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중국 사상사 최대 이단아의 사상편력 ‘이탁오 평전’

  • 글: 심경호 고려대 교수·한문학 sim1223@korea.ac.kr

    입력2005-05-26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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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사상사 최대 이단아의 사상편력 ‘이탁오 평전’

    ‘이탁오 평전’<br>옌리에산, 주젠궈 지음/홍승직옮김/돌베개/592쪽/2만2000원

    충남서산의 마애삼존불은 깔깔 웃고 있다. 한 손을 올려 중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다른 한 손을 내려 중생의 소원을 받아주는 이 부처님은 얼굴 윤곽이 부드럽고 입술이 두툼하다. 오른쪽의 미륵보살은 고개를 틀고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다. 생각에서 깨어나 조금은 뚱한 표정이다. 왼쪽의 자그마한 보살은 요염한 웃음을 헤프게 흘린다. 삼존불은 깔깔 웃고 잔잔하게 웃고 요염하게 웃으면서, 호오의 구별도 없고 선악의 차별도 없이 중생에게 자신을 개방한다.

    문득 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 1527∼1602)가 떠올랐다. 이탁오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동심이란 거짓 없고 순수하고 참된 것으로 최초 일념(一念)의 본심이다. 사회의 견문이 동심을 오염하면 연극을 직접 보지 못한 채 군중에게 떠밀려 저 뒤쪽에서 버둥거리는 난쟁이(장애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왜소한 자를 뜻함)가 되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남의 평가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어버리기 일쑤다.

    이탁오는 ‘분서(焚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견문과 도리를 자기 마음으로 삼으면 말하는 것은 모두 견문과 도리가 하는 말이지, 동심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어찌 거짓 사람이 거짓 말을 하고 거짓 일을 하며 거짓 글을 쓰는 것이 아니랴. 사람이 거짓되면 거짓 아닌 것이 없다. 돌아가는 판이 온통 거짓뿐이지만, 뒤로 떠밀리는 난쟁이가 어찌 거짓임을 판별하랴.”

    또 지불상원에서 공자상을 공양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감히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 역시 그저 대중을 따를 뿐”이라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이탁오는 교조화한 주자학에 저항해 정신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아예 이단이기를 자처하여 칼로 머리를 밀었고, 혹세무민의 이단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자 칼로 제 목을 땄다. 섬뜩하리만큼 자기 사상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이런 그의 사상편력을 중국의 옌리에산(焉烈山)과 주젠궈(朱健國)가 ‘중국제일사상범 : 이지전’으로 엮었다. 그 책을 순천향대 중문과 홍승직 교수가 ‘이탁오 평전’이란 제목으로 고쳐 번역했다. 옌리에산은 현재 중국 ‘남방일보’ 그룹 최고 편집위원이며 시사평론가다. 주젠궈는 문학 및 사회문화 평론가이자 수필가다.

    유교에 대한 공개적 비판

    이탁오는 1527년(가정 6년) 푸젠(福建)성 취안저우(泉州)부 진장(晉江)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지(贄)이고 탁오는 호다.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해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관직을 그만뒀다. 이미 40세 때 왕양명의 학문을 접하고 심학(心學)에 몰두한 그는 62세 때 삭발하고 불교에 심취했다. 76세 때 예과 도급사중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을 받고 ‘혹세무민’의 죄로 투옥된 뒤 옥중에서 자살했다.

    이탁오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두 저자는 그의 편지글, 시문, 학술저서와 동시대인 및 후대인들이 그에 관해 쓴 편지글과 시문 저술을 소개하고 해설했다. 그리고 이탁오를 ‘봉건 전제에 반대한 투사이자 사상 해방의 선구자’로 부각시켰다. 그래서 이탁오의 사상이 지닌 반체제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원 자료들을 많이 제시했기 때문에 ‘이탁오 평전’을 읽는 것만으로 이미 이탁오 저술의 상당량을 읽는 것이 된다.

    중국은 20세기 초 일어난 ‘5·4 신문화 운동’을 계기로 이탁오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간 이탁오는 봉건사상을 철저하게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 평전은 이탁오가 봉건체제를 근본적으로 반대한 ‘유교 반도(叛徒)’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문화의 전제를 반대한 사상 해방의 선구자였다고 밝힌다.

    이탁오는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고 자아비판을 한 후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에 대해 갖가지 저술을 통해 비판했다.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조차 공자는커녕 주희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비판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탁오의 사상은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예견하고 자신의 책을 ‘분서’ 곧 ‘태워버려야 할 책’이라고 이름짓기까지 했다.

    이탁오는 인간의 욕망과 사리를 존중했다. 그는 “옷 입고 밥 먹는 일이 바로 윤리이고 물리(사물의 이치)다. 이를 빼면 윤리도 물리도 없다. 세상의 온갖 것이 모두 옷과 밥 같은 부류일 뿐이다”고 했다. 또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순도자(殉道者)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이탁오의 사상편력을 서술하면서 경정향(耿定向)과 대립한 사실과 원굉도(袁宏道) 형제와 교류한 정황을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이 구도는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탁오 평전으로 일찍이 룽좌쭈(容肇祖)의 ‘이탁오 평전’(1937년, 상해 상무인서관)과 ‘이지연보’(1957년, 북경 삼련서점)가 나왔는데, 여기에도 이탁오와 경정향이 대립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또 원굉도 형제와 교류한 사실은 첸보청(錢伯誠)이 관련 점교본에서 밝힌 바 있다. 단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참조하여 사실관계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또한 이탁오의 사상을 서구 사상과 다각도로 비교했다. 이탁오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길을 가는 데 힘쓴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저자들은 그 원리가 감성이나 직관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 현상을 겨냥해서 무작위로 제시한 것이어서, 칸트가 ‘인간은 목적이지 도구가 아니다’라는 인본주의 명제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오히려 이탁오의 관점은 프랑스의 몽테뉴나 볼테르, 영국의 존 버니언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또 이탁오가 참된 지식을 추구한 것은 프랑스의 디드로와 비슷하다고 했다.

    두 저자는 이탁오의 사상에서 체제 비판의 급진성을 읽어냈지만, 결국 그의 사상이 그리고 전근대 중국의 사상이 서구 사상보다 열등하다고 봤다. 마테오리치와 이탁오의 만남에 대해 “한탄스러운 것은 오래된 중국에 설령 타고난 재능과 사상을 지닌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박학한 선교사 하나를 상대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서양 제일류의 대학자이며 사상가인 베이컨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더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누가 중화 민족의 낙오를 초래했는가?” 하고 한탄했다. 이런 언설에는 계몽주의적 관점과 전반서화파(全般西化派)의 논리가 숨어 있다.

    ‘천길 위를 나는 봉황’

    두 저자의 비교사상론은 일본의 시마다 겐지(島田虔次)가 이탁오를 평가한 방식과 견줄 만하다. 시마다는 1948년 4월, 즉 중국혁명이 일어나기 1년6개월 전에 “이탁오가 욕망을 긍정하고 사(私)를 강조했고 군주 중심이 아닌 민 중심적인 정치관을 내세웠으며 리(理)의 다양한 발현을 주장했다”는 점을 논했다. 그리고 이탁오에게서 중국 근대 사유의 좌절을 보았다. 시마다는 아시아적 정체론을 타파하고 왕양명에서 황종희, 고염무에 이르는 사상사에서 루터, 로크, 루소의 사상을 읽어냈다. 시마다는 명과 청을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중국의 근대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아니라 인민공화국 혁명에서 완성됐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유럽을 통해 중국적 독자성을 검출했을 뿐 중국을 통해 유럽을 독자적으로 보려는 관점은 희박했다. 시마다에 비해 이 책의 두 저자는 이탁오의 사상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명료하게 밝히지 못했다. 중국을 통해 유럽을 상대화하려는 관점은 더욱 더 희박하다고 하겠다.

    이탁오는 경정향에게 부친 서한에서 “광자(狂者)는 옛 인습을 따르지 않고 지난 자취를 밟지 않으며 식견이 높아, 이른바 천길 위를 나는 봉황이다.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원굉도는 이탁오를 두고 “노자(老子)는 본성이 용(龍)이었고, 초인(楚人)은 공자를 봉황이라 노래했네”라고 했다. 그를 변환자재한 사상가이자 시대를 잘못 만난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천길 위를 나는 봉황’ 이탁오는 시대를 너무도 앞서간 존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허균이 그의 저술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고, 박지원 등 조선 후기 진보적 지식인들도 그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의 선구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에 의해 이탁오의 저서가 널리 소개됐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대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도 이탁오는 되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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