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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책 하고 놀자’

미친 사랑의 노래 ‘탐닉’

  • 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미친 사랑의 노래 ‘탐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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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꽤나 읽어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내에 번역된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여전히 에르노의 소설을 지지하지만 ‘탐닉’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만남은 격렬한 섹스로 이어지고, 휴지기의 긴 시간에 몸과 마음은 다음의 섹스를 기다리며 기다림과 고통, 나른함과 욕정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그리고 작가는 틈틈이 일기를 적는다. 섹스에의 탐닉은 염색체와 뇌를 푹 삶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나날의 삶은 소름끼칠 만큼 명확한 욕망, 섹스 뒤에 젖어드는 육체의 노곤함,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결별의 두려움, 혹시 그가 다른 젊은 애인에게 빠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채워진다.

탐닉하는 영혼에게는 사랑이 모호하지 않다. 그것은 명쾌하게 정의될 수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거기 있는 것, 그리고 섹스하고, 꿈을 꾸고, 그가 또 오고, 섹스하고. 모든 것은 기다림일 뿐이다.” 사랑은 “멋 부리고 싶은 욕망”과 “끝없는 구매욕”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폐경기를 앞둔 여자가 오로지 젊은 애인을 어떻게 하면 더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갸륵한 마음을 갖는 것, 즉 “새로운 키스 방법과 욕망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끝없이 고안해야겠다”는 결심, “사랑의 몸짓과 체위에 대한 끝없는 발명” 그리고 구체적 행동으로 프랭탕백화점 섹스코너에서 ‘애무에 관하여’ ‘부부와 사랑’ ‘육체적 사랑의 테크닉’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완벽한 육욕과 승화”를 위한 도구들이지만, 작중 화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도록 현금으로 지불하는데 그 대목에서 왠지 눈물이 솟구칠 지경이다.

그런 분별을 잃은 마음은 끝간데 없이, 방향 없이 움직이는데, 그 무분별한 극단의 하나가 “처음으로 내 베개 밑에 그의 것으로 젖은 팬티를 하나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맹목과 광기의 에너지에 푹 젖은 의식이 간혹 분별을 찾아 도덕과 교양의 눈으로 자신의 탐닉하는 생을 차갑게 관조할 때가 있다.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혹은 “이것이 삶인가?”하는 회의에 빠지고, 쾌락의 한계를 더 넓혀가려는 끝없는 욕망에 허덕이면서도 남자의 생일선물로 “그가 태어난 날에 발행된 신문을 선물”할 때다.



탐닉의 대상을 상실할 때 그 공허는 탐닉의 깊이와 비례한다. 형언할 수 없는 공허의 공포는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혹하다”는 말을 낳는다. 탐닉의 대상을 잃은 작중 화자는 남자의 형편에 따라 유예와 지체를 거듭하지만 매번 질펀하게 이루어지던 쾌락의 향연을 잃어버린 뒤 고통 속에서 “죽음과 사랑의 욕망, ‘적어도 내게 에이즈는 남겨놨을 거야’”라는 헛된 확신만 움켜쥘 뿐이다.

끝없는 욕망 때문에 성적 탐닉에 빠지고 거침없이 파멸까지 나아가려는 이 미친 사랑의 이야기를 읽는 게 나는 두렵다. 사랑에 덧씌워진 온갖 환상을 다 지워버리고 난 뒤에도 나는 사랑을 욕망할 수 있을까? 이토록 무익하고 소비적인 사랑 때문에 존재의 에너지와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까? 내 두려움은 사랑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잃고 고작 고갈과 환멸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대체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문득 기적 같은 사랑이 다가올 때 그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사랑이 온다면 소모적이고 어리석은 짓일지라도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고 싶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자전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하다. 더구나 ‘탐닉’은 처음부터 작가 스스로 제 일기라고 밝히고 있다. 작중 화자의 목소리는 한 남자에게 미쳐버린 작가의 육성으로 뒤바뀐다. 나는 그것을 다시 작중 화자의 목소리로 되돌린다.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신동아 200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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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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