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단아하게, 때론 고고하게… 일본 최후의 大木이 복원한 세계 최고(最古) 명찰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5-03-23 18: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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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웅장한 느낌을 주는 금당의 외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告)의 목조건물이다.

    “아스카(飛鳥) 건축의 실체를 오늘에까지 전해주는 호류지(法隆寺)의 건축 기법은 중국이 아닌 한반도에서 배운 것입니다.”

    ‘일본 최후의 궁대공(宮大工)’이라 불리는 니시오카 스네카스(西岡常一·1908∼95)옹은 이렇게 말했다. ‘궁대공’이란 민가는 짓지 않고 오직 절이나 신사만을 짓는 일본 대목(大木)을 일컫는 말이다.

    스네카스옹은 호류지와 나라(奈良)의 야쿠시지(藥師寺)를 복원한 인물로 평생을 목수로 살았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몇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필자는 그 중에서 말년에 회고록 형식으로 쓴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을 읽고 호류지 앞 서리(西里)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필자가 그 책을 산 것은 호류지를 처음 찾은 1993년이었고, 그를 만난 것은 1995년 3월 두 번째 호류지 방문길에서였다.

    호류지가 자리잡은 곳은 이카루카(斑鳩)라는 이름의 아주 한적한 마을이다. 일본의 역사 도시 나라 역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호류지 오층탑(일본에선 ‘오중탑’이라 부른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회랑을 한바퀴 돌아 중문(中門)을 통해 탑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호류지 오층탑은 전체적으로 볼 때 부여 정림사 오층 석탑을 빼닮았다. 정림사 탑이 비록 석탑이기는 하나 그 모델은 어디까지나 목탑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네카스옹도 호류지의 건축 기법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했고, 아스카와 나라시대 사람들이 백제로부터 문화를 배웠으니 전혀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35m 높이의 탑(기단 위 31.5m)은 다섯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층을 만드는 처마는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가 줄어드는데, 그 비율이 10:9:8:7:6이라고 한다. 바닥은 겨우 12.5평이다. 그래서 탑은 매우 날렵해 보인다.

    각 층의 처마 아래에는 여러 종류의 사귀(邪鬼)들이 특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쪼그려앉은 원숭이가 혀를 내보이며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은 정말 볼 만하다. 하지만 그 원숭이조차 첨차(서까래를 받치기 위한 꾸밈새)를 받들고 있어 실제 기능을 가진 구조재의 하나다.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 오층탑에서 단순히 꾸미기 위해 설치한 것은 하나도 찾기 어렵다. 나라(國)를 처음 세울 때라 군더더기를 철저히 배제한 모양이다.

    탑은 부처의 사리, 즉 유골을 모신 곳으로 그 1층에는 소상(塑像)이 조각돼 있다. 동서남북 네 면을 장식하고 있는 소상은 각기 다른 모습을 담고 있다. 동면에는 유마 거사와 문수보살의 문답 장면이, 서면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는 모습이, 남면에는 미륵보살의 설법 장면이, 북면에는 부처님의 입멸(열반) 장면이 담겨 있다.

    오층탑 뒤로 2층 구조의 금당(金堂)이 있다. 금당이란 본존불을 모신 성스런 곳이니 곧 대웅전을 말한다. 금당은 비가 많은 일본의 전형적인 사찰 형식인 긴 처마에 가파른 물매를 갖추고 있다. 다만 기둥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가운데가 불룩한 이른바 배흘림 기법으로 처리해 무척이나 단아한 느낌을 준다. 그 아래 조각된 용의 형상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목조건축물이 갖는 경쾌함과 종교건축물의 장중함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눈길을 끈다.

    세계 最古 목조 건축물

    오층탑과 금당은 대강당과 종루·회랑·중문·경장(經藏) 등이 둘러선 사각 마당의 중심에 있다. 나라시대에 세워진 대강당은 법회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탑과 당을 감싸안은 자세라 너그럽게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의 건축물이 대부분 국보라는 사실이다. 일본 국보의 10분의 1이 이 호류지에 집중돼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탑과 금당이 1대 1의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가람인 고구려의 청암리 절(6세기)은 ‘1탑 3금당식’, 즉 탑 하나에 금당이 셋인 구조다. 그러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의 미륵사와 정림사, 신라의 분황사에서 보듯 ‘1탑 1금당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탑과 금당과의 이 같은 경쟁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금당이 곧 가람의 중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탑은 금당을 좌우에서 수호하는 형상으로 세워졌다. 그것이 9세기말 세워진 감은사에 나타난 이른바 ‘쌍탑 1금당식’이다. 이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좌우로 거느린 불국사에서 절정을 이뤘고, 우리나라 가람의 기본구조로 정착됐다.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위로 올라갈수록 층의 넓이가 줄어드는 오층탑.<br>오층탑의 처마 부분. 첨차와 사귀들로 가득하다(內).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초의 가람인 아스카데라(飛鳥寺·6세기 말)는 1탑 3금당식이고, 7세기에 세워진 시텐노지(四天王寺·7세기초)와 호류지(7세기 중엽), 야쿠시지 등은 1탑 1금당식이다. 호류지는 1탑 1금당식이라 대강당이 탑과 금당을 감싸안은 구조이지만 쌍탑 1금당식인 불국사의 경우엔 대강당 자리에 대웅전이 들어서 있다. 이에 따라 대강당은 뒤로 밀려났다.

    호류지가 창건된 때(607년)는 일본 역사에 말하는 아스카시대(593~710년)다. 창건자는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쇼토쿠(聖德·574∼622) 태자로 알려져 있다. 원래의 가람이 얼마 안 돼 불타버리자 다시 재건(창건했다는 설도 있다)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가 8세기 초(710년)이므로 호류지는 1300살의 나이를 먹은 셈이다. 이런 이유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93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쇼토쿠 태자는 요메이(用明) 왕의 둘째아들로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대신 섭정으로 큰어머니 스이코(推古) 여왕을 도왔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권력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 왕가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불교가 보급되고 한반도로부터 고승, 학자, 기술자 등이 대거 도래하자 일본의 학문과 예술, 기술 수준은 몰라보게 향상된 반면 그때까지 ‘천황제’를 떠받들어주던 신토(神道)사상은 크게 위축됐다. 당시 일본에선 소가(蘇我)씨와 모노노베(物部)씨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가씨는 진보적 성향이었으나 모노노베씨는 씨족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파였으므로 양측은 대내외 정책에서 사사건건 충돌하고 대립했다.

    이 둘은 불교 수용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취했다. 소가씨는 숭불파(崇佛派)였고, 모노노베씨는 배불파(排佛派)였다. 요메이 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나 이미 병든 몸이라 극락왕생에 마음이 가 있었고 그의 집안 여자들도 소가 사람들이라 일찍부터 불교를 믿었다. 병약한 요메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 틈을 타 모노노베 측이 소가를 공격했다. 하지만 승리는 엉뚱하게도 도래인 세력과 손을 잡은 소가 측으로 돌아갔다.

    요메이의 뒤를 이은 스순(崇峻) 왕은 소가 측 인물이다. 그러나 스순은 소가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반불파(反佛派)로 돌아섰다. 불교를 인정하면 ‘천황제’를 버텨주는 신토사상이 위협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힘있는 자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오래 못 가 소가 측이 보낸 자객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소가 측의 우두머리인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자 3대째 내리 대비 신세로 지내던 스이코가 왕위에 올랐다. 쇼토쿠 태자가 정치 일선에 나선 것은 바로 그때다.

    神·佛·儒 습합사상과 和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직접 받아들였기에 누구보다도 불교에 정통했다. 그는 일찍이 소가의 승리를 기념해서 오사카에 국립사찰인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세웠다. 국립사찰이란 국가의 안위와 번성을 위해 복을 비는 사찰로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번성을 위해 짓는 절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토나 유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품어 안으려 했다.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린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불유(神佛儒) 습합사상’이란 특이한 사상이 탄생했다. 신불유를 받아들이되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이를 적절히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화(和)’다.

    그가 ‘헌법 17조’(604년)를 제정한 것은 위기에 처한 ‘천황제’를 굳건히 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 ‘화’를 내세웠다.

    그보다 한 해 전인 603년, 그가 ‘관위 12계’를 제정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세력가의 가문에서만 뽑지 않고 일정한 시험을 쳐서 임용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크게 넓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고대 일본을 이른바 ‘율령국가’ 체제로 나아가게 했다. 율령제란 법률에 의한 국가통치 방식으로, 여기서 ‘율’은 형벌체계를, ‘영’은 정치조직을 말한다.

    헌법 제2조에 삼보 숭배를 의무화했다. 여기서 삼보란 불·법·승이니 불교와 다름없다. 이리하여 불교가 신생 일본의 국교가 된 것이다. 그는 외교에도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당시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수나라 황제에게 사절(‘견수사’라 부른다)을 보내 일본의 존재를 분명히 알리고 또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열성을 보였다. 당시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자신의 나라를 ‘해가 뜨는 나라’도 표현했는데, 그게 지금의 일본이란 국명이 됐다.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태자의 실물 크기로 조각한 구세관음상을 모신 몽전.

    호류지가 서 있는 곳은 지금도 여전히 한촌(閑村)이다. 태자는 왜 선왕을 위한 절을 왕도가 아닌 이런 한촌에다 지었을까. 아직까지 그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유추해볼 수는 있다. 하나는 이곳을 새로운 정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학자 스타일에 명상까지 즐겼던 태자라 현세적 권력의지가 부족해서 공동 통치자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는 왕도인 아스카나 나라보다는 한적한 이카루카가 더 적지였을 것이다.

    정작 필자의 궁금증을 자극한 것은 따로 있다. 목조건물인데도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버텨왔고, 아직도 늠름한 이유 말이다. 스네카스옹은 먼저 습기에 강한 ‘히노키(檜)’를 목재로 사용한 점을 이유로 들었다. 노송나무의 일종인 히노키는 대륙에서는 볼 수 없고 오직 일본과 대만에서만 자라는 수종이며, 곧게 또 오래 자라는 게 특징이라는 것.

    1300년 세월을 버티게 한 비밀

    스네카스옹은 “히노키는 오래 자라는 만큼 수명도 길어 천년을 자란 히노키는 천년을 버틴다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는 절이나 신사 등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히노키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호류지에 쓰인 히노키는 수령이 2000년쯤 된다며 화재와 같은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 700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두 번째 이유로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구조의 강건함을 들었다. 호류지의 힘은 바로 그 강건함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 이유로 연(軟) 구조를 지적했다. 못으로 꽉 고정한다든지 볼트로 죄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혹 지진이 일어나 흔들린다 해도 그 요동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얼마간의 틈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궁대공 집안에서 태어나 동량(棟樑) 수련을 거쳐 궁대공이 된 스네카스옹은 공업학교가 아니라 농업학교를 다녔다. 그것도 3년제 학교였다. “제도권 교육을 더 받다 보면 가방이나 들고 다니는 월급쟁이가 되고 싶어진다. 그래서는 호류지의 목수 노릇을 못한다”는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그는 속으로 ‘할아버지는 이상한 억지를 부리는 어른이셔. 목수가 될 내가 무엇 때문에 거름통을 져야 한담’ 하고 납득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이해한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나무 또한 흙에서 자라 흙으로 돌아간다. 건물 역시 땅 위에 세우는 것이니 흙을 잊어버리면 사람이고 나무고 탑이고 있을 수 없다. 흙의 고마움을 모르고서는 인간도, 훌륭한 목수도 될 수 없다.’

    그는 “농업학교를 다니면서 씨를 뿌리면 싹이 돋고 거름을 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생명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이런 식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면서 “농업학교에 들어가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 글을 읽고 반한 필자는 그가 이미 여든 중반의 나이라는 것을 알고는 생전에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1995년 3월초, 그를 찾아 일본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며느리가 맞아줬는데 스네카스옹은 병환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제자인 오카와(小川三夫)씨를 불렀다. 그렇지만 얼마 있지 않아 옹은 필자의 편지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응접실로 나와 필자를 만나줬다.

    “한국은 일본의 스승”

    그의 집은 작았다. 가구도 별로 볼 만한 게 없었다. 궁대공이라는 게 돈 되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입에 하얀 마스크를 하고는 이따금 기침을 했으나 말은 조리가 있었고 발음도 또렷했다. 특히 호류지의 건축양식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면서 “한국은 일본의 스승”이라고 말할 때에는 강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일본 건축의 원류가 한반도이기 때문에 한국 고대 건축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한국 건축, 나아가 대륙 건축과 일본 건축의 차이를 설명해줬다. 바로 그의 일본 건축론이었다.

    “대륙의 건축은 처마가 짧아서, 중국의 절 같은 것을 보면 건물의 규모는 크지만 도리 밖으로 내민 지붕의 길이는 짧습니다. 그러나 호류지는 건물은 작지만 도리 밖으로 내민 지붕 부분이 아주 큽니다. 고대 일본인이 대륙으로부터 건축 기법을 막 배웠을 때에는 아마 처마를 짧게 지었을 겁니다. 그러던 것이 습기가 많은 일본의 풍토를 고려하다 보니 처마를 길게 만드는 지혜를 짜내어 호류지에서 볼 수 있듯이 처마가 긴 건축물로 발전한 것이죠.”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고구려 출신의 화가 담징이 금당 벽면에 그린 ‘사방정토도’의 한 장면.

    그는 그로부터 두 달도 안 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에서 강조한 게 구전의 가르침인데, 그가 떠남으로써 일본의 궁대공들은 구전의 큰 스승을 잃은 셈이다. 구전이란 지식만이 아니라 기술과 함께 인간의 존재방식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여주어 아이가 스스로 배우도록 하는 것처럼.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텍스트보다 스승과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의 호흡과 손질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텍스트를 통하면 정신과 원칙을 배우기보다는 요령이나 기교만 배우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이다.

    “머릿속의 지식으로 건물을 세울 수는 없다. 자신의 손으로 나무를 자르고 깎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머릿속의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는 목수들 사이에 전하고 있는 구전 몇 개와 그 속에서 배운 계명을 알려줬다. 그 첫째 계명은 이런 것이다.

    ‘나무를 사지 말고 산을 사라. 나무를 짜 맞출 적에는 치수로 짜지 말고 나무의 버릇을 보고 짜라.’

    그 본뜻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에서 자란 나무는 건물의 남쪽에, 북쪽에서 자란 나무는 북쪽에 쓴다. 서쪽에서 자란 마는 서쪽에, 동쪽에서 자란 것은 동쪽에 쓴다. 그러니 나무를 사지 말고 산을 사서, 그 산에 있는 나무가 자란 방향 그대로 옮겨오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호류지에 훌륭하게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남쪽에서 자란 나무는 해가 잘 들어서 가지가 많이 뻗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재목으로 켜면 남쪽에 옹이가 많이 나온다. 호류지의 남쪽 기둥이 바로 그러하다. 그것은 나무가 자란 방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기둥은 옹이가 있는 편이 강하다. 골짜기에서 자란 나무는 곧기는 하나 약하다. 골짜기, 다시 말해서 주위에 둘러싸여 자란 나무는 인간에 비유하자면 부모를 비롯해 돌보는 손길이 많은 집안에서 자란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정직하고 곧아서 좋을지는 몰라도 힘은 약하다. 나무도 마찬가지로 고생하면서 제 구실을 하며 자란 것이 아니면 약하다. 비바람과 태풍을 견뎌내고 자란 나무가 강한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이라는 것은 약한 나무나 강한 나무나 할 것 없이 한데 몰아서 그저 곧고 네모나게만 제재해서 쓴다.

    그러나 아스카시대 사람들은 휜 것은 휜 대로, 틀어진 것은 틀어진 대로 특성을 살려서 법당을 지었다. 오른쪽으로 틀어진 나무와 왼쪽으로 틀어진 나무를 짜 맞추면 부재(部材)가 서로 맞물려 튼튼한 건축물이 된다. 다시 말하면, 타고난 나무의 성질과 특성을 살리는 것이다.”

    금당이란 불당을 말한다. 금박을 입힌 불상을 모셔놓은 곳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지금 남아 있는 금당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쇼토쿠 태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내부로 들어갈 순 없으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볼 수는 있다. 거기에는 세 개의 커다란 금동 불상이 모셔져 있고, 네 벽에는 채색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고구려의 화가 담징(曇徵)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방정토도’란 이름의 벽화는 석가정토도, 보살반가상, 관음보살상, 세지보살상, 보살반가상, 아미타정토도, 성 관음보살상, 문수보살상, 미륵정토도, 약사정토도, 보현보살도, 십일면 관음보살상 등 모두 12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바, 즉 세상의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름만으로 본다면 석굴암의 원형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浮彫)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이 대승불교를 지향하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담징의 벽화에 대해선 일본인들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송한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호류지 금당 벽화는 일본 회화 사상 가장 귀중한 것일 뿐 아니라 세계문화사에서도 또렷이 빛나는 작품이다. 이 벽화로 일본 회화는 세계 문화에 선명하고도, 확실한 발자취를 남기게 됐다.”

    그런데도 그들은 화가의 출신국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1888년 화가가 담징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스스로 밝혀놓고서도.

    필자를 슬프게 하는 것은 담징이 그린 원화가 해체수리 작업을 하던 1949년 정월, 그만 화재로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래의 것을 본떠 재현한 것이다.

    담징의 벽화 중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비천도를 보면 두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옷소매와 얼굴 표정이 참으로 신비롭다. 그 벽화 앞에 서면 어떤 법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비천도의 모티프는 돈황(敦煌) 막고굴의 벽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으로 형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걸 전해준 자가 누구인지는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청년 쇼토쿠 태자의 좌상.

    법단 앞으로는 금동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금당에서 ‘당’이란 본존불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니 대단할 수밖에 없는데, 석가여래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는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이 협시(脇侍)하고 있다.

    화염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광배(불상 뒤에서 둥글게 빛나는 빛)를 두르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쇼토쿠 태자를 기려 만든 것이고, 산형(山形)의 보관(寶冠)을 쓴 약사여래상은 병마와 싸우다 요절한 요메이왕을, 아미타여래상은 태자의 모후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존불의 옷소매와 물병, 손짓 하나 하나는 생기를 발하고, 길게 늘어진 옷의 주름이 매혹적인 이들 불상 또한 백제 출신 장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삼존불의 광배 뒷면에 ‘지난해(622년) 세상을 떠난 쇼토쿠 태자를 기려 안작지리로 하여금 제작토록 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의 혼이 담겨 있는 금당을 지나 거대한 백제관음을 모신 백제관음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제관음은 오랫동안 대보장전에 안치되어 있다가 1998년 가을 인근에 새 둥지를 마련해 이전했다(백제관음당은 세 번째 방문 길에 보았다).

    눈은 인자하고 얼굴엔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고졸(古拙)한 미소가 흐른다. 1.8m의 후리후리한 키는 아름다운 선으로 감겨 있다. 오른손은 직각으로 굽혀 손바닥을 폈고 왼손은 축 늘어뜨려 엄지손가락과 가운뎃 손가락으로 가볍게 물병을 쥐고 있는 상태다.

    머리에는 나뭇가지를 주렁주렁 매단 보관이 올려져 있고 상반신은 거의 나체다. 오른쪽 어깨에서 넘어온 옷자락 끝이 몸 앞을 가로질러서 그대로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아래로 내리뻗은 천의(天衣)는 속살이 비치는 여자의 잠옷같다. 5각의 대좌를 딛고 서 있는 발은 자연스럽게 직립하고 있다. 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8각이나 6각이 아닌 5각이다.

    어깨에서 다리까지 거의 변화 없는 폭으로 후리후리하게 서 있는 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운데, 힘있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의 갸름한 몸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미인의 몸매를 일컬어 흔히 8등신이라고 하는데 백제관음이 바로 그랬다. 옆모습을 보면 고개는 앞으로 약간 떨군 상태이고 배는 살짝 나왔다. 배 아래쪽으로는 물병이 매달려 있다. 모르긴 해도 물병의 물은 한없이 청아할 것이다.

    백제관음은 이처럼 고고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순간 꿈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꿈이 현실이 아니듯이 백제관음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보다는 어렴풋이 그리워하던 그 무엇이 되어 다가왔다. 백제관음의 우측에는 세지보살이, 좌측에는 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세지는 지혜를, 관음은 자비를 각각 상징한다.

    백제관음상을 조각한 장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백제인일 거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백제관음이란 말 자체가 백제에서 왔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 데다 그 선묘가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의 정점

    일본인들은 그들 스스로 ‘구다라간농’, 즉 백제관음이라 하면서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속이 좁은 그들이라 자신의 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내놓으면서도 손바닥으로 그걸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가엾은 사람들이다. 백제왕국은 1400여년 전 사라졌지만 지금 아직도 이렇게 일본 땅에 살아 있다.

    서원과 함께 호류지를 양분하는 동원(東院)에는 고구려 시대의 창고인 부경을 닮은 종루와 사각의 회랑, 태자를 기리는 몽전(夢殿), 전법당과 본당, 그리고 태자의 모후를 모신 추쿠지(中宮寺)가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백미는 태자가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을 보았다는 그 자리에 세운(739년) 몽전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여덟 개의 잎사귀를 가진 연꽃 형상을 하고 있다. 팔각구조의 단층 건물 내부에는 청년 쇼토쿠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조각한 구세관음상을 모셔놓았다. 녹나무를 다듬어 만든 다음 겉에 금박을 입힌 구세관음상은 위용이 대단하다. 특히 광배는 무척이나 크고 둥근데, 거기다 화염에 싸여 펄펄 타오르는 모습이 정말 일품이다.

    백제관음과 여러 면에서 닮은 것을 보면 이 또한 백제 장인의 솜씨로 빚어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미국의 동양미술사 전문가인 페놀로자는 이를 보고 ‘한국 미술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호류지는 이처럼 철저히 쇼토쿠 태자 일색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들의 꿈과 피와 혼이 서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점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최근 다시 문제가 되고 있는 독도 문제 해결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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