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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달빛만 받으면 나는 증조할머니도 어머니도 된다

달빛만 받으면 나는 증조할머니도 어머니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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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만 받으면 나는 증조할머니도  어머니도 된다
박상만의 ‘조선교육사’에는 밤하늘의 달(月)은 딸의 어원이라 했다. 달처럼 은은하고 아름답되 요란하지 않은 이미지로서 존재를 과시하는 태양과 대비시켰다. 따라서 아들은 달이 아닌 (안달)에서 (아들)로 변음되었다는 것이다. 달은 태양보다 약자이나 태양의 어머니이다. 어둠에서 밝음이, 밤에서 대낮이 태어나듯이.

우리 민속에서 달은 여성이다. 조수의 간조 만조가 달의 운행으로 결정되듯이, 달은 물의 운행과 밀접하다. 여성의 출산력인 생리수와 곡식생산은 물론 모든 생명의 모성인 물과도 직결되어 있다. 개인차가 있지만, 여성의 생리주기도 대부분 음력의 한 달인 28일이고 달밤에 달힘 마시기, 탑돌이, 다리밟기 등 여성의 출산력을 강화한 민속이 많다. 달 돋는 방위에 태(胎) 묻기, 용신제나 산제 등 여성 민속도 달밤과 관련돼 있다. 한가위나 대보름날에는 키우는 개를 종일 굶겨서 기운 빠진 개가 생산력을 얻을 달힘을 못 먹게 하고 그 힘을 그집 안주인이 마시게 했다. 대보름날 개밥 주는 며느리는 집안 망칠 징조라고 탄식했다니, 달은 곧 여성이요 모성이었다. 내 기억에도 달빛은 증조할머니와 어머니였다. 이분들의 기도였다.

한가위 밤, 차 오른 달빛 가득한 주차장을 돌자니 어느새 기도문을 암송하게 됐다. 가끔 무슨 기도문을 어디까지 암송했는지, 마음과 정성과 입이 제각각임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 달빛을 받으면 지난 일을 성찰하고 소원을 빌며 산책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올해 추석에도 만월의 달빛을 쪼이며 성당 주차장을 산책하자니, 절로 기도문을 암송하게 되고 달만 보면 절하며 빌던 증조모님과 달빛 아래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내 기억으로 증조모님은 지금의 쇼트 컷처럼 짧은 머리가 검푸를 정도로, 높은 연세에도 백발이 거의 없었다. 눈동자는 푸르렀고, 얼굴빛은 달빛보다 창백했다. 어머니는 그런 증조모님을 청상(靑孀)으로 살아온 독기가 그대로 서려 있는 분이라 했다. 이 어른은 달만 떠오르면, 그 높은 축담과 댓돌을 날듯이 내려와 맨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퍼부어댔다. 절할 때마다 펄럭이던 흰 치마폭의 물결이 떠오른다. 아직 소년이던 숙부는 비 오는 낮이나 달 없는 밤중에도 “달이 떴다”고 증조모님을 놀려대면서, 귀가 어두운 데 어떻게 ‘달’이란 말은 잘 들으시는지 궁금해했다.

절을 하시다가 쓰러진 증조모님은 자주 조모와 어머니의 부축으로 아랫목에 누우셨고, 나는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나를 위해 뭐라고 빌었냐고 묻곤 했다. “…앉아서 밥상 받고, 일어서 호령하고, 걸어서 내 땅 밟고…” 몹시 속된 내용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 어른의 깊은 한 그대로였다 싶어 마음이 아파진다. 증조부께서는 아홉 살, 다섯 살 남매와 20대의 증조모님을 두고, 을미사변 전후 의병으로 나섰다가 왜인의 총에 돌아가셨다. 그뒤로 진사댁 둘째 집인 우리 가문에는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뿐이었다. 그러니 달을 향한 기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견디어내셨겠는가, 그 억울한 세월을. 혈손들을 일일이 거명하며 소원을 빌고 비는 그분 평생의 최우선 사업 때문에 장수하실 수밖에 없었으리라.

수년 전, 친일청산이 거론될 때 나는 그 일을 하는 단체에 50만원을 기꺼이 보냈다. 내게는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증손녀로서 임진·정유란 때 문관이면서도 의병장을 지냈다는 어느 조상어른과, 장터에서 순국하신 증조부께 제사를 드린 것이라 여겼다. 증조부님은 유공자 명단에 올려드리지 못했다는 죄송함에서, 최소한의 제삿상차림으로 여겼다. 희미한 기억 속에 조부와 아버지가 나누시던 말씀이 맴돌곤 한다.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 몇 푼 받자고 그래야 할지. 뒷전에서 구경하던 아무아무 어른은 부상도 당한 적 없으면서….”

그러면서 나도 알 듯한 몇 분을 거명하셨다. 그때는 어른들의 일로 여겨 무심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더구나 안동 지방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글을 보니, 증조부님의 함자가 없지 않던가. 그것은 우리 식솔이 일찍 출향해 자료를 제공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조부와 아버지가 나누던 말씀이 생각나 몹시 착잡했다. 그러나 자손인 내 존경과 성의는 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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