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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책 하고 놀자’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흰 그늘의 길’

  • 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흰 그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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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흰 그늘의 길’

‘흰 그늘의 길’(전3권) 김지하 지음/학고재/ 각 1만3000원

모로 누운 돌부처, 김영일, 노겸, 노현, 우형, 묘연. 이게 다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누구인가? 우리가 잘 아는 김지하는 그의 필명이다. 그는 1964년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해 첫 옥고를 치른 이래 ‘오적 필화사건’ ‘비어(蜚語) 필화사건’ ‘민청학련 사건’ ‘고행 1974 필화사건’ 등으로 7년여를 감옥에서 지낸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회고한 책이 ‘흰 그늘의 길’이다.

김지하의 말이 아우르는 외연(外延)은 언제나 너무 크고 넓어 그 앞에서 아득해진다. 사람됨의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관심 범주의 광역성 때문일까. 김지하라는 이름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강신무(降神巫)다. 서로 죽고 죽여 피가 낭자하게 계곡과 내를 적시며 흐르는 험한 시대와 억울한 원귀들의 씻김을 위해 칼날 위에서 춤추는 강신무. 김지하의 언어는 안과 밖, 동과 서, 옛시대와 현재, 아(我)와 피아(彼我), 논리와 초(超)논리, 현실과 환영 사이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주술이다. 그의 말은 직관과 영감의 임계점까지 치받아 올라간다.

얼굴 가득한 주름에 새겨진 역사

어쨌든 이 책은 김지하의 개인사이자 가족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김지하는 1941년 음력 2월4일, 전남 목포시 연동 외가에서 태어난다. 그가 자신의 출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시대를 “때는 전인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지옥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어두운 때, 이 땅에서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국민총력연맹 조직, 황국신민화운동과 생산보국운동을 강행하던 때, 바로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 발발을 눈앞에 둔 험악한 때다”라고 쓰는 것도 당연하다.

이 책은 김지하의 회고록이자 시대의 회고록이다. 김지하라는 거울에 비친 시대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나르시스의 거울이자 시대의 거울이다. 나르시스의 거울에는 자기애와 내면이 비치고, 시대의 거울에는 한 개체의 삶에 작용하는 거대한 외부가 비친다.

김지하의 생애는 한 개인이 감당할 만한 이성의 기획과 그 경계를 넘어 파쇼적 권력에 맞서 저항한 민주세력의 기억, 집단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전위(前衛)의 풍경이다. 사상과 이념이 소용돌이치며 화석으로 남은 동시대의 풍경이다. 그 풍경은 파란과 격동의 한국 정치사가 김지하라는 개체를 거점화하고 요동치며 그 운명 안에 각인한 죽임과 죽임의 역사다. 그 역사는 세 겹의 내부를 갖고 있다. 박정희를 핵심으로 한 군부독재 권력이 질주하던 시대의 내부, 갖가지 종파투쟁으로 얼룩진 운동권의 내부, 혁명투사에서 생명과 영성을 선취하고 생명운동, 풀뿌리지역운동으로 나아간 김지하의 내부가 그것이다.

김지하는 이렇게 쓴다.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이것은 미당 서정주의 “애비는 종이었다”와 비견될 만한 내연(內延)과 울림을 갖고 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아비의 운명은 곧 자식의 운명이다. 이 한 문장 속에 김지하의 운명은 봉인되어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그 천부적 운명의 말랑말랑한 속살을 알뜰히 파먹은 표랑(漂浪)과 수배, 투옥과 고문, 반공법 위반자, 사형선고, 무기징역은 아버지의 사상적 정체를 단정하는 그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육십 생애 안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주문”이다. 김지하의 생은 이 비밀주문에 걸려 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 이념에 감염돼 한반도로 건너와 목포에 삶의 터전을 잡은 김지하의 아버지 김맹모(金孟摸)는 “인민군 점령하에서는 목포시 당 간부였음에도 두문불출, 집안에 묻혀 단파 라디오로 유엔군의 인천 상륙 정보까지 들어서 인민군의 패배를 환히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국군 상륙작전 때에는 동료들과 함께 영암 월출산에 빨치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패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실패한 공산주의자의 아들은 김지하가 피할 수 없이 수납한 운명이었다.

김지하는 죽지 않았다

전라도, 황톳길, 수배, 도피, 감옥…. 김지하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들은 1970년대 이후 소용돌이치던 한국사의 살벌한 내용물로 침착(沈着)한 것들이다. 그는 한동안 지하에서 지하로 소통되는 유언비어였다가 역사의 선봉, 최전선의 눈부신 상징이었다가 이제 역사의 화석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다. 서슬이 퍼렇던 젊은 시절의 투사시인은 간데없고 한복을 입고 앉아 난초를 치는 고요한 선비만 남아 있다. 파란만장한 항해를 마치고 김지하가 착지한 삶은 흰 빛, 흰 그늘의 삶이다.

“‘흰 그늘’은 도무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순이면서 통합입니다. 만해 스님의 그 ‘님’이 아픔이자 기쁨이고 ‘모심’이자 ‘살림’이듯이, ‘흰 그늘’은 ‘소롯한 예절’이면서 ‘힘찬 생명력’입니다. 그것은 세계와 우주로 열리는 고요한 삶의 ‘화개’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주 자체의 혁명적 ‘대역사’입니다.”

그의 이름 뒤에 따라다니던 투사의 이미지는 빛이 바래 벌써 민간에 구전되는 허황한 민담으로 바뀐 듯하다. 장엄한 문체로 씌어진 이 회고록은 그것에 반역하며, 돌연 그의 전생애를 현재진행형으로 바꿔놓는다. 김지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우렁우렁 발음이 불분명하고 어눌한 육성으로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저 환각과 가난과 전쟁으로 찢긴 황홀한 어린 날의 기억들을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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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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