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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순환의 고리 계절의 틈바구니

순환의 고리 계절의 틈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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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작업실이 보리수 밑인 양 나는 단꿈을 꾸었다. 꿈에 취해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기도 하고, 혼자 웃기도 하고,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그 인생 역정에 가슴 쓰라려 하다 몸이 아프기도 했다. 특히 방학이 시작되자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헐떡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작업실 문을 닫고 나면 그때부터는 온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이 눈앞에 펼쳐져 나를 사로잡았다.

언젠가 강연이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자 “작가가 되어서 좋은 점이 뭐냐”고 누군가 물었다. 나는 “나 아닌 다른 이의 인생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게 즐겁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자잘한 일상은 갖은 볼일과 인간관계 유지라는 핑계로 다른 인생에 몰입하려는 나를 수시로 방해했다.

그러나 지난 겨울 그 작업실에 들어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경우가 생기면 전철역 부근의 커피숍을 이용했다. 작업실 속의 인생은 온전히 또 다른 삶으로 나를 도취케 하였다.

대학 시절, 몹시 멀리 달아나버려 이젠 꼬랑지밖에는 시야에 보이지 않는 멀고 먼 계절처럼 느껴진다. 나는 노상 보들레르의 시구를 입에 달고 살았다. ‘… 취하여라. 술에건, 일에건, 예술에건…’

보들레르에 의하면 그러지 않으면서 살아내기에 인생은 너무 따분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그 말 때문에 내 평생의 직업이 결정됐는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대신 온전하게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



이제 나는 계절과 계절의 틈바구니에 서 있다. 물리적으로는 겨울과 봄 사이에 서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일과 일 사이에 서 있는 셈이다.

순환의 고리. 이런 틈바구니들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보통 이럴 때면 여행을 떠나거나, 서점에 가서 갖가지 분야의 책을 잔뜩 사들여 읽어대거나, 하루 세 편씩 영화를 봐치우거나 하면서 틈을 메운다는 느낌으로 생활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그렇게 하질 못하고 있다.

깊은 우울. 겨우내 다른 인생에 사로잡혔던 강도에 반비례하듯 우울증의 우물은 깊고도 깊다. 돌멩이를 던져 넣어도 그게 바닥에 가 닿는 소리가 단념하고 뒤돌아설 즈음에야 들릴 정도로 깊은 심연이다. 그 속에서 온갖 종류의 실패와 낙담과 절망을 만난다. 밤을 새운 뒤 잠이 찾아와주지 않는 희끄무레한 새벽이면 늘 그러하듯이.



깊이 한숨쉰다. 순환의 고리. 사람들이 봄에, 새벽에 자살을 많이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 하루와 하루 사이, 새로 시작되는 순환을 낙엽이 아닌 새 잎이 되어 맞이할 용기를 어디서 찾아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도움의 손길 같은 것은 없다. 새로운 시간이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매우 엄정한 것이다… 기도는 질주하고 송가는 울려퍼진다…’(랭보)

신동아 200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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