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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어머니 콩꽃처럼 희디흰

어머니 콩꽃처럼 희디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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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때 고향에 남은 유일한 땅인 수실(들 이름) 밭에 심어 놓은 흰콩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쯤 고랑에 난 잡풀을 잡지 못하면 콩밭이 풀밭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 지금쯤 콩 순을 쳐줘야 뒤이어 올 태풍에 콩이 쓰러지지 않고 다보록이 자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삼우제가 끝나기 전에는, 무엇보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휘둘리며 ‘나도 이젠 농사꾼이 다 된 모양이여’ 하면서 쓴웃음을 흘렸지요.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신 후 잠시 멎었던 비가 삼우젯날 새벽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장사(葬事)가 어렵다는 걸 익히 들은 바 있는 저는 비닐을 갖고 어둑한 신새벽에 묘지로 향했습니다. 세찬 빗줄기에 봉분이 상했을까봐 걱정이 되었던 겁니다. 제가 어머니 산소에 갔을 때는 한발 늦었습니다. 어머니 산소의 봉분 한쪽이 벌써 주저앉은 겁니다. 죄스럽고 난감한 일이었지만 날씨를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후에 시골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 산소의 봉분을 헐고 처음부터 다시 쌓았습니다.

“여름엔 산소관리 잘해야 된다. 비 오면 비닐 덮고 비 그치면 벗겨주고.”

“비 안 오고 뜨거운 날엔 물도 뿌려줘야지. 잔디 잘 살리려면 고생 좀 해야겠다.”



“자네가 어머님 생전에 불효를 했는갑다. 하하.”

뜻하지 않은 산역을 두 번씩이나 한 친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더군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꼭 일주일 후에 고향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그 부고 역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오더군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동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시오 리쯤 떨어진 곳이라 자동차로 가면 금방입니다. 부고를 받은 날부터 발인하는 날까지 연 이틀을 상가에서 보냈습니다. 일종의 품앗이지요. 제 어머니는 영구차로 모셨지만, 이 친구의 어머니는 상여를 꾸며서 모셨습니다. 장지인 공동묘지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기에 젊은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상여를 멨습니다. 저는 앞서 떠난 산역꾼을 따라가지 않고 상두꾼에 속해서 상여를 멨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렀는데도 상여가 장지에 도착했을 때는 햇볕이 뜨거웠습니다. 상두꾼과 산역꾼, 그리고 마을의 부녀회원들과 어르신들이 천막 아래 모여서 술과 음식을 먹었습니다. 상사(喪事)는 호상(好喪)이라 걸쭉한 농담이 자연스레 오가는데, 여자 상주들의 곡소리가 늦은 밤 새소리처럼 간간이 들렸지요. 슬픔도 곡소리도 농지거리도 허옇게 퇴색될 만큼 뜨거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막걸리 두 사발과 수박 한쪽으로 입을 가신 저는 산소자리로 올라가 산역꾼들이 파놓은 광중(壙中)을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일주일 전, 빗속에서 어머니가 들어갈 자리를 보고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지요. 그러다가 담배를 한 대 물고 공동묘지 건너편 들판을 넘겨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묘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꿈속의 장면을 실제로 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잠시 후 그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된 저는 실소하고 말았습니다. 그 건너편 들판에 우리 콩밭이 있었던 겁니다.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밭에서 공동묘지를 건너다보았지만, 공동묘지에서 우리 밭쪽을 본 게 처음이었던 탓에 그리 되었던 겁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저는 콩밭으로 갔습니다. 콩은 종아리께까지 자라서 가벼운 바람에도 너풀거렸지요. ‘그래. 내일쯤 낫을 벼려서 순을 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콩잎을 들추는 순간 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흰머리 같은, 생전의 환한 웃음같이 피어나는 희디흰 콩꽃을 말이지요. 이제 시기를 놓쳐 순을 지르기는 틀린 겁니다. 꽃이 핀 나무는 가지를 부러뜨릴 수 없는 법이니까요.

49재를 올릴 무렵이면 콩꽃은 꼬투리가 되고 가을바람도 살폿 불겠네요. 그때쯤 저는 어머니를 마음에서 놓아드릴 테니 어머니께서도 한시름 놓고 편안히 가시지요.

신동아 200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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