그것은 다양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와 첨탑인 미나레트, 이슬람 여인들이 머리에 두르고 다니는 차도르, 양고기 구이의 일종인 도네르 케밥 등 이슬람 또는 아랍 문화적 요소가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양장과 선글라스, 맥도널드와 켄터키 치킨 같은 서구적인 것들도 섞여 있다. 젊은 연인들이 연출하는 키스신도 심심찮게 목격되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이 도시가 가진 이런 이중적인 성격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면 속단일까.

    이스탄불이 바다를 끼고 있다면 그 바다에 섬이 없을 수 없다. 비록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궁전 지구 아래엔 시르케시란 부두가 있는데, 섬으로 떠나는 배들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도 다니고, 도심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색다른 풍경을 즐기고자 섬을 향하는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도 다닌다.

    이런 지형을 가진 이스탄불에서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카가로글루 지구 한가운데로 달리는 디반 욜루(Divan Yolu)였다. 나는 매일 그곳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숙소도 그 주위에 잡았다. 유럽대륙의 끝자락으로, 그 옛날 로마로 향하던 길의 출발점이기도 해서 왕조시대의 문화유산이 이곳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새 이곳에도 패스트푸드점과 고급상가가 많이 들어서 현대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이스탄불 최대의 모스크인 블루 모스크. 미나레트가 여섯 개나 세워져 있어 그 품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이곳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드넓은 정원을 앞으로 거느린 채 미나레트를 여섯 개나 달고 있는 블루 모스크다. 정식명칭은 술탄아흐메트 모스크인데, 블루 모스크라고 부르는 것은 내부를 장식한 이즈니크(Iznik) 스타일의 청화(靑華) 타일 때문이다. 중국으로부터 청화백자 제조기술을 배운 터키인들이 그것을 모방해 그들 스타일로 재현한 이즈니크 도자기는 빼어난 색상을 자랑하는데, 바로 그 청화 타일로 내부를 치장했다면 그 화려함을 과연 무엇에 비길 것인가.

    설령 이즈니크 청화 타일의 빼어난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스탄불 최대의 모스크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바늘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미나레트를 보는 순간 그것을 지팡이 삼아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싶은 욕망만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블루 모스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미나레트는 육성으로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모스크 주위에 세우는 첨탑이지만, 그 숫자가 모스크의 품격을 말해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니(메카의 카바 신전과 블루 모스크가 6개로 최다를 자랑한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해도 결코 무례한 일은 아니리라.

    수많은 꽃이 다채로운 색채를 뽐내는 블루 모스크 앞의 정원을 거닐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fya·신성한 지혜) 성당으로 향했다. 비록 몇 발짝 떼어놓았을 뿐이지만, 그렇게 해서 만나는 세계는 근세에서 중세로 한순간에 바뀐다. 블루 모스크는 근세의 장을 연 오스만 제국이 세운 최대의 모스크인 데 비해 하기아 소피아는 중세를 대표하는 비잔틴 제국(일명 동로마제국)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붉은 벽체 위로 둥근 모자를 쓴 형상의 이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Emperor Justinianus ·483∼565, 재위 527∼565)가 세운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세운 것이 532년 대폭동 때 화재로 타버리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심혈을 기울여 재건한 것이다.

    신심(信心)이 누구보다 깊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하기아 소피아의 낙성식에서 자신이 세운 대성당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훌륭하다며 “솔로몬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이다”라고 자화자찬했다고 전한다. 둥근 천장과 십자형 평면구도, 모자이크 성화 장식으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걸작이란 평가와 함께 ‘이것이야말로 돌과 빛, 색채와 공간이 이루는 일대 교향곡’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는 그 후 기독교 교회당의 전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 세워진 수많은 모스크의 모델이 되기도 했으니 유스티니아누스의 자신에 찬 말이 앞뒤 모르고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스만, 비잔틴을 밟고 서다

    2500여 년에 걸친 이스탄불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를 들라면 나는 이런 그의 열정 때문에라도 유스티니아누스를 단연 첫손꼽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Mehmed Ⅱ·1432∼81, 재위 1444∼46 및 1451∼81)다. 그는 무라드 2세의 셋째아들이었으나 형들이 일찍 죽자 열세 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다가 2년 뒤 부왕에게 다시 왕위를 빼앗기고 5년 동안 근신하는 등 쓰라린 경험을 했다.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과감하게 행동하는 스타일인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역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기록하고 있다. 20세기 전반 지축을 흔들며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불러온 두 번의세계대전이 그것이다. 하지만 세계 전쟁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전부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이미 15세기 중엽 동방의 오스만 제국과 서방 기독교 왕국인 비잔틴 제국 사이에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대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전장은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걸쳤고, 그 결과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 개의 대륙에 미쳤다. 그것은 또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전쟁의 승자였던 오스만 제국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는 그곳을 이슬람의 도시로 만들어갔다. 내친김에 이름마저 ‘이슬람의 도시’란 뜻의 이스탄불로 바꿨다. 따라서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이 두 신앙간의 대결이란 성격을 띠었다.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메흐메드 2세가 창건하고 술레이만 대제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역대 술탄들이 정사를 봤던 톱카프 궁전에는 여인들의 거소인 하렘이 있다. 사진은 그 안에 마련된 술탄의 방.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족의 일파가 세운 것으로 그 기원은 기원전 6세기 몽골고원에서 발흥한 돌궐(突厥)족에 두고 있다. 그러다 한족에 밀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10세기경 지금의 터키 내륙지대인 아나톨리아 고원에 정착해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고,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셀주크 제국(1041∼1307)의 신민이 됐다가 그들이 몽골의 침입을 받아 허둥대는 틈을 타 1299년 오스만이란 장수(후일의 오스만 1세·1258∼1324)가 새로운 왕조를 열었는데, 그게 오스만 제국의 출발점이었다.

    땅에 욕심이 많았던 그들은 금세 발칸반도까지 손을 뻗쳐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때부터 비잔틴 제국은 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는데, 1451년 새로이 술탄(이슬람 제국의 군주 칭호)에 등극한 메흐메드 2세는 2년 뒤인 1453년 3월, 부하들에게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자는 살아서 영화를 누릴 것이요, 설령 쓰러진다 해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으로 갈 것이다. 만약 너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다면 성 안에 있는 모든 재물을 그대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그로부터 꼭 두 달 뒤인 5월29일, 스물한 살의 메흐메드 2세는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었고, 정복자란 뜻의 ‘파티히(fatih)’란 칭호까지 얻었다. 그는 왕위에 오를 때 90만㎢에 지나지 않던 영토를 그 2.5배에 이르는 220만㎢로 늘리며 천하를 통일해 중국의 진시황에 비견되기도 한다.

    금각만(金角灣)의 숙명

    그는 병사들에게 약속한 대로 3일간의 자유시간을 주고 마음껏 약탈과 강간을 즐기도록 허락했다. 그 사흘이 지나자 이슬람 학자 한 사람을 불러 비잔틴 제국 최대·최고의 종교공간인 하기아 소피아의 대리석 제단에 올라 코란을 낭독케 하고는 자신도 그곳에 무릎을 꿇어 알라를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역사가들은 이런 그를 일컬어 ‘제2의 알렉산더 대왕’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정복한 곳은 알렉산더 대왕과는 달리 서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탄불에 남은 시민들에게는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고유의 신앙과 법을 허용하겠다”고 공언했다. 그와 함께 제국의 각지로부터 밀려드는 이주자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관용에도 한계는 있었다. 하기아 소피아만큼은 그대로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곳 주위에 미나레트와 마드라사(이슬람 종교학교) 등을 세우고, 내부에는 성도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키블라와 이를 나타내기 위해 우묵하게 판 미흐랍, 그리고 코란에 나오는 ‘알라 외에 신은 없다’는 글귀를 원반에 새겨 이곳이 이슬람의 예배공간임을 분명히 알렸다.

    메흐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조금만 빠지면 만나게 되는 카가로글루의 언덕배기를 이스탄불의 중심으로 정하고 왕궁까지 세웠다. 제국이 망한 이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톱카프(Topkapi) 궁전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명·청 시대의 왕궁이었던 자금성(紫禁城)이 ‘고궁(古宮) 박물원’으로 바뀐 것과 흡사하다.

    왕궁 아래로는 구시가와 갈라타 지구를 가르는 금각만(金角灣·Golden Horn)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그 위에 놓인 2층 다리 때문에 큰배가 드나들 수 없으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육지로 둘러싸여 항구로서 완전 무결한 조건을 갖췄기에 세계 각지의 귀한 물건들이 집결됐다는 것이다. ‘황금의 뿔’이란 이름은 이런 이유에다 그 형상이 마치 소의 뿔처럼 생겼던 데서 유래한다.

    이곳의 지형에 대해 6세기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으니 그 역사가 짧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결이 항상 잔잔하고 자연의 힘으로 태풍이 들이닥치지 않게끔 되어 있다. 마치 파도의 크기에 제한을 가해 풍랑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다. 바다와 해협에 강풍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만의 입구에 들어서면 배는 도선사 없이도 전진하거나 정박할 수 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을 찾은 프랑스 여행가 풀크는 “(콘스탄티노플에는) 금이나 은으로 된 물건, 갖가지 형태의 의상, 여러 가지 성물(聖物) 등 훌륭한 물건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을 모두 이야기하려면 현기증이 난다. 항구에는 언제나 배가 들어차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으로서 이곳으로 실려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술레이만 대제의 초상화.

    그러니 금각만 위의 구릉지대가 늘 역사의 중심무대가 된 것은 당연하다. 기원전 7세기에 비자스(‘비잔티움’이란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했다)란 이름의 그리스 장군이 식민지로 삼기 위해 처음으로 터를 닦은 곳도, 기독교를 공인하고 동방으로 영토를 넓히려 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광대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제국의 왕도로 택한 곳도 이곳이었다. 바로 그 비잔틴 제국을 쓰러뜨린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유목민족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면서 왕궁을 세운 곳도 이곳 금각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였다. ‘지리는 숙명’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욕정과 금지의 공간 하렘

    톱카프 궁전 앞은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찾는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궁전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눠지는지, 모두를 관람하려면 석 장의 입장권이 필요했다. 궁전과 보물관, 하렘의 입장권이 그것. 가격표에는 동그라미가 너무 많이 붙어 있어 그게 우리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기도 벅찼다. 궁전 입장권은 12,000,000리라, 보물관과 하렘은 각각 10,000,000리라였다.

    1000리라가 우리 돈 1원쯤 되니 세 곳을 모두 보려면 3만2000원 정도가 드는 셈이었다. 물가가 싼 터키지만 톱카프 궁전이나 하기아 소피아 등의 입장료는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 온 대학생 배낭족도 비싼 입장료 때문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10,000,000리라짜리 지폐 3장과 1,000,000리라짜리 지폐 2장을 지갑에서 꺼내 표 석 장을 샀다. 그 바람에 지갑이 가벼워졌다.

    숲속에 자리잡은 술탄의 거소인 궁전은 자금성이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는 달리 모든 게 ‘아담 사이즈’였다. 그래서 인간미가 느껴졌다. 보물관에는 술탄의 보좌와 장신구, 왕관, 보석, 의상, 궁정생활이나 술탄의 사냥 장면을 그린 화려한 이슬람 세밀화, 각종 수집품과 외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이어 역대 술탄의 초상화와 성도 메카에서 가져온 무하마드의 수염과 발자국, 카바 신전의 열쇠와 같은 이슬람 보물 등이 전시돼 있었다.

    하렘(harem)은 미인들을 골라 화려한 욕탕에서 마사지를 시키고 갖가지 화장품과 향수 등으로 몸매를 다듬은 뒤 술탄에게 보내 한껏 욕정을 채우도록 꾸민 공간이다. 은밀한 곳이라서 그런지 아무 때나 사람을 들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그것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단체로 입장시켰다. 하렘이란 말은 아랍어로 ‘금지’ ‘보호’ ‘격리’란 뜻이라고 했다.

    오스만 제국의 왕들은 비잔틴 왕실의 공주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그같은 결혼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오스만 왕조의 술탄 그 자체가 최고 권위가 되자 정략결혼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왕실에서는 우리 식의 중전(中殿) 개념은 물론 적자와 서자의 구분도 사라졌다. 그 대신 자신이 낳은 왕자가 술탄이 되면 자동적으로 오르게 되는 ‘발리데 술타나(Valide Sultana),’ 즉 대비(大妃)의 입김이 그만큼 커졌다. 천하의 술탄도 대비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으니까.

    ‘이스탄불 다스리는 자가 세계 지배’

    이스탄불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그 이름이 기억될 만한 또 한 사람의 군주는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황제인 술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1494∼66, 재위 1520∼1566)다. 그가 후대의 인물이나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더할 나위 없이 심대하다.

    1494년 흑해 연안의 트라브존에서 태어난 술레이만은 부왕 셀림 1세와 어머니 하프사의 각별한 관심과 훈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이름만은 그리스 스타일로 콘스탄틴이라 불렸고, 열 살이 되기 전까지 황금 세공기술을 익혔다. 오스만 왕조는 왕국을 다스리거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심신의 단련이 필요하다며 왕자들에게 그런 과정을 거치게 했다. 그들은 형식을 중시하면서 관념에 치우치는 경향이 농후했던 우리와는 달리 유목민족답게 실력, 요즘 말로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것이다.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아랍어 서체로 쓴 술레이만 대제의 이름.

    열 살을 넘긴 뒤로는 흑해 북쪽의 크림반도로 보내져 타타르족 칸(首長)의 궁정에서 지냈다. 그곳은 어머니 하프사의 고향이니 외가인 셈이다. 타타르족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공주를 이스탄불로 보내 충성을 표시하곤 했는데, 하프사도 그렇게 이스탄불로 갔다가 셀림 1세의 눈에 띄어 왕비가 됐던 것이다. 어린 술레이만은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역사서와 코란을 즐겨 읽었고, 행정과 과학, 천문학, 시학 등에도 큰 관심을 보였으며,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프사는 술레이만을 에게해와 가까운 아나톨리아의 비옥한 계곡 마니사로 데려갔다. 그곳은 메흐메드 2세가 왕위에서 쫓겨나 근신했던 곳인데, 그녀는 아들이 부잣집 규수와 자연스레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자 그렇게 했다고 한다. 술레이만은 그곳에서 후일 그의 첫 번째 왕비가 된 귤바하르(‘봄의 장미’란 뜻)를 만났고 그녀에게서 장남 무스타파를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레이만은 부왕 셀림 1세의 부음을 듣게 됐다. 급히 말을 달려 3일 만에 이스탄불에 당도해 장례를 치르고 대망의 술탄에 올랐다. 그는 부왕의 업적을 기려 성대한 무덤을 만들고, 건설중이던 모스크와 학교를 완공시켰다. 이집트와 이란에서 끌고 온 포로 1500명을 풀어줬고 부왕이 징발한 상인들의 재산도 되돌려줬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고 “사나운 사자가 죽자 순한 양이 나타났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몸 속에 흐르는 정복자의 피를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었을까. 그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제기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쳐든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있는 보름스에서 종교재판을 받던 1521년(그러니까 등극한 바로 다음해) 봄, 발칸반도 북쪽의 다뉴브 강변으로 말을 몰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던 빈은 술레이만 병력에 포위되어 한동안 큰 곤욕을 치렀다.

    오스만 제국의 600년 역사에 기록된 술탄 36명 가운데 가장 긴 46년 동안 재위한 그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승리해 세르비아와 헝가리, 로도스 섬, 바그다드, 오만, 이란 등지로 영토를 크게 늘렸다. 이 때문에 당시 ‘이스탄불을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는 ‘정복자’ 메흐메드 2세를 능가할 만큼 의욕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였다.

    정복사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술레이만 대제의 지략과 용기, 뛰어난 용병술이 주효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오스만 왕조의 지배층이 스스로 엄격한 규율과 절제 속에서 살았다는 점, 그리고 이슬람이 모두 단결해 하나의 움마(Umma·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욕구가 강렬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술탄을 넘어 칼리프로

    술레이만의 영토 확장욕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진실이 숨어 있다. 그것은 칼리프가 되고자 하는 꿈이었다. 술탄이 세속적인 군주를 뜻한다면 칼리프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뜻으로 이슬람의 수장(首長), 즉 종교상의 최고 권위를 이르는 말이다. 이는 그의 욕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앙이 삶의 전부를 지배하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영국 왕 헨리 8세의 로마교황청과의 결별과 영국국교회의 탄생,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남김없이 축출한 레콘귀스타(국토회복)운동 등이 동시에 일어난 16세기는 서양사에서 ‘신앙(faith)의 시대’로 기록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술레이만의 대외정복 및 원정에는 꼭 종교상의 이유가 따라붙었으며, 이슬람의 총사령관, 지상에서의 알라의 그림자, 성도 메카·메디나·예루살렘의 보호자 등 그에게 붙여진 종교상의 칭호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수호자로 칼리프를 자처했던 술레이만은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로마교황청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교황청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등을 침공함으로써 위협을 가했고, 때로는 교황청을 심하게 흔들어댔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교황청의 반대편에 섰던 신교측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는데, 역사가들도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데는 술레이만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는 데 대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모스크의 돔과 뾰족한 미나레트가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특이하게 만든다. 앞에 보이는 것은 갈라타 다리에 연해 있는 뉴모스크이고, 뒤에 보이는 것은 술라이마니예 모스크다.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술레이만의 초상화를 보면 머리 위에 부푼 찐빵처럼 생긴 백색의 터번을 쓰고 있고, 붉은색 계통의 의상을 걸쳤다. 눈에 띄는 용모상의 특징은 날카로울 정도로 우뚝 선 콧날인데, 이는 아마도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나타낸 게 아닌가 생각된다.

    술레이만 대제가 제일 존경했던 인물은 유대왕국의 솔로몬왕이다. 술레이만이란 이름도 솔로몬에서 나왔다고 한다. 코란에 솔로몬왕이 가장 완벽한 군주로 묘사돼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는 것.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가 솔로몬왕이 건립한 솔로몬 성전에 관심을 가졌다면 술레이만은 명(名)판관으로서의 솔로몬왕을 존경했다. 이를 말해주는 것이 술레이만에게 붙여진 ‘카누니(kannuni)’란 칭호다. 이는 입법자(Lawgiver)란 뜻이다.

    이슬람 세계에는 ‘샤리아(shariah)’라는 특별한 법이 존재한다. 샤리아는 인간의 지혜와 이성의 산물로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변하곤 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법이 아니다. 신성한 신의 계시를 담은 불변의 율법을 일컫는다. 그런데도 인간인 그가 카누니로 불린 것은, 샤리아에 포함되어 있진 않으나 현실을 살면서 무언가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기준이 되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지향했던 명판관의 면모였다.

    ‘최후의 명작’ 술라이마니예 모스크

    정복욕이 강한 자는 무언가를 짓기도 좋아하는지, 술레이만 대제 또한 크고 작은 많은 건축·토목사업을 벌였다. 그가 세운 건축물은 제국의 영토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 중 최고·최대의 것은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술라이마니예 모스크라 할 수 있다. 위치와 규모, 구조 그리고 거느리고 있는 각종 시설물들을 볼 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바쳤고, 당대 최대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1490∼1588)도 60대의 완숙한 솜씨를 발휘해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술라이마니예 모스크를 찾은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바닥에 물을 뿌려 녹색의 잔디는 더욱 파랬고, 그 사이로 난 돌길은 차분하게 다가왔다. 거기다 바람까지 가볍게 불어 혼자 걷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바깥으로 난 석벽에 기대 서니 이집트 바자와 뉴모스크, 갈라타 다리와 갈라타 탑, 보스포루스 해협 등 이스탄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 내음도 코끝을 자극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스탄불 어디에든 원하는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데도 굳이 이런 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모스크를 세우고자 했던 것을 보면 술레이만 대제는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닌 듯하다.

    모스크 안에는 이미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이 붉은 카펫 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조금 떨어져 있는 내게도 잘 들렸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그는 카펫 바닥을 손으로 탁 쳤다. 그러자 그 소리가 몇 굽이를 꺾었는지 메아리가 되어 한동안 되돌아왔다. 그의 입에서도 “음향효과가 아주 좋죠?”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천장에 뚫린 몇 개의 돔과 벽과 벽 사이의 틈이 공명장치 역할을 해 그런 효과를 낸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의 설명은 계속됐다.

    “카펫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한번 맡아보세요.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데도 발 냄새는 고사하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부터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들어와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켜주는 데다 100% 양털로 짠 카펫이라서 그런 거죠.”

    노예를 사랑한 제왕

    더욱 놀라운 것은 바닥에서 2m 조금 넘는 높이에 매달려 있는 오일램프였다. 거기에는 타원형의 검은색 타조 알이 끼워져 있었는데, 온도에 따라 그 색이 변할 뿐 아니라 알에서 나는 향기가 거미 같은 곤충이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고 했다.

    술레이만은 헝가리를 손에 넣은 기념으로 왕실 최고의 건축가 시난에게 모스크를 지을 것을 명했는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런 과학적 지식까지 동원하여 흠잡을 데 없이 그 일을 해냈으니 대제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대제보다는 시난이 더 행운의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고 하지 않던가.

    시난은 아나톨리아의 카이세리란 곳에서 비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다 왕실 친위대인 예니체리에 들어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술레이만 대제의 아버지 셀림 1세의 눈에 띄어 왕실 건축 일을 맡게 됐다. 기술이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가 마침 술레이만의 통치시기와 그대로 맞아떨어져 그 빛을 발했으니 두 사람은 절묘한 콤비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술레이만 대제가 지극한 애정을 쏟았던 록셀라나.

    그런데도 시난은 술레이만 시대의 작품이 습작에 지나지 않았다고 후일 고백한 바 있다. 90 생애를 살면서 400여 건에 이르는 모스크와 마드라사, 함맘(공중욕탕), 수도교, 교량 등 건축물과 토목공사를 진두 지휘한 그는 ‘논 플러스 울트라(Non Plus Ultra)’, 다시 말해 지예(至藝)의 경지를 꿈꾼 건축가였다. 안내인은 “시난은 말하자면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건축가 로이드 라이트와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얼른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인물로 비치는 술레이만 대제이지만 그에게도 순정은 있었다. 첫 부인인 귤바하르에게는 그렇고 그런 남자였지만,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예 록셀라나(Roxelana)에게만은 지극한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뛰어난 미모에다 음악적인 재능,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까지 겸비한 록셀라나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나머지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결혼까지 한 것은 물론, 그때껏 궁전 바깥에 뒀던 하렘을 궁전 안으로 끌어들여서는 록셀라나가 거기에서 살도록 했다.

    록셀라나의 미모는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남아 있는 초상화로 짐작해볼 수 있는데, 얼굴은 갸름하고 입은 작으며 눈은 날카롭고 목은 길다. 한마디로 섹시하면서도 이지적으로 생겼다. 록셀라나는 메흐메드, 지한기르, 바예지드, 셀림 등 4명의 아들과 딸 미흐라미를 뒀다.

    한편 술레이만에게는 이들 외에 무스타파 등 네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귤바하르 소생인 무스타파가 가장 연장자로 장남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메흐메드가 술레이만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탄의 총애를 받는 록셀라나의 큰아들인 데다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메흐메드가 21세의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술탄도 록셀라나도 그를 잃은 슬픔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록셀라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

    東과 西의 접점 이스탄불

    술라이마니예 모스크의 후원에 있는 술레이만 대제의 묘당. 1층 내부에 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놓여 있다.

    왕자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이 뒤따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첫 희생자는 장남 무스타파였다. 그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한기르는 두려움에 떨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하여 바예지드와 셀림, 두 아들만 남게 되었다. 1558년에는 록셀라나마저 57세로 숨을 거뒀다.

    그후 바예지드는 셀림이 술탄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다며 셀림측을 공격했다. 결과는 그의 대패. 그 또한 사형대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렇게 해서 차기 술탄의 자리는 막내 셀림에게 돌아갔다. 셀림 2세는 술탄으로서 그의 칭호다.

    왕자들의 난으로 노년을 우울하게 보낸 술레이만 대제는 1566년 70세를 일기로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술라이마니예 모스크의 후원, 더 정확히 말해 민바(설교단) 뒤쪽에 시난이 8각형으로 지은 묘당 한가운데에 안치됐다. 생전에 그가 휘두른 권력에 비하면 묘당은 초라하지만, 그 위치만큼은 남부럽잖은 곳을 택했다. 백성들이 기도하는 동안 한번쯤 그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의 묘당 옆에는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 록셀라나의 묘당이 서 있는데, 평소에는 닫혀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술탄의 여인이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 영토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 세 개 대륙에 걸쳤고, 법률·학술·건축·예술·종교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최고의 번성기를 구가했던 오스만제국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로도 350년이나 더 지탱했고, 1922년에야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술레이만의 체취는 지금도 이스탄불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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