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부용정과 흡사한 활래정은 선교장에서 가장 멋스러운 곳. 주자의 ‘관세유감’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대지가 3만평이나 되는 선교장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통가옥. 큰사랑채 열화당과 작은사랑채, 행랑채, 연지당, 동별당, 활래정, 서별당 등 10여개 건물에 120칸이 들어서 있다. 지금도 계속 집안 규모를 넓히고 있어 조선시대 민간주택의 한계인 99칸을 초과하게 됐다.
선교장의 지세를 살펴보면 먼저 대관령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오는 산세 한 가닥이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가 시루봉으로 솟은 점이 눈에 띈다. 시루봉의 맥은 경포대 쪽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내청룡과 내백호를 분화해놓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알파벳 ‘U’자 같다. 산세도 높이 200m 내외여서 위압감보다는 편안함을 준다. 청룡과 백호가 활처럼 둥그렇게 감싼 집터의 아늑함 때문일까. 이곳은 문사(文士)들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곳으로 느껴진다.
이곳을 집터로 잡은 주인공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가선대부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1703∼81)이다. 이내번은 한 떼의 족제비가 일렬로 무리 지어 서북쪽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 광경을 신기하게 여겨 뒤를 따라갔는데, 이 족제비떼가 지금 선교장이 들어선 땅 부근의 숲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내번은 이곳이 명당이라 판단하고는 선교장을 지었다고 한다.
선교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이강백씨 내외.
그 때문일까. 선교장에선 선가(仙家)의 풍류가 배어나온다. 한국의 지적 전통을 이루는 유·불·선 삼교(三敎) 중 가장 낭만적인 게 선가이다. 유가의 현실참여적 면모와 불가의 초탈적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현실세계에서 부지런히 일하다 은퇴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력적인 일 아닌가.
호남 민요 중 새를 쫓는 노랫말 중에 ‘배다리 통천댁으로 가라’는 대목이 있다. 그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장의 조상 중 한 명이 통천 군수를 지낼 때 극심한 흉년이 들자 집 창고에 있는 쌀 수천 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눠줬는데, 그 일 이후 선교장이 배다리 통천댁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선교장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선교장 사람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한 후 자연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이곳에 돌아왔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열화당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왼쪽으로 행랑채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