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사유하는 지식인, 김우창을 읽는다

‘풍경과 마음’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

  • 글: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4-10-28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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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하는 지식인, 김우창을 읽는다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 문광훈 지음/ 삼인<br>‘풍경과 마음’ 김우창 지음/ 생각의 나무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사유의 유연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한국인은 더 이상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천박한 실용주의와 조급한 실적주의의 거센 물결이 사유의 비결정성과 추상성을 압도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진지한 사유를 버리고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보편과 중용을 버리고 극단과 과잉을 취했다. 사유를 폐기하고 화석화된 신념과 상투적인 지혜 및 피상적 정보에 더 의존하며 육체를 더 섬기고 욕망의 직접적인 충족을 우선적 가치로 삼는다. 또 사회의 공적인 주제들을 그저 되풀이되는 관념으로 여긴다.

    복합적 사유 실천하는 인문학자

    김우창은 사유하는 지식인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그는 문학 사회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복합적인 사유를 실천하는 종합적·대화적·적대적·다면체적 인문학자다. 김우창의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에 바탕을 둔 사유와 그가 제기한 우리 사회의 실천적 의제들은 충분히 음미할 만한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지식사회는 얼마나 궁핍했을까.

    ‘궁핍한 시대의 시인’과 ‘지상의 척도’를 시작으로 스무 해 넘게 김우창을 흠모하며 그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여전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 어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그가 일군 인문학의 도저(到底)한 형이상학적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필자의 천학(淺學) 탓일 테고, 아울러 그가 펼치는 복합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이론들과 끊임없이 근원의 사유로 회귀하면서 분비되는 의미의 과잉을 우리말 통사법이 다 담아내지 못하고 버석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드넓은 사유의 세계와 표현된 언어체계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 우리말 문장의 통사법이 그의 박학(博學)과 현학의 중력을 감당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이다. 통사법의 한계 때문에 그의 사유가 언어체계 안에 다 담기지 못하고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그렇다고 그의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풍경과 마음’은 최근 그의 관심과 사유가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문광훈이 쓴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을 ‘풍경과 마음’과 겹쳐 읽어도 좋다. 문광훈의 책은 김우창의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서이다. 문광훈은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바친다. 그는 김우창이 말하는 심미적인 것의 의미 범주를 이렇게 규정한다.

    “감각과 이성, 주체와 객체,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사물이 만나 어우러진 조화 혹은 일치의 상태를 뜻한다. 그것들이 어우러짐으로써 하나이되 이 모든 것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김우창은 심미적 이성을 유동적인 현실을 이성의 질서로 거둬들이는 하나의 원리로 규정한다. 왜 화가들은 풍경을 그리는 것일까? 화가들이 그린 풍경이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다. 3차원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를 2차원의 화면에 표현해내는 풍경화는 삶의 자리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 이를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고 여기에 우리가 지각하는 바를 새기고 그 의미를 읽어내려는 의지와 관계된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 공간을 사유를 통해 이해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초월은 모든 진지한 예술의 발생론적 계기와 욕망의 중요한 부분이다.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는 ‘여기’에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자가 아니었던가. 김우창은 이렇게 쓴다.

    “예술의 초월에 대한 관심의 동기는 대체로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저 세상의 체험까지를 원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우창은 멀고 가까이 있는 산과 하늘을 그리는 풍경화에 개입된 화가의 욕망과 동기를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실재는 일정한 방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서양의 풍경화는 원근법과 음영의 기법을 개발했다. 동양 화법의 전통은 선을 중시하고, 서양 화법의 전통은 사물의 표면에 있는 질감을 중시한다. 이런 기법으로 객관적 풍경의 세부를 실감나게 재현한다.

    하지만 동양의 산수화는 땅에 대한 심미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체험과 이를 통한 심리적 현실화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동서양 화법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런 차이는 기법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문화사적 맥락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서양화가 풍경의 세부, 구체의 과학을 중시하면서 사실적 재현에 공을 들인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의 전체, 직관과 기운으로 파악한 이상향에 대한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풍경을 전달하려고 할 뿐 삶의 자리인 현실 공간의 세부 묘사는 끼어들지 않는다.

    산수화는 땅과 풍경에 대한 감각적 체험이 바탕을 이루지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좁은 공간에 대한 감각적인 체험을 넘어서서 번잡하고 속되며 잘게 쪼개진 일상 세계를 포괄하는 세계의 전체상, 넓고 탁 트인 공간의 체험, 부분적인 지각과 전체적인 의식을 통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초월적 암시 등을 담아낸다. 김우창은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 동물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영토적 본능(territorial imperative)’에 관계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現世) 안에 형이상학적 토대를 원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능에 관계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쉽게 철학적·형이상학적·신비적·종교적 또는 정신주의적인 관점으로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념적 요소 품은 산수화

    정선(鄭?)의 ‘금강전도(金剛全圖)’는 한국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 그림은 풍경이나 세계를 하나의 시점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서양화가의 공간 이해와는 사뭇 다르다. ‘금강전도’는 하나의 고정된 관점이 아니라 다원적 시점, 혹은 움직이는 시점을 통해 보고 이해한 풍경이다. 정선은 일만이천이나 되는 금강산의 웅장하고 복잡하게 펼쳐지는 봉우리와 기암괴석의 도형학적 세목(細目)들을 사실적으로 모사(模寫)하기보다는 그것과 마주친 뒤 느꼈을 감각적 충격과 법열감, 지적인 현기증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금강전도’를 그렸을 것이다. 이는 동양 산수화가들이 지켜온 오랜 관습이자 전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전도’는 풍경의 사실성보다는 관념적이며 정신적인 이해의 측면을 표현하는 데 더욱 공을 들였을 것이다. 김우창은 이렇게 쓴다.

    “‘금강전도’는 한편으로 풍경의 생활체험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활체험 자체가 관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관념적 요소란 산의 지형에 대한 지리학적 이해와 그것의 밑에 놓여 있는 공간 이해(기하학적 의미에서건 또는 내용적인 의미에서건 이상화된 공간 이해)를 포함한다. 이러한 요소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풍경에 대한 경험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금강전도’는 규칙적 구성의 서양 풍경화보다도 실체험에 가까운 그림이 될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감각적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김우창은 이렇게 말한다.

    “한 예술작품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구체적인 것을 통해서 그에 관련되어 있는 다른 사물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또 한 시대의 힘과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또 하나의 인공 구조물은 그 환경에 어울리고 또 그 시대의 삶을 표현함으로써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자연의 한 조각도 그것이 사람이 사는 환경의 일부가 되었을 때, 사람이 자연에 대하여 갖는 어떤 태도, 한 시대가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비춤으로 하여, 아름다운 것이 된다(‘시인의 보석’, 민음사, 1993).”



    필자는 정선의 ‘금강전도’를 천천히, 오래 들여다본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은 마치 땅에서 솟아오른 불꽃 같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이 산수화는 관념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정선의 금강산은 지리학적으로 파악된 산의 지형지물, 그 지리학을 내면에서 떠받치는 심리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이해, 땅에 대한 철학과 신화를 뒤섞어 체계화한 풍수지리의 관념이 빚은 산이다.

    정선의 금강산은 그 물리적 구체를 벗어나 민족의 신령스러운 영산(靈山)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창조된 풍경, 즉 ‘미화되고 신화화된 지도’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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