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과오는 잊고 피해만 기억하는 부끄러운 ‘부(負)의 유산’

  •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5-04-25 1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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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될 과거의 잘못을 상징하는 유산이 바로 ‘부(負)의 유산’이다.
    • 히로시마 원폭 돔이 그 중 하나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전쟁과 원폭의 참상을 전하는 상징물.
    • 하지만 일본은 원폭의 피해만 강조하고 있다. 그게 바로 일본의 한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중심 건물인 옛 산업장려관. 원폭 투하로 파괴됐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

    4월5일 공개된 일본 후소샤(扶桑社)의 공민 교과서 검정 통과본에 실린 내용이다. 한일 양국 정부가 종전 60주년, 한일협정 체결 40주년을 맞아 ‘한일 우정의 해’로 정한 올해, 시마네현 의회는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일본 정부는 역사 왜곡으로 논란을 일으킨 역사교과서를 더욱 개악해 통과시켰다.

    한국은 물론 중국까지 분노케 한 일본의 행태는 기회주의적인 일본인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동안 일본은 자국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나 상대국이 우호적으로 나오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국의 뜻을 교묘하게 관철시켜왔다.

    그 대표적 사례가 히로시마(廣島) 원폭 돔을 평화공원으로 둔갑시켜 1996년 세계문화유산 리스트에 올린 일이다.

    원폭 돔은 옛 산업장려관 건물로, 히로시마 시 중심에 있는데 지금은 평화기념공원의 중심부를 이룬다. 이곳에선 매일 오전 8시15분이 되면 ‘평화(?)의 멜로디’가 울려퍼진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상공 5800m 지점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바로 그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다.



    원폭 돔 주위에는 “부디 편히 잠드소서. 실수는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요”라는 글귀와 함께 희생자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힌 희생자 위령비와 피폭 어린이 상(像)이 서 있고, 평화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또 원폭 자료관에는 열선이 타거나 녹아내린 인골 3000~4000점과 자전거 등이 전시돼 전쟁의 비극과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본 정부가 이 평화공원을 세계유산으로 등록시키기 위해 내세운 이유는 ‘원폭 투하의 역사적 사실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된 핵무기의 참화를 세계인에게 알리는 동시에 이곳이 핵무기의 폐기와 세계 평화를 희구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96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를 놓고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중국 대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행위로 인해 수많은 아시아인이 희생된 점을 들어 원폭 돔의 세계유산 지정은 세계평화와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 대표는 “일본이 오랜 우방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으나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게 된 이유는 많은 이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전쟁을 하루빨리 종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중국과 미국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공원은 독일 나치스가 수백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던 폴란드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처럼 ‘부(負)의 유산’으로 지정됐다.

    ‘부의 유산’이란 인류가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보존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적극적인 문화유산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일본은 평화공원을 교묘히 악용하고 있다. 일본에 의해 학살당하고 고통받은 피해자들이나 원폭이 투하될 수밖에 없던 당시 상황은 무시한 채,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라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더욱이 자신들의 잘못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이는 유네스코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의도와도 거리가 멀다. 평화공원이 결코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화공원이 진정한 문화유산이 되려면 일본은 원죄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기정화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의 자세는 어떤가. 오히려 자신들의 침략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려 한다. 이는 분명 평화를 위협하는 처사다.

    독일의 진정한 과거사 참회

    대표적인 부의 유산인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대한 독일의 태도는 일본과 천양지차다. 350만명의 유대인이 사망한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직후에 부르던 이름이다. 원래 지명은 오수비엥침. 폴란드는 전후 이곳을 되찾자마자 오수비엥침으로 지명을 원상 회복시켰다.

    폴란드는 나치 독일의 잔학상을 차마 되살리고 싶지 않았지만 “잊어서도, 잊혀서도 안 되고 결코 되풀이돼서도 안 된다”며 1947년 7월2일 강제수용소 현장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영구 보존키로 결의했다.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평화공원 외곽에 서 있는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2차대전은 지구상에서 치러진 그 어떤 전쟁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하게 짓밟은 전쟁이었다. 가스실과 생체실험실, 군대 위안부 등이 동원됐다. 전후 전승국 중심으로 창설된 유엔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고 또 이를 보장하기 위해 세계 인권선언(1947)과 집단 살해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1948) 등을 만들었다. 인간의 역사란 희생 위에 세워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독일(옛 서독)은 나치의 죄를 속죄한다며 전범자 1만3000여 명을 처벌했다. 독일은 이어 1962년 이스라엘과 배상협정을 맺고 250억마르크를 지불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150억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독일이 지금까지 이스라엘 정부 및 피해자, 유가족 등에게 배상한 금액은 무려 2000억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은 2001년 5월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과 나치 강제노역 피해자 배상에 관한 협상도 마무리지었다. 나치 청산에 대한 독일의 이러한 태도는 초·중·고교의 교과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독일은 전후 역사교과서를 편찬할 때 폴란드, 프랑스 등 이웃나라들과 협의를 거치는 등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오해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도자들도 무릎을 꿇고 참회했다. 1970년 12월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한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게토의 유대인 추모비 앞 차가운 대리석 제단 위에서 2차대전 당시 독일이 행한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했다.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않은 그의 얼굴은 엄숙하다 못해 ‘데드 마스크’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진실한 사죄의 메시지를 피해자들에게 전한 것이다. 그날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와 국교정상화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바르샤바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의 이름은 두 민족을 오랫동안 따라다닐 것이며, 생지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미래의 과업을 결연히 떠맡을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현실 앞에서의 도피는 위험한 환상을 자아낸다. 이 조약과 화해 그리고 평화에 대한 긍정은 독일인의 전체 역사에 대한 회개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우리는 시선을 미래로 돌리고 도덕을 정치적 힘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의의 사슬을 끊어버려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포기 정책이 아니라 이성의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반(反)나치주의자 빌리 브란트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후 40주년이 된 1985년 5월8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당시 독일 대통령은 연방의회에서 “과거 독일이 저지른 만행과 치부를 민족의 이름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천명했다.

    독일은 종전 60주년을 맞는 올해 5월 베를린에서 홀로코스트 기념물 제막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60년 전 나치가 저지른 죄악과 과거사를 끊임없이 참회하고 속죄하려는 독일의 노력에는 마침표가 없다.

    일본이 무책임한 까닭은?

    그런데 일본은 사죄라는 말을 모르는 민족 같다. 보수우익의 대변자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2001년 자신이 펴낸 ‘국민의 역사’라는 책에서 “일본은 문명국이다”라고 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과연 ‘문명국’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기억할 줄 아는 존재다. 기억할 수 있기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고 문명이라는 것도 이룩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기껏해야 하등인간 정도다.

    2000년 말 독일 정부는 기업과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망각하려는 것은 유랑을 연장시키고, 기억이야말로 구원의 열쇠다”라고 말한 동유럽의 유대운동가 발 셈 토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니시오 간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파병(간지는 침략한 사실을 덮어두고 ‘파병’이라고 부른다)’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아메리카 대륙 경영에 필적하는 웅대한 ‘세계국가 구상’에서 나온 행위이며, 일본 근대의식의 자기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이므로 ‘역사에 도덕을 개입시키지 말 것’을 주문한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부터 조선과 중국을 구하기 위해 일본이 용기를 갖고 싸운 자위전쟁이었고, 한국병합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최선의 조치로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일본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라는 논리를 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일본의 신사나 신궁에는 신상이 없다. 그 자리에 흰색 천을 드리워 사람들은 그걸 보고 예배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왜 이토록 무책임한 걸까. 그리고 사물이나 사안의 본질을 왜 이렇듯 애써 외면하려는 걸까. 혹시 그 주된 원인이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천황제’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황제는 신화에서 출발한다. 천황은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제다. 그리고 호족이나 막부의 쇼군(將軍)은 백성을 다스리는 행위를 천황에게 봉사한다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실제적 최고 권력자인 쇼군은 천황의 신하로서만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에 스스로 천황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천황에게는 성(姓)이 없다. 그래서 호적도 없고 선거권도 없다. 원래 성은 남과 구별할 필요가 있어 생겨난 것인데, 천황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그건 그동안 한 가문이 독점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천황은 아키히토(明仁)란 이름만 갖고 있으며, 1989년에 사망한 쇼와 천황은 히로히토(裕仁), 메이지유신을 통해 왕정을 되살린 메이지의 이름은 마쓰히토(睦仁)였다.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 두 글자가 되고 공교롭게 모두 ‘히토’로 끝난다. 이는 11세기 중엽 70대 고레이제이(後冷泉) 천황 이후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줄곧 이어진 전통이다.

    일본에서 한 가문이 왕위를 독점할 수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바다로 둘러싸여 타국이나 타민족의 침공을 받은 적이 없어 이렇다할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 꼽힌다. 둘째는 내부 세력으로부터도 심한 견제를 받지 않아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같은 변혁 또한 겪은 바 없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천황은 종교적 권위만 갖고 있어 실질적 지배자인 쇼군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세속의 흥망성쇠로부터 초연할 수 있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역성혁명은 중국 역사의 안전판

    통치권의 원천은 명분이다. 이를 흔히 정통성이라 부른다. 사마천(史馬遷)은 중국 역사의 출발점을 삼황오제에서 찾았다. 삼황오제 시대란 기록으로 뒷받침되는 역사적 시대가 아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의 시대다. 그런데도 사마천이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시작에 흠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천황제의 기원도 이와 흡사하다. 일본이 중국의 천자제도를 본떠 천황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기원만 같을 뿐 중국과 일본은 전혀 다른 황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에선 왕위가 한 가문에 의해 세습된 반면 중국에선 왕위를 차지한 가문이 끊임없이 바뀌었다.

    중국의 요(堯) 황제는 순(舜)에게, 순은 다시 치수의 대가였던 우(禹)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가문이 달라도 덕이 있는 인물에게 순순히 왕위를 넘겨줬다. 이를 중국에선 ‘선양(禪讓)’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덕치주의가 가장 이상적으로 행해졌던 시기로 평가받는 하·은·주 시대에는 강제로 왕위가 넘어갔다. 하는 은의 탕왕에 의해, 은은 또 주의 무왕에 의해 타도됐다. 이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현상을 중국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왕조의 덕이 쇠하면 천명이 바뀌고, 새로이 천명을 받은 왕조에 정통이 이어진다”고. 그러므로 중국의 왕조를 지배하는 뿌리는 천명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의 부름을 받은 자만이 백성을 다스리는 천자가 될 수 있다는 이른바 ‘천명(天命)사상’이 중국의 오랜 왕조의 역사를 이끌어온 것이다. 맹자는 ‘천명’을 일러 백성의 마음이 쏠리는 곳에 있다고 했다.

    이처럼 천명을 민심에서 찾은 중국은 통치의 정당성을 민심의 향배(向背)에 두었다. 만약 천명을 얻은 자가 민심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고 그것이 후대 제왕에 의해 계속 저질러지면 천명은 그 왕조로부터 떠나 새로운 왕조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천명을 바꾸는 것이라 하여 ‘혁명’이라 불렀고, 혁명이 성공했을 경우 ‘역성(易姓)혁명’이라고 했다.

    중국은 명분과 정통성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겼지만 왕조사는 한 가문에 의해 독점되지 않았다. 아니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며 선양과 역성혁명이란 길을 열어 놓았다. 이런 이유로 중국은 ‘하늘(天)-군주(子)’라는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도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흡수할 수 있었고, 역사의 판을 깨트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역성혁명은 중국 역사에 숨통을 터준 안전판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나라 이후 중국의 3000년 역사는 대략 300년을 주기로 역성을 해왔기에 성씨로 구분된다. 예를 들면 한(漢)은 유(劉), 수는 양(楊), 당은 이(李), 송은 조(趙), 명은 주(朱) 등으로. 우리나라 또한 그러했다. 신라는 김씨, 고려는 왕씨, 조선은 이씨로 이어졌다. 역성혁명이 이루어진 나라는 변화된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거나 역사를 기술한다.

    그러나 일본 왕가는 세습 독점 왕조인지라 역성혁명이 없었다. 아니 역성혁명 자체를 거부했다. 일본 천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역성혁명의 부재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일본은 왕조의 구분이 없고, 대신 쇼군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일본에는 시민이 없다

    여기서 비교해보려는 것은 역성혁명을 경험한 역사와 그렇지 않은 역사의 차이다. 역성혁명은 황제의 자기 통제적 요소로 작용해왔다. ‘누가 더 백성을 위할 수 있는가’ ‘그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가’ ‘민심을 잃으면 누구든 그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의식은 황제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책임은 무한하다. 고대 중국에선 이를 위해 역사를 썼다. 우리도 그랬다. 그 많은 기년체·편년체 사서와 실록 등이 그걸 말해준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서는 일본국의 기원을 밝히고 천황제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정도가 고작이다. 일본인의 역사인식은 같은 아시아 국가인 중국과 한국, 베트남과는 너무나 다르다.

    역성혁명이 존재하는 역사, 그리고 국민 총의에 의해 국가의 통치자가 선출되는 공화제에서 통치권자는 국민을 의식해야 하고 책임질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선 최고통치권자에게 책임을 물을 길이 막연하다. 통치권자의 권력과 지위는 국민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기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는 서구적 개념의 시민(citizen)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국민의 진정한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겉으로는 근대화된 것 같지만 시민이 참여한 경험이 부족한 일본의 근대화는 표피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 ‘자기 충전식’의 천황제는 책임의식이나 죄의식의 결여라는 문제점이 있다. 일본에는 역사의 심판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셈이다.

    1945년 11월10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평화를 위협한 범죄자에게 죄를 묻는 전범재판이 독일 뉘른베르크의 ‘정의의 전당’에서 열렸다. 이 재판에서 24명의 나치 고위관료와 장성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A급, B급, C급 전범자로 나뉘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이때의 판결기준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2000만 아시아인을 살상한 일본의 전범자에게도 적용됐다. 1946년 초부터 1948년 11월까지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일명 도쿄 전범재판은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일체의 전범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가한다”는 포츠담선언 제10항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면책된 일본 천황은 전범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범자를 처형한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단 한 명의 전범자도 처형하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인들로 하여금 전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갖게 했다. 특히 도쿄 전범재판에선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출석하지 않았는데도 면책 처리됐다.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역사학 교수인 미국 역사가 허버트 빅스는 인간 히로히토와 통치자로서의 히로히토의 일대기를 다룬 ‘히로히토와 현대 일본의 형성’(2001) 이라는 저서에서 “히로히토는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일본 국민을 전쟁터로 내보냈다”고 주장했다.

    빅스는 그 근거로 히로히토가 일본의 군국주의와 영토 확장을 옹호했고,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을 때 계속 진군을 명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의 책에 따르면 히로히토 천황은 1937년 도조 히데키 수상이 “천황이 전쟁을 결심하면 온 힘을 다해 소임을 완수하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고, 그 며칠 뒤 각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각 부대가 침략전선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데 이어, 중국으로 전쟁이 확대되자 장군들에게 “대규모 병력을 주요 거점에 집중해 일격을 가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겠는가”하는 충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한 1941년 12월7일에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싱가포르를 침공한 직후 도쿄로 승전보가 타전됐을 당시 “천황께서 해군 제복을 입고 기분이 매우 유쾌하신 듯했다”는 히로히토의 한 측근의 일기장도 공개됐다.

    빅스는 “그런데도 히로히토가 한국,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그의 병사들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만행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일본은 그러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전쟁의 책임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결코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무책임주의는 반드시 기회주의적 태도를 낳는다. 일본이 사죄하는 척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다,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오히려 더 많다’며 이리저리 말을 바꾸는 것은 바로 이런 무책임 구조와 기회주의적 태도에 기인한다.

    일본은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전범재판에서 용케 전쟁책임을 모면했다고 해서 역사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판이다. 법적 재판보다 더 가혹한 것이 바로 역사의 심판이다.

    ‘신이 아닌 신’을 섬기는 일본

    절을 찾은 불교도는 불상을 마주하고, 교회를 찾은 신도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일본의 신사나 신궁에선 신상을 볼 수 없다. 신사나 신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신을 모시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도 그들은 신상이 놓여야 할 곳에 흰색 천을 드리워 안을 볼 수 없게 해놓았다. 그래서 신사를 찾은 사람은 흰색 천만 바라보다 나온다. 형상을 갖지 않은 영혼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일견 맞는 말 같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진실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니 그들은 진실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신이 아닌 신을 모셔놓고 신으로 받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과거사 속죄 거부와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일본의 요즘 태도를 보면 안하무인이 따로 없다. 그 바탕에는 199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일본의 전후 총결산’과 ‘보통국가론’ 그리고 ‘자유주의사관’이 짙게 깔려 있다.

    ‘자유주의사관’이란 부정적이고 자학적으로 묘사된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긍정적으로 바꿔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줘야 한다는 일본판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다. 하지만 이는 ‘타학(他虐)사관’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는 남에게 뒤집어씌우거나 엄연한 사실을 부인 또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국가론’은 1993년 ‘제2의 메이지유신’으로 불리는 정치대란을 주도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그해 9월에 내놓은 ‘일본개조계획’의 일환으로 내세운 논리다. 그러면서 일본 우익은 현행 ‘평화헌법’의 개정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 골자는 자위권 확보와 천황의 국가 원수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불쌍해서다.

    전쟁이 끝난 지 이미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은 이제 어두운 과거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지금 그 기회를 놓치면 영영 구원받을 길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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