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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책 하고 놀자’

과잉과 반복 속에 탈진해버린 詩를 애도하며 詩를 읽자

과잉과 반복 속에 탈진해버린 詩를 애도하며 詩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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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과 반복 속에 탈진해버린 詩를 애도하며 詩를 읽자

유홍준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김종해의 ‘풀’, 이진명의 ‘단 한 사람’, 최창균의 ‘백년 자작나무 숲에서 살자’, 이덕규의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시는 끝장나고 죽었다! 시는 고갈되어 죽은 게 아니라 과잉으로 죽었다. 과잉은 질량의 희석으로 이어진다. 최근 시의 범람 현상은 익명의 주검을 자양분 삼아 자란 무성한 풀에 지나지 않는다. 주검 위에 무성하게 자라는 것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시의 영악한 시뮬레이션, 시의 상상임신으로 인한 헛구역질, 시의 화려한 할리우드 액션이다. 회임의 가능성이 없는 성교의 과잉이 생명의 융성에 기여하지 않듯 다달이 쏟아져나오는 시 잡지들에 불임의 시가 넘친다고 해서 시가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죽음은 자업자득이다. 시의 대중적 스노비즘이 먼저고, 시의 과잉은 그 다음이다. 오늘의 시가 대중에게 경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평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중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서시’)나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서정주 ‘자화상’)라는 구절에 번개 맞은 듯 감전되어 영혼을 떨었다. 하지만 이제 이 시구들은 존재의 경이가 아니라 문화적 화석에 지나지 않는다. 일체의 가치가 소멸되는 무가치의 운명에 빙의(憑依)된 시대에 진짜 시들은 가사상태에 빠지고 시의 아류만이 활개를 친다. 아직 한줌의 숨결을 이어가고 있는 시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부활은 죽음 뒤에 온다

오늘의 시는 “무수한 반동(反動)으로 더, 더, 더 큰 싸움”(김수영)으로 세상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단 한번/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고은)고 할 때 시대의 심장을 꿰뚫는 피 묻은 순교도 아니다. 거품처럼 일어난 과잉과 반복의 시들. 시대의 소음만 있을 뿐 아우라가 없는 시들. 자기 갱신에의 동력을 소진하고 탈진해버린 시들. 시의 죽음을 뚫고 나가려면 그것을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주검을 놓고도 죽음이 아니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다시 살기 위해서라도 시는 제대로 죽어야 한다. 부활은 죽음 뒤에 오는 것이므로.

시는 죽은 뒤에 다시 창조적 소수의견, 발칙한 상상, 해체의 열정으로 살아나야 한다. 20세기 말 한국시들은 너무나 많은 죽음의 전언을 담고 있었다. 죽음의 여진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를테면 다음 시를 보라.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발자국이, 항문처럼/깊다// 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모래 위에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 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유홍준 ‘해변의 발자국’ 실천문학사, 2004).

죽음(실재)은 지워지고 발자국(이미지)만 또렷하다. 헛것의 괄약근이 죽음의 흔적들을 죄었다가 느슨하게 푸는 운동을 반복한다. 해변에 찍힌 발자국이 모래의 괄약근이라는 이미지를 입는 순간 죽음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존으로 살아난다. 해변의 발자국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즉자적 풍경이다. 나와 무관한 이 메마른 즉자적 풍경은 주체의 느낌과 생각에서 나온 항문과 괄약근이라는 독창적인 이미지가 수혈되는 순간 발랄한 이미지의 현존으로 살아난다.

시는 있음에서 나오지만 있음 자체가 아니며 그것을 상처와 결핍의 구조로 드러낸다. 죽음은 주검으로 저를 증명한다. 시의 있음은 주검(있음)의 이미지, 즉 없음의 실재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있음에서 나오지만 그 질서를 해체하고 다른 형태의 질서를 구현한다. 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실은 있음의 본질이다. 시가 뿌리내리는 것은 잘-있음이며, 태고의 있음 속에 잇닿은 잘-있음이다.

있음에서 있어야 함으로 건너가기 위해 그 있음을 보아야 한다. 시인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말하는가!”(신동엽)라고 외쳤다. 누구나 하늘을 보지만 감히 하늘의 뜻을 아는 자는 없다는 외침이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봄은 앎을 향한 의지의 맹아적 발현이다. 지각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 보지 않고 무엇을 알 수 있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눈뜬 장님’은 그것을 역설로 함축한다.

문화적 헛짓, 그것이 시다

무엇을 보았다는 말은 이미 무엇을 안다는 뜻을 선험적으로 품는다. 진짜 본다는 것은 그것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선의 방법적 매개가 없는 대상 세계에 대한 지각은 불가능하거나 제한적이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시선의 주체 앞에 놓인 사물과 그 정황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며, 있음과 있음의 상호관련을 능동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시는 대상을 바로 보려는 것이며, 나아가 대상을 알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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