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21년 만에 내한공연 여는 베를린 필

최고의 지휘자들이 조련한 ‘20세기 오케스트라의 귀감’

  • 박정준 월간 객석 편집장 jun@gaeksuk.com

    입력2005-10-26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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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년 만에 내한공연 여는 베를린 필
    지금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시작은 미미했다. 베를린 필의 탄생을 살펴보면서 벤야민 빌제(Johann Ernst Benjamin Bilse·1816∼1902)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빌제는 오스트리아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악단에서 연주한 경력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 1842년, 불과 26세의 나이에 고향인 라이그니츠 악단의 지휘자가 된다. 이 악단을 바탕으로 빌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빌제셰 카펠레(Bilsesche Kapelle·이하 ‘빌제 악단’)’를 탄생시켰고,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펼쳤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빌제 악단이 해외 연주 여행에 나선 건 1862년경이다. 1867년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협연해 성공을 거둔 것을 비롯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라트비아의 리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오스트리아의 빈 등 유럽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빌제는 그해 인구가 1만5000에 불과한 라이그니츠를 떠나 베를린의 라이프치히 슈트라세에 위치한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빌제 악단의 ‘빌제 콘서트’는 3000회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이즈음 베를린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유럽 대륙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과 혁명의 직접적인 포화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1862년 프로이센의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 정책의 직접 수혜 지역으로서 유럽의 명실상부한 중심도시로 거듭났던 것. 1871년 통일독일제국이 완성될 당시 베를린의 인구는 83만에 육박했다. 이는 ‘경제력을 갖춘 음악 수요 인구’를 의미했다.

    그러나 빌제는 이윤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연주 일정을 무리하게 계획하면서도 단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지 않아 단원들의 원성을 샀다. 빌제가 계속해서 독단적으로 악단을 운영하자 1882년 단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다. 바르샤바 여름 시즌 연주 여행 도중 단원 54명이 독립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한 것. 이것이 실질적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시작이다.

    당시 베를린에서 빌제 악단의 명성은 대단했다. 루드비히 폰 브렌너가 지휘하는 54명의 단원은 새 악단의 이름에 어떻게든 ‘빌제’를 넣어보려 했으나 빌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빌제 악단은 이른바 심각한 레퍼토리보다 오늘날의 ‘빈 신년음악회’나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까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레퍼토리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일명 ‘빌제 콘서트’로 부르던 연주회에는 식사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던 초기 베를린 필은 식사 제공 공연을 기획할 수 없었다. 결국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대신) 음악에 집중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초기 베를린 필은 연주 여행 도중 숙소에 불이 나 악기가 타버리는 역경을 겪기도 했으며, 기대와 달리 흥행 성적도 형편없었다.

    베를린 필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건 당시 재력가 헤르만 볼프가 베를린 필에 애정을 갖고 한스 폰 뷜로(Hans von Bulow·1830∼1894)라는 훌륭한 지휘자를 베를린 필에 연결해주면서다. ‘식사를 제공하는 상업적인 공연이 아닌, 진지한 연주회’를 하는 악단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1884년에 처음 베를린 필을 지휘한 한스 폰 뷜로는 1887년에 공식적으로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됐다.

    뷜로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음악에 열린 시각을 지닌 음악가였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베를린 필의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뷜로는 원래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의 제자였으며,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했다. 이후 리하르트 바그너에 경도되어 그의 작품을 지휘하며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으나, 바그너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

    전통-진보 넘나드는 레퍼토리

    말년에 접어든 뷜로는 베를린 필을 오스트로-저먼 음악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교향곡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은 연주회 시리즈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베를린 필은 그들을 계승하는 오스트로-저먼 전통의 교향악을 육성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이는 20세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귀감이자 모델이 된다.

    그후 베를린 필에는 뷜로의 후광으로 헤르만 레비, 한스 리히터, 펠릭스 모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등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이 객원 지휘자로 초대된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요하네스 브람스, 에드바르트 그리그,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피츠너와도 교류했다. 이는 그대로 베를린 필의 역사로 남는다.

    그러나 뷜로는 1892년, 베를린 필의 공식 지휘자가 된 지 불과 5년 만에 건강이 나빠져 자리에서 물러났다. 2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베를린 필은 장례식 연주를 맡았다.

    헝가리 출신으로 빈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빈과 부다페스트에서 지휘활동을 하던 아르투르 니키시(Arthur Nikisch·1855∼1922)는 1895년에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됐다. 그는 냉정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정확하고 명민한 지휘를 했다. 우아하고 섬세한 성품의 그는 뷜로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전-낭만주의와 당대 음악 연주에 힘썼다. 베를리오즈와 리스트를 비롯해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말러의 교향악을 본격적으로 연주했다. 지금은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음악을 연극하며 오케스트라는 한층 단련됐다. 또 당대 최고의 독주자인 피아니스트 페루치오 부조니와 빌헬름 박하우스,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을 초청해 연주했다.

    니키시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병행했으므로, 당대 독일 최고의 악단 두 개를 이끈 셈이다. 이는 오히려 베를린 필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굳건한 전통이 베를린 필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니키시가 지휘봉을 잡은 기간에 베를린 필은 근대 오케스트라의 완벽한 전형을 제시했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오케스트라의 단원 수를 크게 늘려 편성했고, 오늘날과 같은 4관 편성 그랜드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또한 오스트로-저먼계 음악 역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세계 최고의 악단으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니키시는 1922년 타계할 때까지 27년간 베를린 필을 이끌었다.

    ‘독일정신’의 날개 없는 추락

    그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유럽대륙을 휩쓸었다. 그 전쟁의 중심에 독일이 있었지만 베를린은 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전쟁이 끝난 1918년 새로운 체제의 독일공화국 수도가 됐다.

    1920년 10월1일에는 기존 베를린의 행정구와 농촌 공동체, 그리고 사유지를 하나로 결합, 20개 행정구로 그 범위를 대폭 넓힌 근대적인 메트로폴리스 베를린이 탄생했다. 당시 베를린은 진보적인 문화의 전진기지였다.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이나 ‘메트로폴리스’ 같은 영화는 당시 베를린의 역동성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런 대도시로의 변신 이면에는 앞으로 닥쳐올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세계 대공황과 나치의 등장,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과 동서 분할이라는 격동의 세월이 그것이다. 1922년 니키시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1886∼1954)는 독일정신의 날개 없는 추락의 한가운데서 독일 정신을 계승하는 베를린 필의 수호천사가 된다.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태생으로 일찍이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스무 살 되던 해에 지휘에 입문했다. 그로부터 채 10년이 되기 전에 독일을 대표하는 천재 지휘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22년 2월 니키시 추모음악회를 지휘하고, 5월에 베를린 필 창단 4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하면서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을 이끌게 된다. 그는 니키시로부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 양대 악단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이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음악 감독,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 자리를 석권하며 음악계의 황제로 등극한다. 이후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음악계의 황제’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음악 전통의 수호자이자, 전통을 미래로 이어간다는 베를린 필의 정신에 충실했다. 특히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악에서 그가 빚어내는 음악은 단순한 연주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이끄는 베를린 필의 연주회를 직접 관람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오늘날 음반으로 전해지는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의 연주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치 정권에서의 생존법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뒤로 20여 년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은 고난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정치적인 이유로 음악이 정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맥을 잇는 가운데, 앞으로 적국으로 싸우게 될 프랑스의 드뷔시와 소비에트 연방의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당시의 아방가르드 작품을 연주했으며 유대계 음악가들과도 두려워하지 않고 교류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 그리고 12세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등 유대계 음악인과 연주 교류를 계속했다.

    혹자는 나치스에 대한 푸르트벵글러의 저항이 매우 소극적이었다고 평한다. 그러나 괴벨스가 유대계 음악가인 브루노 발터 지휘의 베를린 필 연주회를 강제로 중단시키자 이에 격분, 괴벨스에게 그 사유를 묻는 질의서를 보냈고, 나치스에 의해 퇴폐음악으로 분류된 파울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 연주를 강행했다. 나치스가 주관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장송음악 연주를 거부한 일도 나치에 대한 강경한 저항이 아닐 수 없다.

    21년 만에 내한공연 여는 베를린 필

    베를린 필은 단원 모두가 독주자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다.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등 오케스트라 내 실내악단만 30여 개다. 2002년 내한한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연주했다.

    나치스의 광기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유대계 음악가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푸르트벵글러는 몇몇 음악가의 망명을 비밀리에 추진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브루노 발터와 오토 클렘페러다.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나치스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는 나치스 전당대회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고, 빈 필을 가만둘 것을 호소했다. 푸르트벵글러는 히틀러가 바그너의 곡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유럽대륙은 살육의 현장으로 돌변했다. 선전전을 위한 베를린 필의 방송 연주회가 증가했고, 푸르트벵글러는 악단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1940년 히틀러의 생일 전야에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는 대신 베를린 필 단원의 징집을 면제받기도 했다.

    전쟁에서 독일은 점점 열세로 몰렸다. 동맹국에 연주 여행을 나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독일 본토에 폭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연주회를 여는 일도 늘어갔다. 언제 폭탄이 연주회장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이 1940년대 전쟁 중에 녹음한 음반은 여러 군데로 흩어졌는데, 점령국인 구소련에 넘어간 음반은 20세기말이 되어서야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이 녹음 곡들을 들으면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때의 연주가 베를린 필의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왕의 귀환’

    1945년, 히틀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해 1월에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 연주회를 연 후 스위스로 도피했다. 베를린 필은 4월에 푸르트벵글러 없이 독일 제3제국 하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다. 독일은 5월7일 항복했고, 5월 말 폐허 속에서 베를린 필은 연주를 재개했다. 이후 루마니아 태생의 33세 젊은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1912∼1996)가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스위스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으나, 결국 1946년 독일로 돌아와 재판을 청했다. 푸르트벵글러의 무죄가 입증됐으나, 이듬해인 1947년까지 연주활동이 금지됐다.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고, 동독 지역으로 들어간 베를린에는 구소련의 봉쇄라는 걸림돌이 남아 있었지만, 전쟁 상황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은 베를린에 들어가 베를린 필과 협연한다는 용단을 내렸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메뉴인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작은 사건은 국제사회가 베를린 필의 평화 전도사 역할을 인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베를린 필은 서독지역으로 연주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1952년 푸르트벵글러가 수석지휘자로 복귀했다. 수석지휘자 자리를 내준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 단원들은 ‘왕의 귀환’에 경배했다. 1954년, 베를린 필의 수호자이자 진정한 독일정신의 수호자 푸르트벵글러는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오늘날에도 전설적 존재로 회자되고 있다.

    베를린 필은 단원들의 투표를 통해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을 지휘자를 정했다. 첼리비다케는 이 결정에 배신감으로 치를 떨어야 했다.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1989)이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다. 첼리비다케는 다시는 베를린 필을 지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또 다른 최고의 악단인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와 카라얀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첼리비다케는 레코딩을 ‘깡통에 담긴 콜라와 같다’고 할 정도로 음반 녹음을 싫어했다. 말년에는 뮌헨 필과의 공연 녹음을 음반으로 만들지 말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유언을 어기고 첼리비다케의 뮌헨 필 녹음을 음반으로 출시했다. 그중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은 역대 최고의 명연으로 평가받는다. 첼리비다케 사후 그의 유품 중에서 베를린 시민증이 발견되기도 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전성시대

    다시 카라얀의 얘기로 돌아간다. 카라얀은 1908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신동으로 각광받았다. 19세의 나이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니 출세가 빨랐다. 그런데 5년 만에 밀려나고 만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인다. 어린 시절 신동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카라얀은 자신에게서 스포트라이트가 비켜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1933년 나치스에 입당하고, 이듬해 바로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그 이듬해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1937년과 1938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무대를 차례로 거쳤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그는 위기를 맞이했다.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에서였다. 1947년 해금됐지만 어느 무대도 그를 웃는 낯으로 반기지 않았다. 카라얀에게 면죄부를 준 건 런던 EMI의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레그는 오케스트라 레코딩 음악에 대한 카라얀의 탁월한 감각을 알아보고, 당시 구성된 레코딩 전문악단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그에게 맡겼다. 이렇게 지휘무대에 복귀한 그에게 베를린 필의 지휘자, 즉 음악계의 황제 자리가 주어진 것이다.

    20세기적인 세련된 음악 만들기, 그 음악을 또한 세련되게 음반에 담아 큰 수익을 올릴 가능성, 이런 점이 카라얀을 밀어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명확히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첼리비다케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들이다. 1955년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1956년 종신 예술감독까지 요구해 성취했으며, 그해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직도 겸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레지던트 오케스트라는 빈 국립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즉 빈 필이었으므로 베를린 필과 빈 필이라는 양대 산맥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카라얀은 이후 약 33년간 양쪽의 지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다른 어떤 페스티벌과 비교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음악제로 끌어올렸다. 음악제에는 당연히 세계 최정상급의 음악가들이 초대됐으며, 음악과 연출, 무대 가릴 것 없이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즉 카라얀의 눈에 들지 못하면 베를린 필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무대를 밟을 수 없었다. 제왕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윤이상 작품 여러 차례 초연

    ‘노란 딱지’로 유명한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 ‘카라얀-베를린 필 포스터’가 붙었다. 푸르트벵글러 시절보다 몇 배나 커진 ‘음악계 황제’의 권력을 구축한 카라얀은 음반뿐만이 아니라 영상물을 통한 음악산업을 육성하며 연출에도 나섰다.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레코딩은 1000여 종에 달하고, 전세계에서 약 1억2000만장이 팔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라얀의 음반과 영상물이 팔려 나가고 있다. 카라얀의 영상물은 소니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카라얀이 임종 직전에 자신의 영상물 저작권 중 상당부분을 소니에 팔았기 때문이다.

    모든 음악을 다 잘 연주하는 지휘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카라얀은 음반산업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자신의 분야가 아닌 곳에도 문어발식으로 마구 손을 댔다. 카라얀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의 대부분이 이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30년 이상 이끌어오면서 완성도 높은 음반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의 연주 중에는 ‘싸구려’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명연이 수두룩하다.

    카라얀은 고전파 작품보다는 낭만주의 작품의 해석과 연주에 능했다. 또한 베를린 필의 굳건한 전통은 미래지향적인 음악에 항상 열려 있었다. 윤이상의 작품이 베를린 필에 의해 초연된 것도 여러 번이며, 20세기 내내 윤이상의 작품은 베를린 필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은 지난 1984년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영광의 생애를 살다가 1989년 타계했다. 당시 그의 뒤를 이을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여러 인물이 거론됐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제임스 레바인, 주빈 메타, 로린 마젤 등등. 세계 음악계는 누가 후임으로 선출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극장과 빈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를 역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1933∼ )가 선출되자 반신반의하며 박수를 보냈다.

    20세기 후반은 말러 교향곡의 인기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고, 아바도는 자타가 공인하는 말러 교향곡의 스페셜리스트다. 아바도는 임기 초에 말러의 음악을 계승한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를 연주하는 등 오스트로-저먼 음악의 역사적인 흐름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쇤베르크는 20세기 신(新)빈악파의 선구자였고,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의 동지였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의 레퍼토리에 말러를 넘어선 20세기 작품의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동시대 작품을 연주하는 건 베를린 필의 전통이었지만 아바도는 더욱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조련사’, 사이먼 래틀

    아바도는 ‘압바드’에서 왔다고 한다. 아랍계 이탈리아인이다.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밀라노음악원 교수를 지냈고, 형은 파르마음악원의 원장을 지냈다. 아바도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주세페 시노폴리, 리카르도 샤이 등 20세기의 쟁쟁한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들은 대부분의 음악이 노래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잘 알았다. 아바도는 오케스트라가 노래를 연주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서양음악의 기본이 된 독일음악의 구조 해석학 분야에서 선두주자였다.

    1990년 가을부터 임기를 시작한 아바도는 곧 독일 통일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아바도가 단원들에게 배척당하고 있으며, 단원들과 불화가 심하다거나 곧 사임할 거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모두 사실무근이었다. 다만 아바도가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은 사실로 드러났다. 위암은 임기 후반에 접어든 아바도에게 최대의 적이었다. 그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위암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생명이 위태롭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는 병마와 싸워 이겼다. 그리고 생명 연장을 위해 베를린 필이 부여한 종신지휘자 자리를 내놓았다.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아바도는 1998년 “2002년 이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21세기 새로운 베를린 필의 리더십이 긴요했던 것이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베를린 필은 1999년 6월23일, 영국 출신의 오케스트라 조련사,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1955∼ )을 차기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선출했다.

    사이먼 래틀은 25세 때인 1980년 런던 외곽의 시골 악단 버밍엄 심포니를 이끌며 영국 최고의 악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단련시켰다. 이런 업적이 인정되어 영국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버밍엄 심포니는 국립 교향악단이 됐다. 그때부터 래틀에게 ‘조련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베를린 필 창립 120주년이던 2002년 가을 시즌, 드디어 새로운 지휘자 래틀이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섰다. 영국의 작곡가 토머스 아데의 ‘아실라’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해 음악 감독 취임을 자축했다.

    래틀은 매우 진취적인 성향의 지휘자이며, 모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음악의 혁명가다. 그는 베를린 필이 그 스스로 ‘미친 프로젝트’라 부른 혁신적인 작업을 수행하게 했다. ‘미친 프로젝트’는 독일 사회의 계층적, 인종적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것, 래틀은 통일 독일의 사회적 약자 계층을 대변하는 동베를린 출신 문제아, 이민 노동자의 자녀 등이 포함된 10대 청소년 집단을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공연의 의상, 조명, 안무, 연주 등에 참여시켰다. 래틀은 “음악은 사회를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주자 못지않은 기량

    베를린 필은 단원 투표로 지휘자를 뽑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단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만 수석지휘자가 될 수 있다. 베를린 필의 단원이 되려면 동료 단원들 앞에서 오디션을 치러야 한다. 일정 기간 수습 단원으로 지낸 뒤 같은 파트 동료 단원의 추천을 받아 단원 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정단원이 될 수 있다. 베를린 필 단원이 독주자 못지않은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신적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이 이끄는 베를린 필이 내한 공연을 한다. 카라얀과 함께 1984년 내한한 이후로 21년 만의 한국 방문이다. 11월7일과 8일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를 메인 프로그램으로 연주할 예정이다. 가을밤을 뜨겁게 달굴 ‘혁신의 무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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