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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②

‘변신의 귀재’ 야설록

고독, 허무, 퇴폐로 무장한 자학적 반항의 변주곡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변신의 귀재’ 야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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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설록의 상상력은 ‘반항’의 상상력이다.
  • 이런 반항이 극단적 과장, 억지스러운 설정, 지나친 작위와 결합해 감상(感傷)이 넘쳐난다. 이것이 야설록 무협의 의의이자 야설록 인기몰이의 비결이며, 중국 무협소설의 틀을 벗어나는 활로가 됐다.
‘변신의 귀재’ 야설록
그의 이름을 지우면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가 성립되지 않을 작가가 야설록(夜雪綠)이다. 1960년생으로 본명이 최재봉(자신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몇몇 감독들처럼 야설록도 가끔 자신의 본명을 작품 속에 슬그머니 끼워넣는다)인 야설록은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계에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고, 1990년대 한국 무협소설 출판의 주도자였으며, 한국 무협소설의 스펙트럼을 넓힌 선구자였다.

아마도 야설록의 영향을 받지 않은 후배 작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1980년대 후반 무협소설 작가들이 만화 스토리 작가로 변신할 때 이러한 변신의 최대 성공 사례가 됐던 것도 바로 그였다. 이현세의 ‘아마게돈’ ‘카론의 새벽’ ‘남벌’ 등이 모두 야설록이 스토리를 쓴 만화들이다.

무협소설이든 만화 스토리든 장르를 불문하고 야설록의 상상력은 언제나 ‘반항’의 상상력이다. 당겨 말하면 야설록의 반항은 고독, 허무, 퇴폐로 무장한 반항으로서, 어느 편이냐 하면 사춘기 청소년의 반항과 기본적으로 성격을 같이하는 반항이다. 이런 반항이 극단적 과장과 결합되고, 억지스러운 설정과 지나친 작위를 통해 구체적 모습을 얻게 되며, 감상(感傷)으로 충만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야설록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야설록은 어느 정도 부정적 평가를 면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런 점들로부터 야설록 무협소설의 중요한 의미가 생겨난다. 야설록이 인기 작가가 된 것도 바로 그런 점들 때문이었고, 한국 무협소설이 중국 무협소설, 특히 워룽성(臥龍生)의 대만 무협소설의 틀을 확실하게 벗어나는 경로도 야설록의 바로 그런 점들로부터 생겨났다. 더 넓게 보면 야설록의 사춘기적 반항은 198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적 분위기와도 상당한 조응 관계가 있는 것 같다.

邪派 주인공의 죽음

야설록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강호묵검혈풍영(江湖墨劍血風影)’은 1982년에 처음 출판됐고, 1995년에 ‘마객(魔客)’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됐다(이하 ‘마객’으로 칭하기로 함). 이 작품은 주인공을 사파(邪派) 인물로 설정했으며 그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삼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삼았으되 그 주인공이 정파(正派) 인물인 워룽성의 ‘옥차맹(번역 제목 ‘군협지’)’이나 상관딩(上官鼎)의 ‘침사곡’과도 다르고, 주인공이 사파 인물이되 그가 우여곡절 끝에 대협(大俠)으로 거듭나는 서효원의 ‘대설’과도 다르다. ‘마객’의 주인공 능조운(凌朝雲)은 사파 인물인 채로 죽는 것이다.

고아 출신인 주인공 능조운은 주루의 점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글자도 모르고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점원인데 다만 표정과 성격이 특이하다. 그의 표정은 무심하고 성격은 괴팍하다. 냉랭하고 도도하며 철저히 고독해지고자 하는 그가 경멸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그는 세상을 조소(嘲笑)한다. 그런 그를 어떤 사람은 싫어하고(그들의 학대를 그는 감수한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좋아한다(그들의 호의를 그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파 고수들인 무림칠환사(武林七環邪)가 그런 그를 택해 무공을 전수해 주고 그를 ‘마종지주(魔宗之主)’로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다. ‘억울하게 악인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들’, 즉 세칭 사파인들을 구하라는 것이 그들의 부탁이다.

마종지주가 된 능조운은 한 자루 묵검(墨劍)을 들고 ‘혈풍영(血風影)’이라는 이름으로 정파 무림과 싸우며 그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무림의 패자가 된 능조운은 사파가 지배하는 세상의 추악한 실상에 직면해 깊은 절망에 빠지고 그리하여 죽음을 자청한다. 자신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백연하의 무기에 스스로 가슴을 찔리는 것이다.

혜성처럼 무림에 나타나 정파의 썩은 심장에 사나운 검을 휘둘러댔던 풍운아, 그는 마침내 죽었다.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도, 최후엔 허무와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백연하는 그를 찔렀으나 그는 결코 백연하에게 찔리지 않았다. 그를 찌른 것은 바로 허무, 그 예리한 칼날이었다.(1994년판 제3권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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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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