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뜨거운 논쟁 불러일으킨 영화 ‘화씨 9/11’

예술의 얼굴을 한 ‘정치적 폭탄’

  •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dictee@empal.com

    입력2004-08-26 15: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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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논쟁 불러일으킨 영화 ‘화씨 9/11’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칸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 전부터 세상은 두 시간이 넘는 이 다큐멘터리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언론도 시사회 직후 뜨거운 반응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지금껏 공개된 공식 경쟁작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그것은 확실히 진풍경이었다. 15~20분이나 박수 소리가 시사회장에서 터져나왔다. 영화가 끝난 후 마이클 무어가 레드 카펫을 밟으며 퇴장할 때 장내엔 존 레넌의 ‘이매진’이 흘러나왔다. 해당 영화의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칸의 관례를 깬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화씨 9/11’의 그랑프리 수상 후 각종 논평이 쏟아져나왔다. 그중 상당수는 이 영화가 미칠 파장에 관한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화씨 9/11’이 백악관을 겨냥한 정치적 수류탄이 될 것”이라 논평했고, ‘뉴욕 타임스’는 “마이클 무어 감독이 칸에서 정치적 폭탄을 터뜨렸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랬다. 이것은 예술적 폭탄이 아니라 정치적 폭탄이었다.

    그러나 ‘화씨 9/11’이 정치적 폭탄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칸에 오기까지 마이클 무어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배급을 맡기로 했던 디즈니사가 부시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이 영화 배급을 포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미국 대선 전에 상영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무어는 “디즈니사가 영화 상영을 막으려는 백악관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화씨 9/11’은 미국 대선 전에 반드시 상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강력한 주장은 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디즈니로부터 ‘화씨 9/11’의 판권을 재매입한 미라맥스 대표 하비와 보브 와인스타인 형제가 배급을 위해 구성된 그룹을 통해서 2004년 6월25일 미국 전역에 개봉할 것임을 밝혔다. 무어는 한 인터뷰를 통해 와인스타인 형제를 각각 프로도와 샘에, 배급사들을 반지 원정대에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불의 산에 거주하는 악마 사우론은 말할 것도 없이 부시 대통령일 것이다.

    부시를 청산하기 위해 만든 영화



    2004년 6월25일 마침내 ‘화씨 9/11’은 극장에 걸렸다. 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많은 논평과 비판과 기대가 교차했다. ‘화씨 9/11’은 이런 반응을 단번에 녹일 만한 뜨거운 영화였다. 미국 전역에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 어쨌든 한 달 동안 수많은 관심을 끌었으니 그 자체로 홍보를 하고도 남았다. ‘화씨 9/11’은 개봉 첫 주말 사흘 동안 모두 2180만달러의 흥행 수입을 거두며 정상을 차지했다. 이로써 이 영화는 미국 박스오피스 역사에서 1위에 오른 첫 번째 다큐멘터리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화씨 9/11’은 미국 내에 머무르지 않고 전세계로 배급되기 시작했다. 배급사들은 전쟁 반대 분위기가 달아오른 7월과 8월에 전세계 극장가로 영화를 배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이라는 영광의 호칭보다는 ‘반(反)부시’ 영화라는 것이 홍보의 핵심이었다.

    ‘화씨 9/11’은 과거의 한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건 모두가 단지 꿈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플로리다를 축복하시길, 감사합니다! 지난 4년은 정말 없던 일이었을까요? 벤 애플렉이 있군요. 제 꿈에 종종 나오지요. 그리고 택시드라이버, 로버트 드 니로. 그도 저기 있군요. 그리고 스티비 원더. 그도 행복해 보입니다.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요. 그것은 꿈이었을까요? 아니면 사실이었을까요? 2000년 선거날 밤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무어가 보여주는 장면들은 4년 전 미국 대선에서 승리를 예감한 앨 고어 진영의 풍경이다. 방송사들도 한결같이 고어의 승리를 예상했다. 앵커들은 “뉴욕에서는 앨 고어가 승리할 예정입니다”고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잠시 뒤 한 방송사에서 부시의 승리를 예언하기 시작했고, 판세가 흔들리더니 법정에서 엉뚱한 결론이 내려진다. 정말이지 마이클 무어는 할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서라도 부시의 승리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무어는 고어의 어이없는 패배를 영화 초반부에 비중 있게 다루면서, 9·11 테러의 참사와 맞먹는 이미지로 배치한다.

    무어는 이미 4년 전 선거 결과가 부당하다며 “부시를 백악관에서 쫓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한 바 있다.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전세계를 향해 “부끄러운 줄 아시오, 부시”라며 경고를 보냈다. 그가 되찾고 싶은 것은 선거권을 지닌 미국 시민으로서의 양심과 권리다. ‘화씨 9/11’은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뜨거운 책임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영화를 만들고 책을 쓰는 것이며, 이를 통해 동시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무어는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서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명백히 적어내려가고 있다. “아마도 미국민에게 2004년 선거에서 조지 부시를 패배시키는 일보다 더 큰 지상 과제는 없을 것이다. 파멸로 가는 모든 길이 그와 그의 행정부를 관통하고 있다. 이 미친 세월이 4년 더 지속된다면 캐나다조차 그렇게 추운 나라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4년 더? 나는 4분도 못 견디겠다. 내가 지난 1년 동안 받은 수천 통의 이메일과 편지는 모두 다음과 같은 절박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 ‘화씨 9/11’은 부시를 대청소하기 위해 만든 영화다. 이 작품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걸고 영화는 부시 가문과 사우디아라비아 및 알 카에다 집단 간에 이어져온 부적절한 커넥션을 소상하게 묘사한다. 부시와 딕 체니가 탈레반 사절단을 맞아 가스관 공사를 따낸 기록을 공개하고, 부시 부자가 밀접하게 관련된 군수업체 칼라일그룹에 빈 라덴 가문이 투자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일깨워준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곧 빈 라덴가를 비롯한 사우디아라비아인 소유 회사들이 아들 부시가 운영했던 회사에 투자했으며, 바로 그때 아버지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절정은 다름아닌 9·11 테러가 일어나던 날 아침 부시의 표정이다. 스크린엔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부시가 참모로부터 사태를 보고받고도 10분 가까이 아무렇지도 않게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펼쳐진다. 참모의 보고를 귓속말로 전해 들은 부시의 얼굴엔 놀라움이 아니라 마치 “한다더니 정말 했네”라는 식의, 어느 정도 사태를 예감한 듯한 멀뚱한 표정이 떠오른다. 이렇게 마이클 무어는 거대한 음모 이론 속으로 파고든다.

    냉정히 말해 ‘화씨 9/11’은 새롭게 뭔가를 말하는 영화는 아니다. 무어는 언론에서 이미 제기했던 문제들을 놓고 자신의 촬영팀이 찍은 것과 텔레비전 뉴스 화면 등에서 구해온 이미지를 편집해 종합했을 뿐이다. 부시 일가와 오사마 빈 라덴 가문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추론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낱낱이 파헤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경제에 투자된 사우디 왕실의 돈이 천문학적 규모라는 것, 테러가 발생하고 그 연장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사우디 왕실은 물론이고 그들과 사업적 공모 관계를 맺은 부시 일가와 관료 집단이 군수업체의 호황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된다는 해석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문제는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공포 분위기를 통해 미국 시민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측은 부시 일가와 측근들 그리고 기업인들이다. 일반인은 억울한 피해를 보며 살 뿐이다. 무어는 바로 이 점에 분노한다.

    공항 검색대에서 한 산모가 아기에게 먹일 젖을 미리 짜 담은 병을 통째 마셔야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이클 무어는 공항 보안당국이 위험하다며 경계하는 것의 순위를 매긴다. 그중 제일 위험한 것이 엄마의 젖이고 그나마 괜찮은 것은 라이터와 성냥이다. 아마도 라이터를 만드는 대기업이 뭔가 관계 당국에 로비를 한 모양이다는 게 무어의 추론이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든 이 비상식적인 광기에 대해 탄식하고 분노하는 동시에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은 외부인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나라가 됐다. 이른바 애국법이 발효된 후 유학생이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 목록까지 FBI 파일에 저장되는 가공할 만한 경찰국가가 된 이 나라에서 정작 그 법을 통과시킨 의원들 가운데 법안을 제대로 읽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어느 의원의 증언을 들으면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한 늙은 의원은 마이클 무어에게 말한다. “이보게 젊은 친구. 의원들은 원래 법안을 읽지 않는다네. 법안을 일일이 다 읽다간 하나도 통과시킬 수 없어. 그럴 시간이 없어. 그렇게 하면 나라가 운영되지 않아.” 이쯤 되면 무어의 저서 제목처럼 누구라도 자신의 나라를 되돌려달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테러 위협은 대국민 선전용?

    무어는 관객에게 이 자명한 공포정치의 맥락을 까발리며 시종일관 저능아 같은 조지 부시를 야유하고 정치가들의 거짓말과 실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여준다.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목표물에 대해 정확한 포격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다음에 무고한 이라크의 한 마을 전체가 초상집으로 변한 상황을 이어 붙이거나, 살인 무기를 감추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하는 부시의 목소리와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는 바그다드 시민의 모습을 병치시키며 무어는 자명한 악의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를 줄기차게 들이댄다.

    이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미학이나 수법은 아니다. 그보다는 신문 보도를 열심히 읽지 않는 대다수 미국 국민이나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차원의 홍보에 가깝다. 그런데 이 한 편의 영화가 전세계에 충격을 주는 것은 부시 정권이 지금까지 전개시켜온 대(對)테러 정책과 이라크전쟁 명분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거짓말이라는 게 처음부터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논쟁 불러일으킨 영화 ‘화씨 9/11’

    영화 ‘화씨 9/11’에서 마이클 무어는 국회의원들을 붙잡고 자식을 이라크에 보내라며 입대원서를 들이댄다.

    전쟁 발발 당시 이라크의 후세인은 일사천리로 밀고 들어오는 미군을 향해 생화학 무기는커녕 대포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무슨 치명적 무기를 갖고 있기에 적이 수도로 진격해오는 와중에도 쓰지 않는단 말인가. 또 쓰지도 않을 무기라면 왜 갖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미국인의 절반은 한 줌의 의심도 없이 부시의 말을 믿었단 말인가.

    9·11 이후 대형 건물과 대도시는 물론 작은 시골에까지 테러주의보가 내려졌으며,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거의 발가벗겨지다시피 검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바로 그때 오리건주 순찰대의 예산이 삭감돼 단 한 명의 순찰대원이 100마일에 달하는 해안을 경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테러의 공포와 위협은 TV 전파를 타고 귀가 따갑게 방송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에 대한 대비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관객은 이를 보면서 테러의 위협이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한 선전용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무어는 괴벨스, 부시는 히틀러?

    하지만 너무나 뜨거운 이 영화에 무조건적인 지지와 찬사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선동적인 편집과 장광설에 대해 심한 거부반응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과연 이것이 객관적인 자료들을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됐다.

    먼저 영화 내부를 향한 비판이 제기됐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마이클 무어를 표지인물로 싣고 ‘화씨 9/11’을 좌파를 위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비유했다. 기자는 두 영화 모두 객관적 사실보다는 입증 불가능한 믿음을 지닌 집단의 열광에 힘입어 성공을 거뒀고, 이런 영화들은 합리적 토론문화를 마비시키는 문화적 ‘독약’이라고 평했다. 어느 정도 옳은 지적이긴 하지만, 분명히 해둬야 할 사실이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열광한 집단과 ‘화씨 9/11’에 열광한 집단은 분명히 다른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미국 사회 내에서 합리적인 토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화씨 9/11’이 주장하는 바다. 무어는 쉴 새없이 되묻는다. 그토록 비판에 철저한 언론이 부시와 빈 라덴 가문의 이상한 밀월 관계에 대해서는 왜 질문하지 않는가. 무어는 거대한 미디어들을 대신해 총대를 메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화씨 9/11’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유사한 점이 있다면, 텔레비전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이 다룰 시도조차 꿈꾸지 않았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화씨 9/11’에는 무어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얼쩡거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라크를 비롯해 세계 도처에 파병한 미군의 대다수는 하층민이거나 소외된 계층이다. 국회는 이라크전쟁을 지지했지만 정작 국회의원의 자녀 중 이라크로 향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무어는 국회의원들을 붙잡고 자식을 어째서 군대에 보내지 않느냐며 입대원서를 들이댄다. 무어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면 이런 장면이 가능하겠는가.

    무어의 행동을 두고 미국의 보수적인 비평가는 나치 시대의 문화부 장관 괴벨스에 빗댔다. 그 비유를 고스란히 되돌려주자면, 정작 무어가 보기에 부시는 히틀러와 같을 것이다.

    지금의 미국은 공포 정치를 통해 끊임없이 억압받는 사회이다. 부시 정권은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다’ ‘생화학 무기가 다량으로 묻혀 있다’는 계속적인 거짓 위협을 해가며 국민을 선동한다. 이 전통은 꽤 뿌리깊은 것이다. 미국 사회는 언제나 공포정치를 통해 희생양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무어의 전작(前作) ‘볼링 포 콜럼바인’의 주제이기도 하다. 가령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사건의 배경으로 전문가들은 헤비 메탈, 폭력영화, 사우스 파크, 마약, 그리고 마릴린 맨슨을 지목했다. 콜럼바인 참사의 주역인 에릭과 딜런의 집에서 마릴린 맨슨의 CD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무어는 마릴린 맨슨을 직접 만나는데, 맨슨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진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미국의 미디어와 수많은 광고라고 지적한다. 입내가 나면 왕따를 당할 거라고 외치는 광고, 여드름을 없애지 않으면 여자친구가 도망갈 거라고 위협하는 광고들이야말로 정치계의 발언과 더불어 진정한 ‘공포’를 조장한다는 것. 마릴린 맨슨은 “홍수, 에이즈, 살인 관련 뉴스 등이야말로 미국 경제의 기초”라고 비꼰다. ‘화씨 9/11’에서는 그런 미디어와 광고들이 경제의 기초를 뛰어넘어 통치와 권력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씨 9/11’에 대한 공방전은 영화 밖에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무어의 반대자들은 무어가 자신의 작품과 모순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무어의 집값은 무려 100만달러를 웃돌고 무어의 자녀는 고액의 학비가 들어가는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 반대자들은 무어가 출판사나 영화사의 요청으로 여행을 할 때 비행기 일등석 티켓과 고급호텔을 요구한다며 비난한다. 이런 인격적인 비난 외에도 영화 ‘로저와 나’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소리 높여 외친 그가 정작 자신의 영화 스태프의 권익은 무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작가들이 작가협회에 등록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

    뜨거운 논쟁 불러일으킨 영화 ‘화씨 9/11’
    정치적인 비난도 가세하고 있다. 공화당측은 ‘화씨 9/11’을 두고 “대선을 겨냥한 민주당과 마이클 무어의 비열한 합작품”이라고 논평했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커크 허니컷은 “‘화씨 9/11’은 단지 대선을 위한 책략으로서의 리얼리티 영화다. 영화 속 사실들은 이미 출판된 책과 정치논평 자료들에 비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다만 영화가 인쇄매체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이다. 또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좋은 영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 얼마나 큰 힘을 보탤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 다양한 반응과 논평이 오간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부시와 부시 일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심을 집중시키고 싶었던 무어의 의도는 그대로 적중했다.

    전쟁의 참혹함 보여주는 秀作

    그러나 이러한 공방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화씨 9/11’은 누가 뭐래도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영화 후반에서 이라크에 참전한 미국 병사들은 전장에서 총질을 할 때 헬멧 속 스피커에서 ‘몸뚱이를 쓰러뜨려’ ‘지붕이 불탄다’는 호전적인 노래가 쾅쾅 울렸다고 고발한다. 젊은 군인들의 광기를 선동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또 연방의원 535명 중 아들을 이라크 전장으로 보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는 사실과 빈민촌에 사는 흑인 청년들을 모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미국 군대를 비교함으로써, 무어는 이번 이라크전쟁이 가난하고 못 배운 젊은이들의 생명을 희생시켜 미국 부유층의 경제적 부를 살찌우는 것이라는 메시지 또한 잊지 않는다.

    전쟁의 끔찍함도 고발한다. 미군에 의한 이라크 포로 학대와 이라크인들에게 훼손된 미군 시신도 볼 수 있다. 무어는 이러한 참상을 공개하면서 그 궁극적 책임을 부시에게 돌린다. 부시 대통령이 젊은이들을 속여 군대에 보내는 부도덕한 행위를 했고 이것이 또 다른 부도덕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에 관한 최고의 비극은 한 여인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애초에 부시의 지지자였으며 아들의 군 입대를 부추겼던 이 중년 여인은 아들이 이라크에서 죽은 뒤 비로소 이 전쟁의 부도덕함을 절감한다. 그리고 아들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에 괴로워한다.

    어느 날 워싱턴에 온 그녀가 역시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고 백악관 앞에서 농성하는 한 여인과 동병상련을 나눌 때 또 다른 여자가 카메라 앞에 다가와 외친다. “이건 쇼야!” 중년 여인이 “내 아들이 이라크에서 죽었어요”라고 외치자 “그건 알 카에다에게 말하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 여인은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 그곳을 빠져나오다가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고 울먹이며 주저앉는다. 관객은 이 비극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한 미국 현대사회의 보고서

    이처럼 ‘화씨 9/11’은 쉬지 않고 비리와 참상을 고발하는 영화지만 초반부에 잠깐 침묵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9·11 테러가 벌어지는 장면이다.

    폭발 소리와 비명이 들리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뒤 사람들이 건물을 올려다보고 무너진 건물 파편이 떨어지는 장면이 느린 동작으로 나온다. 마이클 무어는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나 길에 떨어진 시신의 살점 등 훨씬 끔찍한 필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지나친 공포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는 우리의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 아니라 각성되기를 원한다. 무어의 영화와 무어의 입술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도록 쉬지 않고 온갖 정보와 음모론과 농담을 제공한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보여지지 않았고, 말해지지 않았으며, 들리지 않았다.

    결국 복잡한 미국 현대사회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화씨 9/11’은 “전쟁에는 승리가 없고 끝없이 이어질 뿐”이라는 조지 오웰의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마이클 무어가 이라크전쟁을 일으킨 부시를 공격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 무어의 영화를 옹호하건 비판하건 간에 오늘도 이라크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또 누군가는 부시를 위해 혹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참호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미국인에게도, 이라크인에게도, 그리고 한국인에게도 끔찍한 일이다.



    마이클 무어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다. 침묵은 곧 전쟁과 광기와 죽음의 나날이다. 그는 예술가, 지식인, 그리고 선거권을 가진 모든 이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를 소망한다. 그러한 바람이 오늘날 가장 뜨겁고도 선동적인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무감각한 이성에 불을 질렀다. 이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뜨거운 논쟁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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