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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만에 내한공연 여는 베를린 필

최고의 지휘자들이 조련한 ‘20세기 오케스트라의 귀감’

  • 박정준 월간 객석 편집장 jun@gaeksuk.com

21년 만에 내한공연 여는 베를린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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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3년 전통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1월7일과 8일 서울 무대에 오른다. 1882년 창단해 120여 년의 세월을 이어온 베를린 필의 역사는 그 지휘자들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베를린 필’ 하면 16대 수석지휘자가 된 래틀을 포함해 뷜로, 니키시, 푸르트벵글러, 첼리비다케, 카라얀, 아바도 등 7명의 지휘자를 떠올린다. 이들은 베를린 필과 동일시된다. 베를린 필과 명성을 함께한 지휘자들의 발자취와 그들이 3세기에 걸쳐 일군 베를린 필의 신화를 살펴보자.
21년 만에 내한공연 여는 베를린 필
지금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시작은 미미했다. 베를린 필의 탄생을 살펴보면서 벤야민 빌제(Johann Ernst Benjamin Bilse·1816∼1902)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빌제는 오스트리아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악단에서 연주한 경력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 1842년, 불과 26세의 나이에 고향인 라이그니츠 악단의 지휘자가 된다. 이 악단을 바탕으로 빌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빌제셰 카펠레(Bilsesche Kapelle·이하 ‘빌제 악단’)’를 탄생시켰고,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펼쳤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빌제 악단이 해외 연주 여행에 나선 건 1862년경이다. 1867년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협연해 성공을 거둔 것을 비롯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라트비아의 리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오스트리아의 빈 등 유럽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빌제는 그해 인구가 1만5000에 불과한 라이그니츠를 떠나 베를린의 라이프치히 슈트라세에 위치한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빌제 악단의 ‘빌제 콘서트’는 3000회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이즈음 베를린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유럽 대륙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과 혁명의 직접적인 포화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1862년 프로이센의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 정책의 직접 수혜 지역으로서 유럽의 명실상부한 중심도시로 거듭났던 것. 1871년 통일독일제국이 완성될 당시 베를린의 인구는 83만에 육박했다. 이는 ‘경제력을 갖춘 음악 수요 인구’를 의미했다.

그러나 빌제는 이윤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연주 일정을 무리하게 계획하면서도 단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지 않아 단원들의 원성을 샀다. 빌제가 계속해서 독단적으로 악단을 운영하자 1882년 단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다. 바르샤바 여름 시즌 연주 여행 도중 단원 54명이 독립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한 것. 이것이 실질적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시작이다.

당시 베를린에서 빌제 악단의 명성은 대단했다. 루드비히 폰 브렌너가 지휘하는 54명의 단원은 새 악단의 이름에 어떻게든 ‘빌제’를 넣어보려 했으나 빌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빌제 악단은 이른바 심각한 레퍼토리보다 오늘날의 ‘빈 신년음악회’나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까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레퍼토리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일명 ‘빌제 콘서트’로 부르던 연주회에는 식사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던 초기 베를린 필은 식사 제공 공연을 기획할 수 없었다. 결국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대신) 음악에 집중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초기 베를린 필은 연주 여행 도중 숙소에 불이 나 악기가 타버리는 역경을 겪기도 했으며, 기대와 달리 흥행 성적도 형편없었다.

베를린 필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건 당시 재력가 헤르만 볼프가 베를린 필에 애정을 갖고 한스 폰 뷜로(Hans von Bulow·1830∼1894)라는 훌륭한 지휘자를 베를린 필에 연결해주면서다. ‘식사를 제공하는 상업적인 공연이 아닌, 진지한 연주회’를 하는 악단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1884년에 처음 베를린 필을 지휘한 한스 폰 뷜로는 1887년에 공식적으로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됐다.

뷜로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음악에 열린 시각을 지닌 음악가였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베를린 필의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뷜로는 원래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의 제자였으며,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했다. 이후 리하르트 바그너에 경도되어 그의 작품을 지휘하며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으나, 바그너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

전통-진보 넘나드는 레퍼토리

말년에 접어든 뷜로는 베를린 필을 오스트로-저먼 음악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교향곡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은 연주회 시리즈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베를린 필은 그들을 계승하는 오스트로-저먼 전통의 교향악을 육성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이는 20세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귀감이자 모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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