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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유럽기행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음습한 성벽에 엉겨붙은 폭군의 광기와 피의 역사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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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젖줄 템스강과 우람한 타워브리지를 긴 세월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런던성.
  • 때로는 왕궁으로, 때로는 외침(外侵)의 피난처로 쓰인 이곳은 잔혹한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여섯 아내를 맞았던 헨리 8세. 그의 폭정 아래 수많은 이가 런던성에 피를 뿌렸다. 그 피가 훗날 대영제국의 기틀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런던성의 한가운데 본궁으로 세워진 화이트 타워. 제복을 입은 비프 이터스가 관광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계절상 한여름인 8월 중순에도, 영국의 날씨는 을씨년스럽다. 하늘이 어둡고 자주 비가 내린다. 여기에 스산한 바람까지 한몫 거든다. 대륙과는 전혀 다른 섬나라의 이런 날씨에 한기마저 느껴진다. 이걸 보면 버버리코트 깃을 세우고 긴 우산을 팔뚝에 걸고 다니는 ‘영국 신사’의 전형은 그저 생겨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여행자는 이런 날씨에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아니, 유럽에서 가장 비싼 런던의 호텔 숙박비를 생각하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닐 수밖에 없다. 다행히 런던에는 볼거리가 많다. 최초로 영어사전을 편찬한 영국의 극작가 새뮤얼 존슨이 일찍이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도 싫증난 것이다. 런던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런던은 오랫동안 세계 정치와 금융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런던은 존슨이 살았던 18세기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효력을 갖는다.

런던의 수많은 명소 중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앤 불린(Anne Boleyn)의 비극적인 최후가 아로새겨져 있는 런던성(城)이었다. 정식 명칭은 ‘The Tower of London’인 데도 런던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한때 왕이 거주했던 데다 요새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다. 궁(palace) 또는 성(castle)은 왕권의 실체적 표현이자, 그 주인인 왕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권위의 구조물이다. 때문에 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실의 취향과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역사여행가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왕조의 역사가 무척이나 긴 데다 보수적인 국민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국에는 궁전 건축물이 많다.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1837년부터 영국 왕의 집무공간이자 거주지로 쓰이고 있는 런던 시내의 버킹엄궁과 런던성을 비롯해 11세기 런던 교외에 지어진 이후 왕실 가족이 주말 휴양지로 찾곤 하는 윈저성, 런던성을 떠난 헨리 8세가 한때 머물렀던 런던 외곽의 햄튼 코트궁이 위용을 과시한다. 또 험한 자연 지형을 살린 산성(山城)인 에든버러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벌인 격렬한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고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할 때 머물곤 하는 에든버러의 홀리루드궁, 웨일스의 귀네드에 소재한 에드워드 1세성(14세기 초 에드워드 1세가 첫아들 에드워드 2세를 얻은 곳으로 1301년 이후 이곳에서 황태자의 즉위식이 거행된다)은 여행객에 왕조의 화려한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자 종교개혁을 단행한 헨리 8세. 그의 초상화가 런던성 곳곳에 걸려 있다. 그는 “아들이 필요해”라며 왕비를 다섯 번이나 갈아치웠다.

옥스퍼드 교외엔 처칠의 생가이자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블렌하임궁(왕이 하사한 땅에 왕의 하사금으로 지었다)이 서 있다. 이 가운데 버킹엄궁과 윈저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정복자 윌리엄이 노르망디(지금의 프랑스 서북부 지방)로부터 건너와 왕위를 차지하고는 바다로부터 침범해오는 덴마크나 노르웨이 해적에 대비해 1078년에 짓기 시작한 런던성은 런던이란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템스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찍부터 천연의 요새였으나 기원전후 로마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당시 잉글랜드 전부(스코틀랜드는 제외)를 손에 넣은 로마제국은 이곳을 ‘론디니움’이라 불렀는데, 그게 후일 영어화하는 과정에서 ‘런던’이 된 것이다.

윌리엄 왕이 세운 왕궁의 중심은 하얀 벽돌과 회갈색 벽돌이 섞여 희끗희끗한 화이트 타워다. 그 안쪽 방벽에는 탑이 13개 있고, 바깥 방벽에는 탑 6개와 능보 2개가 있다. 왕궁을 배경으로 튜더 스타일의 붉은 제복을 입은 비프 이터스(Beef Eaters, 헨리 7세가 퇴역군인을 모아 창설한 런던성의 경비)가 서면 한 폭의 멋진 그림이 된다.

‘피’의 상징 스캐폴드

사람들로 북적이는 성의 입구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아랫배가 불룩 나와 배짱이 두둑해 보이는 헨리 8세의 인물화다. 헨리 8세를 런던성의 상징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를 빼고는 이 성의 역사를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곳이 왕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인 헨리 3세 때. 그 뒤로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왕은 고문과 대신들을 이곳으로 불러 대처방안에 대해 자문했으며, 때로는 피란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옛 왕실 무기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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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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