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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⑤

치열한 비극적 서정의 화신 진산

삶의 결핍 속에서 감정의 진실 찾기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치열한 비극적 서정의 화신 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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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무협소설 최초의 여성작가 진산.
  • 그는 남성장르로 분류되는 무협소설계에서 전혀 새로운 경지의 무협소설을 선보이고 있다. 섬세한 문체와 비극적 서정성이 배어나는 줄거리, 추리소설적 기법 등이 진산 소설의 원동력이다.
치열한 비극적 서정의 화신 진산
진산(眞山)은 한국 무협소설 최초의 여성작가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무협소설 장르는 ‘남성중심주의에 함몰된 남성 판타지’라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는 무협소설 장르의 일반적 속성을 뛰어넘은 예외적 작가의 경우에도 좀처럼 극복되지 않는 문제다. 극복은커녕 문제로 인식조차 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니 무협소설의 작가가 전부 남성이고, 독자 대부분도 남성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무협소설계에 여성작가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진산의 존재는 이채롭다.

하지만 진산의 이채로움은 여성이 남성 장르의 작가가 되었다는 보기 드문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진산이 남성중심주의를 상쾌하게 벗어난, 새로운 무협소설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물론 여성작가라고 해서 남성중심주의를 저절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작가도 남성중심주의에 동일화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산은 무협소설의 남성중심주의를 상쾌하게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여성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산을 여성작가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여성작가란 말이 ‘무협소설의 여성적 세계를 개척한 작가’란 수준으로 진산의 의미를 제한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무협소설은 여전히 남성장르이며 진산이 구축한 여성적 세계는 단지 하나의 예외로 규정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산이 단지 여성적 세계를 개척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의미에서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다.

최초의 여성무협작가

1969년생인 진산(본명 우지연)은 1994년 제1회 하이텔 무림동 무협공모전에서 단편 ‘광검유정(狂劍有情)’으로 대상을, 1995년 제2회 공모전에서는 중편 ‘청산녹수(靑山綠水)’로 우수상을 받았다. 진산은 1996년 장편 ‘홍엽만리(紅葉萬里)’를 출판하면서 본격적인 전업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두 편의 중·단편소설과 첫 장편소설에서 진산은 종래의 무협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신성을 보여주었다. 진산은 이후 ‘색마열전(色魔列傳, 1996)’ ‘대사형(大師兄, 1997)’ ‘정과 검(情과 劍, 1998)’ ‘사천당문(四川唐門, 1999)’ ‘결전전야(決戰前夜. 1999)’를 잇달아 발표하며 참신함을 갱신해왔다. 이 계속적인 갱신에서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진산의 치열한 예술가적 태도가 발견된다.

그러나 부단한 갱신의 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진산’이, 다시 말해 근본적이고 원형적이라 할 ‘진산’이 작동하고 있다. 진산이 연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은 바로 이 변하지 않는 ‘진산’과 부단한 갱신의 태도가 협력해서 이루어낸 성과라 할 것이다.

서정성 가득한 진산의 문체

진산 소설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문체이다. 좋은 의미에서 그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를 만하다. 자신의 필명을 신동엽의 시 ‘진달래 산천’에서 따왔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문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서정성이다. 그의 독자들이 좋아하는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물에는 빛깔이 없다붉은 등(燈)을 들고 들여다보면 붉은빛이요, 푸른 등을 들고 들여다보면 푸른빛일 뿐이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은 온통 달빛이며, 매화락(梅花落) 만발한 날은 매화빛인 것이다.강절행성(江浙行省) 진회하(秦淮河)의 물빛은 그래서 찬연한 오색이라 말할 수 있었다. 강의 양쪽에 즐비한 유곽(遊廓)들로부터 새어나오는 휘황한 불빛들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그렇게 오색 영롱한 강물 위로 배들이 떠다녔다.

‘색마열전’ 제1장의 서두이다. 진회하의 물빛에 대한 이 서정적 묘사는 단순한 멋 부리기가 아니라 서술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관된다. 이 묘사는 한편으로는 진회하의 폐가(廢家) 귀회루에 살고 있는 주인공 소운비와 진설영의 이야기로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귀회루에 모여드는 다섯 명의 색마, 나아가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저마다의 삶의 속사정과 유비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네 권에 걸쳐 펼쳐지는 긴 이야기를 끝마치면서 이 작품은 서두의 묘사를 다음과 같이 변화시켜 되풀이한다.

물에는 빛깔이 없다.붉은 등(燈)을 들고 들여다보면 붉은빛이요, 푸른 등을 들고 들여다보면 푸른빛일 뿐이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은 온통 달빛이며, 매화락(梅花落) 만발한 날은 매화빛인 것이다.진회하(秦淮河)의 물빛은 그래서 찬연한 오색이라 말할 수 있었다.사람들의 삶도 그와 같아 본래는 아무런 색깔도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색깔들을 머금게 되는 것이다.도인은 도인의 색을.범부는 범부의 색을.색마는 색마의 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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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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