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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인 아호 주변 - 어째서 可山일까

우리 문인 아호 주변 - 어째서 可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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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인 아호 주변 - 어째서 可山일까
편석촌(片石村)이 누구인지 금방 아시겠지요? ‘기상도’(1936)를 자비 출판한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아호이지요. 기림(起林)이 본명이겠는데, 그것만 해도 썩 본명스럽지 않음. 곧 필명이거나 아호급의 모양새와 울림을 갖고 있지만 씨는 따로 굳이 아호가 요망되었던 모양. 이 아호의 출처에 대해 씨는 이렇게 해명해놓고 있습니다. ‘고운편석촌(孤雲片石村), 도화류수세(桃花流水世)에서 땄다’라고. 모더니스트다운 감각이기에 앞서 실로 저 당시(唐詩)의 언저리입니다그려. 동양의 시가를 싸잡아 ‘피곤한 오후의 시’라 몰아붙이고 ‘오전의 시론’을 펼치며 이를 실천해온 씨의 또 다른 한 면이라 본다면 어떠할까요.

이에 비해 ‘김강사와 T교수’(1935)의 작가 유진오의 아호 현민(玄民)은 어떠할까요. 노자의 ‘도덕경’에서 玄자를, ‘민중’ ‘인민’ 등에서 民자를 땄다고 스스로 해명한 바 있습니다. 백성이나 민중, 인민 등이 씨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 그런데 그 위에 ‘도덕경’을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서 비로소 씨다운 균형감각이 엿보인다고 하면 어떠할까요. 지식인이란 그러한 존재여야 한다는 뜻이기보다 ‘창랑정기’(1938)로 표상 되는 고전적 기품 쪽에 기울어진 그런 기묘한 균형감각이라 하면 어떠할까요. 자기의 아호에 대해 스스로 해명해놓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연이 있는 문사에 김동리씨가 있지요.

“문단에 나올 무렵 나는 당선을 거듭하기 위하여 그 때마다 이름을 갈았었다”라고 그 복잡한 이유를 뚜렷이 해놓았더군요. 당시 문단 데뷔의 정식 코스란 신춘문예였던 만큼 3대 일간 신문의 관문을 모조리 통과하겠다는 야심찬 청소년의 꿈이 거기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것.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처음 시가(詩歌)가 입선되었을 때는 호적 이름이었고, 다음 해 소설이 당선되었을 때는 아명을 썼었고, 맨 끝의 ‘산화’는 지금 쓰는 동리(東里)란 이름으로 당선이 되었었다”(‘동리 변’).

이처럼 씨는 3대 신문을 모조리 돌파한 실력자였음이 드러났지요. 시가 ‘백로’(‘동아일보’, 1934. 1. 2)는 김창귀(金昌貴)로 되어 있어 호적 이름 그대로입니다. ‘화랑의 후예’(‘중앙일보’, 1935. 1)의 당선자는 김시종(金始鐘)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화’(‘동아일보’, 1936. 1)에서 비로소 김동리(金東里)입니다. 이처럼 昌貴, 始鐘, 東里의 사용이 당선을 거듭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던가. 그런데 씨는 이렇게도 말해놓아 혼선을 조금 일으키고 있습니다. “처음 이 이름(東里)을 쓸 때는 이것으로 호를 삼을 작정이었으므로 당선작 ‘산화’의 약력 소개에도 본명은 金始鐘이라 하여…”라고. 위에서는 金始鐘을 ‘아명’이라 해놓고, 아래에서는 그것을 ‘본명’이라 했지 않습니까.

이쯤 되면 호적명, 아명, 본명에 대한 고려가 불가피한 형국이지요. 과연 씨의 호적명은 昌貴로 되어 있습니다. 족보에 있는 족명으로 하면 창봉(昌鳳)이고요. 본인 말대로 始鐘은 아명일 터인데 또 씨는 이를 ‘본명’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호적명을 본명이라 부르는 쪽에서 보면 조금 혼란스럽지요.

‘무정’(1917)의 작가의 경우도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호적명은 분명 이광수(李光洙)로 되어 있고 와세다(早稻田) 대학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 이전에 씨가 다니던 중등과정인 메이지(明治) 학원 중등부엔 이보경(李寶鏡)으로 되어 있을까요. 일어로 쓴 씨의 처녀작 ‘愛か’(1909)엔 ‘한국 유학생 이보경’이 아니겠습니까. 호적 대조가 없었던 시절, 아명을 그대로 본명으로 쓴 경우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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