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10-27 18: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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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능경봉 정상에서 바라 본 구름바다.

    강원도(江原道)의 어원은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에서 나왔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도 단위 행정구역 명칭에 쓰인 고을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물산이 풍부하거나 교통이 발달해서 먹고살기에 걱정 없는 땅, 둘째 대대로 인재가 많이 태어나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은 곳, 셋째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고유한 멋을 가진 장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변란시 숨어 지내기에 적당한 터다.

    그렇다면 강릉과 원주는 어떤 경우일까.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먼저 강릉지방이다. ‘이름난 호수와 기이한 바위가 많아 높은 데 오르면 푸른 바다가 넓고 멀리 아득하게 보이며 골짜기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늑하여 경치가 나라 안에서 참으로 제일이다. 사람들은 노는 것을 좋아하여 노인들은 기악과 술, 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 사이에서 흥겹게 놀며, 이를 큰 일로 여긴다.’

    다음은 원주다. ‘경기도와 영남 사이에 끼여서 동해로 수운(輸運)하는 생선, 소금, 인삼과 궁전에 소요되는 재목들이 모여 하나의 도회가 되었다. 두메와 가까워 난리가 나면 숨어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 세상이 평안하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까닭에 한양 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살기를 좋아한다.’

    같은 강원도라지만 강릉과 원주는 오래 전부터 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다. 어찌나 차이가 나던지 세상 사람들은 대관령을 중심으로 동쪽의 강릉지방을 영동, 서쪽의 원주지방을 영서라 구분했다. 영동과 영서의 살림살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백두대간이다. 차가운 북서계절풍을 맨 몸으로 맞아야 했던 영서지역 사람들이 한가위를 지내기 무섭게 겨울을 준비해야 했던 것과 달리 영동지역 사람들은 백두대간이 바람을 막아주는 데다 난류의 도움까지 받아 한겨울에도 추위를 걱정하지 않았다(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강릉의 1월 연평균 기온은 영상 0.3도, 원주는 영하 4.8도다).

    두 지역의 희비는 농사철에도 엇갈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높새바람. 이것은 동해바다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넘어가는 북동풍으로 농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영동지방이야 알맞게 부는 바람이 나쁠 게 없지만, 영서지방은 다르다. 바람이 백두대간을 타고 넘어가면서 일으키는 푄(Fohn, 바람이 높은 산을 통과할 때 기온이 상승하는 현상) 현상 때문에 영서지방의 농작물이 말라죽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도로교통 시대가 열리면서 영동지방이 영서지방을 넘어 수도권과 긴밀하게 연결됐다지만, 백두대간에서 바라본 두 지역의 풍경은 여러 모로 다르게 느껴진다.



    정동진에서 강릉으로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9월11일 밤.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열차를 탔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정동진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기차가 정동진역에 멈춰 서자 예상대로 승객 대부분이 내렸다. 객차 안에 남은 사람은 배낭을 짊어진 중년의 아저씨와 필자 둘뿐이었다.

    열차는 정동진역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가랑비에 젖어가는 차창 밖으로 파도가 거세게 밀려온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1시간 남짓 남았다. 비까지 내리는 걸 보면 일출은 이미 물 건너갔음에도 사람들은 백사장을 거닐거나 플랫폼을 서성거리며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 기차가 출발한다. 밤바다를 뚫고 밀려오는 파도는 열차의 발목까지 차오를 것 같다. 정동진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맛보려면 철로보다도 7번 국도를 타야 한다. 이 길을 달리다 보면 파도가 도로까지 넘나들면서 바다와 육지가 한데 뒤섞이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강릉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영동지방에 큰 인물이 나지 않는 이유로 수려한 경치와 척박한 토양을 거론한 뒤, “오로지 강릉만이 예외”라고 평한 바 있다. 강릉사람의 교육열은 예로부터 유명했는데, 특히 율곡 이이를 길러낸 신사임당의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 이외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 바로 조선사회의 혁명을 꿈꾸었던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다. 후세 사가들은 그를 국가가 배척한 불교를 믿고 기행을 일삼다 수차례 탄핵과 유배를 당했다고 기록했지만 조선민중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는 신분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탁월한 사상가였다.

    강릉역에서 삽당령으로 가는 버스를 수소문했다. 젊은 택시기사는 “오래 전에 버스운행이 중단됐다”며 택시로 오를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는 “구 시청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하루에 2대 있다”고 알려주었다. 택시를 타고 구 시청으로 가서 20여분쯤 기다리자 정말 버스가 왔다. 승객은 두 사람. 일찌감치 들에 나가는 할머니와 필자뿐이었다. 버스기사는 언제까지 삽당령 노선이 계속 운행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강릉에서 삽당령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버스기사는 두 사람을 위해 조심스럽게 벼랑을 올랐다. 도중에 할머니가 내리자 기사는 저녁 버스시간을 알려준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를 향해 손을 흔든다. 세상에 이처럼 정겨운 모습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벼랑 왼편의 강릉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저수지 위로 군데군데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운치를 더해주었다. 마침내 삽당령이다. 버스기사는 중요한 임무라도 끝낸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필자에게 안전한 산행을 당부했다. 필자도 방금 전의 할머니처럼 떠나가는 버스에 손을 흔들고 고마움을 표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느껴졌다. 방수 파커를 껴입고 배낭 커버를 씌운 뒤 산행을 시작했다.

    닭목재, 닭목골, 닭목

    삽당령을 출발해 862m봉을 지나면서 빗줄기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들미재를 거쳐 석두봉(982m)에 이르자 다시 굵어졌다. 거의 폭우 수준이다. 석두봉 못 미쳐 펼쳐진 잡목지대와 석두봉 너머 길게 늘어선 산죽밭을 통과하자 온몸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다행스러운 건 산세가 험하지 않아 힘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점. 산길 곳곳에 도토리와 깨금(개암)이 떨어져 있고, 이따금씩 다람쥐와 산토끼가 뛰어다니며 먹이를 챙긴다. 여유롭게 이어지던 대간 마루금은 화란봉(1069.1m)에 이르러 모처럼 급하게 올라선다. 빗물에 발이 미끄러지기를 수차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올라서니 구름이 산을 감싸는 모양새가 일품이다. 왼편으론 구름에 가려 있다 나타난 소나무들이 도도한 자태를 뽐낸다. 날씨만 쾌청하면 이곳에서 다리를 두드리며 건너편 산세를 조망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화란봉 너머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겨울철 눈밭산행이라면 꽤나 애먹었을 구간을 몇 군데 지나자 멀리 닭목재(706m) 주변의 채소밭이 보인다. 이곳은 5·16 이후 군인들이 개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강원도의 특산물 감자의 채종지역으로 유명하다. 보통 감자는 한 곳에서 내리 재배하면 바이러스 등에 쉽게 감염되는데 이를 ‘퇴화’라고 한다. 그러나 강원도의 고랭지 지역에서 재배한 감자를 종자로 쓸 경우 퇴화를 예방할 수 있다. 더구나 강원도 감자는 알이 굵고 녹말 함유량이 많아 전국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강원도에서 많이 생산되는 감자와 옥수수는 통일 이후의 한반도 식량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한지역은 남한보다 산지 비율이 더 높아 벼농사에 한계가 있는 반면, 고랭지 지역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어 옥수수나 감자 재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글로벌 시대에 식량안보는 어울리지 않는 논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농산물 자급수준이 높은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의 농산물 자급률은 쌀을 제외할 경우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우리가 식량문제에 새롭게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닭목재 위로는 강릉과 임계를 연결하는 410번 도로가 지나간다. 닭목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근방에 위치한 마을 이름도 닭목골과 닭목이다. 비가 쉬이 멈출 것 같지 않아 도로 옆 농산물 저장창고에 퍼질러 앉아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걸음을 멈추자 한기가 올라왔다. 확실히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몸이 떨리자 의욕도 한풀 꺾였다. 잠시 발길을 돌릴까 하는 유혹이 들었으나 계속 내치기로 했다. 다음 코스를 따져보니 대관령까지 끊는 것이 무난할 듯싶었다.

    목장길 지나 마주친 구름바다

    닭목재를 떠나자 곧바로 넓은 배추밭이다. 싱싱한 배춧잎에 떨어지는 빗물이 흐르지 않고 튀는 것으로 보아 배춧잎이 제법 싱싱한 모양이다. 저 정도면 중간상인들의 등급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할 것 같다. 보통 서울의 도매상들은 배추를 고를 때 밑동을 걷어차본 뒤 품질을 가늠한다. 956.6m봉을 지나자 오른편으로 철조망이 보였다. 이곳은 한우목장과 대간 마루금의 경계선이다. 온통 구름에 가려진 목장 아래쪽으로 희미하게나마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동해전망대 앞쪽의 풍력발전기

    백두대간은 956.6m봉을 오른편에 두고 빙글 돌아서 지나간다. 목장 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초지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가 보인다. 바람의 영향으로 소나무는 하나같이 대간 마루금 쪽으로 기울어 있다. 비탈에 위태롭게 붙어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자니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조금 더 걸어가니 소나무와 고사목이 구름 속에서 어우러지는 광경이 연출된다. 사진기를 꺼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956.6m봉에서 고루포기산(1238.3m)까지는 2km마다 쉼터가 있다. 강릉시 왕산면에서 설치한 시설인데, 알루미늄으로 튼튼하게 만들어 길손들이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은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선을 달린다. 고루포기산을 넘으면 왼편으로 폭포소리가 들리는데 이곳이 바로 실폭이다. 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곧장 내려가면 평창의 명소인 용평리조트로 연결되는 길이 나오고, 대간 마루금은 용평리조트 반대편인 횡계현으로 향한다.

    횡계현에서 능경봉(1123.1m)까진 힘을 좀 쏟아야 한다. 군데군데 너덜지대가 있고 길이 사라진 잡목숲도 뚫어야 한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줄기를 걷어내고 간신히 길을 확보하면 어디선가 보이지 않던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린다. 처음엔 따갑고 아프지만 물기가 얼굴을 타고 흐르다 보면 부드럽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능경봉을 수백 미터 앞둔 지점에서 온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른편 동해바다 쪽으로 장엄한 운해가 펼쳐졌다. 운해는 능경봉 정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바다와 구름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백두대간의 중턱까지 온 천지가 구름으로 뒤덮였다.

    능경봉에서 대관령으로 내려서는 길에서는 새로 뚫린 영동고속도로를 바라볼 수 있다. 백두대간 남쪽의 마지막 고속도로를 땅 밑으로 떠나보내고 길손들이 목을 축이는 약수터를 지나치면 멀리 추억의 구 영동고속도로가 나타난다. 새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던 대관령 휴게소엔 몇 대의 관광버스만 서 있을 뿐, 과거의 명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강원도 사람들의 삶을 가장 크게 바꿔놓았던 그 길 위로 자동차가 아닌 롤러스키와 사이클의 기나긴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구름을 태우고…

    9월24일 밤 서울강남터미널에서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다. 한가위 귀향인파 탓에 서울 도심에서 다소 밀리긴 했지만 3시간20분 만에 강릉에 도착했다. 산에 오르기는 이른 시각이라 택시를 타고 경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명절을 앞둔 탓인지 해변은 한산했다. 모래사장 군데군데에서 몇몇 연인들이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서 해변을 바라보다가 모래사장에 누웠다. 소리로 바다를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20여분쯤 지나 있었다. 모래사장을 걸어나와 밤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카페로 갔다. 손님은 단 두 사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창가 옆 테이블에서 홀로 술잔을 따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졸던 아르바이트 직원을 깨워 커피 한잔을 주문한 뒤, 테이블 위에 놓인 낙서 노트를 읽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사랑에 목마른 사람, 사랑에 지친 사람…. 낙서 노트에는 사랑 때문에 경포대에 찾아온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새벽 5시. 수평선 너머에 기나긴 불빛들이 늘어섰다. 밤새 오징어를 잡던 어선들이 귀항을 서두르는 모양이다. 이제 머지않아 동이 틀 것이다. 종업원을 깨워 커피 값을 지불하고 해변으로 걸어나갔다. 해수욕장 주변의 숙소에서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고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일출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 새끼손가락만한 불덩어리가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붉은 기운이 검은 구름을 태워버렸다. 이 순간을 기다리며 새벽잠을 포기했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경포호수 주변을 걸었다. 경포호수 주변은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기에도 좋은 코스다. 누가 뭐라 해도 경포호수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경포해수욕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경포대에 올라야 한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관동의 으뜸’이라고 극찬했던 경포대는 바다와 호수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명승지로 유명하다. 경포대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봄철인데, 경포대에서 벚꽃으로 물든 경포호수를 바라보는 광경이 압권이다. 한때 둘레가 30리에 달했던 경포호수가 이젠 토사가 밀려들면서 10리 안팎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경포대 일출

    택시를 타고 대관령으로 향했다. 대관령 정상에 이르기 직전 강릉 방향으로 ‘대관령 옛길 반정(反程)’이라고 쓰인 비석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대관령 옛길의 끝점으로, 신사임당이 이율곡의 손을 잡고 넘었고 궁예가 명주성(강릉의 옛 지명)을 차지하기 위해 말을 몰았던 ‘진짜 대관령’이다. 대관령의 본래 이름은 ‘대굴령’으로,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 다시 말해서 대굴령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대관령인 셈이다.

    영동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가장 큰 고개인 대관령은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라는 사람이 소로(小路)를 낸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형산은 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훗날 두 번 죽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병자호란 때 주문진에 상륙한 오랑캐가 이 길을 이용해 빠르게 한양으로 진입했는데, 전쟁 도중 오랑캐에게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한 인조가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고형산의 무덤을 파헤쳐 없애라고 어명을 내렸던 것이다.

    대관령을 관통하는 국도와 고속도로가 생겨나면서 대관령 옛길은 잘리고 끊겼다. 옛길을 모두 살펴보려면 이제는 나누어서 걸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로 달리자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넘어설 수 있는 대관령이지만, 옛길로 걸어가자면 여전히 힘든 고개다. 새삼 신사임당이 아흔아홉 구비를 넘어서면서 남긴 시구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이 몸은 홀로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대관령에서 10여분 올라서면 왼편으로 넓은 초원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동해전망대까지는 백두대간 전 구간에서 가장 평탄한 코스. 서쪽으로는 광활한 목장지대가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시원한 동해바다를 만끽할 수 있다. 이 구간에서 한번쯤 살피고 지나야 할 곳이 바로 선자령(1157.1m) 조금 못 미쳐 있는 대관령 국사성황당이다. 강릉사람들은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중생들에게 불법을 설파한 범일국사를 오래 전부터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모셔왔는데, 지금도 이 신이 화를 내면 영동지방에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다.

    선자령에서 곤신봉(1127m)으로 가는 길의 왼편으로 삼양축산목초지가 보인다. 산 정상을 깎아내고 축구경기장처럼 만든 고랭지 채소밭도 보인다. 주변을 살펴보니 한 젊은이가 시야가 트인 곳에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선자령 갈림길을 지나자 산 중턱을 둘러쌌던 안개가 깨끗이 걷혔다. 그러자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대초원의 풍경화가 등장했다. 초여름이면 이곳에서 양떼들이 뛰놀고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들면 젖소들이 풀을 뜯는다. 이런 느낌 때문에 수많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대관령에 이르러 ‘길 떠나기를 잘했다’는 포만감에 휩싸이는 모양이다. 곤신봉을 넘어서자 초원에서 풀을 깎고 내려오는 트랙터가 나타났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트랙터 운전사도 클랙슨을 눌러 답례한다.

    동해전망대가 가까워지자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보였다. 서편 아래쪽의 삼양목장 쪽에서 올라온 차들이다. 총면적 600만평에 달하는 삼양목장은 여의도의 7.5배 규모로, 이곳에 놓여진 도로만도 무려 120km를 넘는다. 그래서 자동차를 타고 순환코스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젖소들이 떼지어 다니면서 풀을 뜯는 모습이나,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송아지들, 그리고 동해바다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삼양목장의 풍경은 도시인들의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그림들로 가득하다.

    동해전망대 쪽으로 걷다 보면 두 가지 물건이 눈길을 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풍력발전기. 옛부터 대관령 지역은 바람이 강하기로 유명한데, 최근 이곳에 풍력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시설이 대거 들어선 것이다. 곧이어 낯익은 영화포스터 한 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바로 한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현장 안내판이다.

    동해전망대 휴게소의 주메뉴는 라면이다. 지역이 지역인 만큼 라면도 삼양라면만 판다. 라면 한 그릇을 비우고 멀리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한눈에 베테랑 산꾼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건넨다. 필자가 백두대간 종주자라고 밝히자 앞으로 남아 있는 코스를 자세하게 일러준다. 그는 강원도의 산속 곳곳에 바위로 온돌을 만들어 놓고, 산이 그리워지면 들어가서 불을 때고 지낸다고 했다. 필자의 눈에 그는 산을 탄다기보다 산과 연애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동해전망대를 떠나 매봉(1173.4m)으로 가는 길목에는 ‘목초는 우유와 고기입니다’라고 쓰인 푯말이 자주 등장한다. 관계자에게 물으니 삼양목장으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좀더 실감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목초지로 들어가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목장길을 따라 그냥 걷기만 해도 흥에 겨울 노릇인데,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 목초를 밟고 젖소들의 휴식까지 방해하는 것일까.

    매봉부터는 오대산 국립공원지역이다. 큰 산에 들어서자 길도 달라졌다. 목장길은 끝나고 백두대간 특유의 굴곡이 시작됐다. 그러나 급경사가 없는 완만한 산책로라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소황병산(1328m)을 지나 40여분 걸어가자 노인봉산장이 보였다. 이곳에는 백두대간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운피 성량수 선생이 산다. 그는 누구보다 백두대간의 오염을 걱정하는 사람이다. 내년에는 ‘광복 60주년 백두대간 청소등반’을 계획하고 있다는데, 지리산 천왕봉부터 향로봉까지 65일간 쓰레기를 수거하면서 걷는 산행이다.

    필자는 오래 전 지인에게서 성량수씨에 대한 얘기를 듣고 노인봉산장에 이르면 한번 만나볼 참이었다. 필자가 도착했을 때 마침 성량수씨는 한가위를 맞아 고향으로 가기 전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먼저 성량수씨가 직접 담갔다는 곡주를 한잔 청해 마시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성량수씨도 두 잔 마시면 내려가기 힘들 거라며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는 오대산이야말로 휴전선 이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며, 필자에게 달밤에 벌거벗고 걷는 산행의 매력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이야. 언제 한번 벗고 걸어보시게.”

    노인봉산장에서 곧장 하산하면 오대산의 백미인 소금강 계곡이 나온다. 필자는 이곳을 둘러보지 못하고 대간 길을 재촉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자 성량수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사람아, 어찌 계곡을 내려가면서 보려고 하나. 계곡은 올라서면서 즐겨야 하고 능선은 내려가면서 살펴야 한다네. 세상 사람들은 그저 힘들다고 거꾸로 갈 줄만 알지.”



    한 수 단단하게 가르쳐준 청학산 노인봉(1338.1m)의 기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오늘의 목적인 진고개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강릉과 진부를 연결하는 진고개 위로는 6번 도로가 지난다. 이 길은 구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던 시절 우회하는 길이었지만, 최근 새 도로가 뚫리면서 오대산 등산객들의 쉼터로 변모했다. 진고개에서부터 오대산은 본격적인 세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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