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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책하고 놀자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아오이가든’

혀끝에서 맴도는 이야기, 신화, 소설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아오이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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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선정, 추출, 복귀

말해지지 않는 이름은 탐문되지 않는 현실이다. 그것은 얼음 덩어리다. 얼어붙어 덩어리가 된 아이스크림은 그것을 절단하려는 칼을 미끄러지게 한다. 얼음 덩어리는 “덩어리 상태로 저장된 의미”에 대한 메타포다. 미끄러지는 칼은 현실(덩어리)에서 의미를 “선정, 추출, 복귀”시키려는 자, 곧 글을 쓰는 자를 가리킨다. 글쓰기의 고통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의 고통과 하나로 겹쳐진다.

‘아오이가든’은 신예소설가 편혜영의 단편소설을 묶은 창작집이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는 시체다. 책의 목차가 끝나고, 본문이 시작되는 첫 면에 밑도 끝도 없이 “안녕, 시체들”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뿐 아니다.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곳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저수지’),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문득’),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내가 실종된 지 한 달가량 지나서였다”(‘시체들’)와 같이 아예 소설의 모두(冒頭)에서부터 죽음과 관련된 실종이나 우연히 발견된 시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사라지거나 죽는다. 실종의 모티프는 존재했다가 사라진 자들의 흔적을 탐문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시체들이 발견됐다면 마땅히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가 존재하고, 그러한 사건이 벌어진 곡절과 사연이 있을 터다. 그러나 소설에서 누가 왜 그들을 죽였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오로지 시체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것들을 미궁 속에 몰아넣는다. 소설 속의 장소는 누군가 죽은 저수지이거나 “형제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라진 숲”(‘서쪽 숲’), 죽음의 냄새가 음습하게 피어오르는 동굴이나 맨홀이다. 평론가 이광호는 해설에서 이 장소들을 “하드고어 원더랜드”라고 부른다. 이 장소는 산 자조차 깜깜한 밤에 구더기와 함께 매장되는 계곡이다(‘시체들’). 시체 아니면 붉은 개구리를 낳는 여자(‘아오이가든’), 죽어가는 쥐들(‘마술 피리’)이다.



자명한 현실의 무수한 균열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의 모습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자명함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무수한 균열과 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 타자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간극은 의외로 크다. 그 간극은 “삼백오십만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틈으로 흐르는 시간에 묶여 있고, 늙어간다.

“그녀가 있어야 하는 하루가 흐르고, 중첩된 하루하루가 묶여 세계가 된다는 걸 안다. 시간이 흐르는 건 축복이었다. 나에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아침에 맞닥뜨린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어제와 오늘 사이의 간극이 삼백십오만년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매시 매분마다 나날이 늙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살갗, 태초에 붉은색으로 태어났다가 시간과 함께 점차 옅어졌다가 종내는 시커멓게 변해버린 살갗.”(‘아오이가든’)

편혜영이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은 문명의 이면이다. 문명의 이면은 곧 위생적이고 안전하다고 믿는 자명한 현실의 이면이다. 편혜영의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는 왜 ‘시체’에 집착할까? 문명세계의 삶이 무수한 사체 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문명의 이면이 얼마나 끔찍한 야만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기학의 관점에서 풀어보자면 시체는 대기활동운화의 힘이 변통을 드러내는 이미지다. 변통이 상습화한 세계에서의 삶은 불길하며 끔찍하다. 무시로 출몰하는 사체는 그 변통의 가시적 실체며, 괴이쩍은 세계의 파편적 상이다. 작가는 세상에 널린 끔찍함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뇌리를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기라도 할 듯 사체들의 이미지를 쑤셔 넣는다.

신동아 200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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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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